박탈당한 노동권, 인권... 손 잡아주며 함께 울어준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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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탈당한 노동권, 인권... 손 잡아주며 함께 울어준 곳
  • 정명자
  • 승인 2021.09.07 07: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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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레이 기고] 정명자 / 43년전 동일방직 해고자
ⓒ강영희
화수-화평동 재개발 지역에 자리잡고 있는 산업선교회ⓒ강영희

 

산업선교회가 재개발로 인해 철거 위기에 놓여있다고 한다. 이 말을 들으면서 마음이 철렁 내려앉았다. 산업선교회는 나에게는 마음의 고향과도 같은 곳이기 때문이다. 고향은 태어나 자라면서 겪은 수많은 희노애락이 서려있는 그리움이다, 고향에 대한 추억은 누구나가 다 가지고 있다.

산업선교회는 어떤 곳인가. 반세기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 본다.

1970년대 당시 한강의 기적을 이룬 경제성장의 주역들인 노동자들은 장시간 노동과 저임금 정책으로 가난 할 수밖에 없었다. 근로기준법과 노동조합법은 지켜지지 않았다. 오죽했으면 전태일 선배가 근로기준법을 지키라고 외치며 근로기준법 책과 자신의 몸을 불살랐을까. 뿐만 아니다. 노동자들의 유일한 기본권인 노동3권 역시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으로 묶여있어서 정상적인 노조활동을 할 수 없었다. 노동법은 빛좋은 개살구였다.

 

산업선교회와 동일방직 노조

산업선교회는 이런 반노동자적인 시대에 “약한 것을 강하게 강한 것을 바르게”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사회적 약자인 노동자들을 위한 선교활동을 시작하였다. 특히 내가 다녔던 동일방직에서 1966년 조화순 목사님이 노동자로 현장체험을 하면서 동일방직과 산업선교회의 인연은 시작되었다.

이 후 산업선교회는 동일방직 노동자들을 조직하여 다양한 형태의 소그룹 활동을 지원하였다. 노동자들은 여성이 대부분인 사업장에 꼭 남자가 지부장을 해야 하는지, 또 회사와 결탁한 어용 노동조합을 나몰라라 하며 방치할 것인지 토론을 주고받으며 민주노조로 바꾸기 위한 교육과 현장조직 활성화를 위한 활동들을 하였다.

그 결과 1972년 대한민국에서 최초로 여성 지부장이 선출되었다. 동일방직 노동조합은 현장 노동자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임금인상, 보너스 인상 등의 일상적인 투쟁을 하여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노동자들의 의식개선과 단체행동으로 인한 파급효과에 두려움을 느낀 회사측과 박정희 군부독재 정권은 다양한 방법으로 탄압하였고 이에 대항하는 투쟁도 갈수록 격화되었다.

 

노동자 학교 산업선교회

나는 투쟁의 시기인 1975년 동일방직에 입사하여 일을 하던 중 고참언니들의 안내로 산업선교회를 알게 되었다. 산업선교회에는 많은 소그룹들이 있었다. 동일방직 소그룹이 가장 많았고 주변의 한국판유리와 이천전기, 인천제철에 근무하던 노동자들의 소그룹들이 있었다. 소그룹에서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실시하였다. 요리모임, 뜨개질모임, 꽂꽂이 모임, 등산모임, 성서연구모임, 노동법공부모임들이 있었다. 나는 성서연구 모임과 노동법 공부를 하면서 노동조합은 합법적인 노동자 조직임을 깨달으며 열성적인 조합원이 되었다.

현장동료들을 조직하기 위해 철 따라 사과밭, 배밭, 포도밭을 찾아가서 맛있는 과일들을 배가 터지도록 실컷 먹으며 친목을 다지는 활동을 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이천전기, 한국판유리등 남성사업장의 모임들과 합동모임을 하며 “현실에 적응하는 삶”이라는 주제로 노동자로 어떻게 살것인지 토론을 벌이기도 하였다. 이들과는 고아원을 방문하여 아이들에게 선물을 나누어 주며 노래를 들려주기도 했고, 국군장병들에게 위문방문을 가기도 하며 사회봉사활동을 하기도 했다.

정기적으로 열리는 교양강좌에서는 시사문제, 노동문제 등의 프로그램을 실시하여 한국사회속에서의 노동자의 위치를 깨닫고 노동자로서 어떻게 살 것인지 고민하고 결단하게 하였다. 당시 산업선교회는 노동자들에게 꼭 필요한 이론을 현장에서 실천할 수 있도록 용기를 주고 지지해주는 노동자 학교였다.

 

노동현장의 선교모델 산업선교회

나의 인생은 달라졌다. 주는대로 받고 시키는 대로 일하는 순종이 미덕이 아니고, 할 일을 제대로 하고 당당하게 자신의 요구를 주장하는 것이 미덕이라고 생각을 하게 되었다. 기독교 신자였던 나는 산업선교회 모임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열성적인 조합원이 되었다.

당시 계속되는 노동조합 탄압으로 동일방직 노조는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었는데, 나는 동료들과 노동조합을 지키기 위해 나체시위에도 참여하고 1978년 대의원 선거장이 똥물로 아수라장이 되는 현장에도 있었다. 이런 기막힌 일들을 고발하기 위해 똥물 먹고 못살겠다는 슬로건을 내세우고 명동성당과 산업선교회에서 무기한 단식으로 저항하였다. 노동절 행사장에서 피켓팅을 하다 끌려가서 경찰들에게 죽지 않을 정도로 폭력을 당하기도 하였다. 여의도에서 열리는 부활절연합예배에 참여하여 “똥물먹고 못살겠다” “노동3권 보장하라”고 외치다 구속이 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해고를 당하였다.

우리는 동일방직 현장출근을 시도 하고, 신문사 노총 노동청 섬유노조 본부에 가서 항의 농성을 하고 끌려나오기를 반복하는 세월을 살았다. 하지만 그 누구도 우리들의 목소리를 들어주지 않았다. 당시 박정희 정권은 한 술 더 떠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각 사업장에 배포했다. 거듭되는 해고로 우리는 해고 인생이 되었다.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기본권리인 생존권까지 철저히 박탈당한 것이다.

갈 곳이 없었던 우리들은 산업선교회 2층 강당과 지하실 방에서 삼시세끼를 해결하며 합숙생활을 하였다. 산업선교회는 우리들을 위해 모든 것을 아낌없이 제공하였다. 그로부터 지금까지 43년 세월이 지났다.

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의 이야기 중 강도 만난 사람을 구해준 사마리아인처럼 노동권과 인권을 박탈당한 우리들의 손을 잡아주며 함께 울고 웃으며 동고동락한 산업선교회를 어찌 잊을수가 있으랴.

나는 현대적인 주거시설과 환경미화를 위한 재개발은 지역주민들의 생활환경을 고려하고 지역이 가지고 있는 환경과 문화적인 특성을 살려 내는 방식의 재개발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측면에서 아픈 저항의 역사가 그대로 스며있는 산업선교회는 보존 되어야한다.

그 이유로,

첫째로 교회의 입장에서 보면 지금까지의 한국교회가 가난한 노동자에게 어떻게 선교사역을 담당 했는지 되짚어 보며 선교사명의 현주소를 확인하는 장이 되어야 하고,

두 번째로 노동운동 측면에서는 한국사회에서 노동운동의 발전과정에서 발생한 탄압과 저항의 현장을 기억하고,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 될 교훈의 현장으로 보존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정명자 동일방직 해고자
정명자 동일방직 해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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