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가 있는 골목 - 인천도시산업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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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동나무가 있는 골목 - 인천도시산업선교회
  • 강성남
  • 승인 2021.09.17 0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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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레이 기고] 강성남 / 시인

 

샐비어 마른 꽃잎 바람에 몸을 터는 밤

아버지에게서 모래가 동봉된 편지가 왔다

엄마 눈에서 굵은 모래알이 떨어지고 있었다

벽 속에선 끊임없이 모래들이 흘러내리고

뒤뜰에서 파삭파삭 종잇장 구르는 소리가 났다

벽에 벽을 달아 세운 별채 방 한 칸

한여름에도 문을 닫고 살아야 했다

길고양이가 얇게 저민 울음을 들이밀고

기타 소리가 벽을 두드렸다

집집마다 작업복 빨래가 희망처럼 나부끼는 골목

만석 부두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가면

솜을 틀어 실을 뽑고 천을 짜는 방직공장이 나왔다

골목으로 통하는 하늘색 유리문 너머

하루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사람들 발소리가 들렸다

일요일이면 엄마는 내 손을 잡고 교회에 갔다

부디 인간다운 삶을 살게 해달라는 조화순 목사님 설교

똥물 뒤집어 쓴 언니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동등한 딸이고 아들이다!

-장님이 되지 말고 눈을 떠라!

-무릎 꿇지 말고 당당하게 살아라!

-귀머거리가 되지 말고 귀를 열어라!

-벙어리로 살지 말고 말하고 살아라!

가위를 잡으면 미용사가 되고

드라이버를 잡으면 수리공이 되는 전도사님

미끄러운 눈길도, 비탈진 언덕길도 마다하지 않고

송림동 달동네를 올라 다녔다

장성한 손자들 혹처럼 달고 사는 주인할머니

눈동자 꽈리처럼 붉은 오 씨와 자주 바뀌는 안주인들

형인지 동생인지 구분 안 가는 그 집 막내아들

책을 들고 화장실을 자주 드나들었다

궁금증 유발시키는 방 여럿 숨어 있는 집

오동나무 앞 화장실엔 밑이 없었다

자갈돌 깔린 바닥엔 언제나 맑은 물이 솟구쳤다

그 집을 관통하는 물길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화장실 앞 오동나무도 쉿! 할 뿐

은밀한 기쁨 같은 그곳은 내 몽상의 무대

십자가 불빛 하나, 골목의 어둠을 쓸어내곤 했다

 

강성남 시인. 2009년 농민신문 신춘문예 등단. 2018년 제26회전태일문학상 수상
강성남 시인. 2009년 농민신문 신춘문예 등단. 2018년 제26회전태일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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