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양산 자락에 발을 딛은 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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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양산 자락에 발을 딛은 개들
  • 박병상
  • 승인 2021.10.06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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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칼럼] 박병상 / 인천도시생태·환경연구소장
계양산을 떠나지 못하는 임시보호소의 개들.
계양산을 떠나지 못하는 임시보호소의 개들.

 

계양산은 인천의 진산이다. 풍수지리에 관심 없는 시민은 계양산을 어떤 의미로 생각하는지 궁금한데, 계양산은 숱한 고통을 안고 그 자리에 위치해왔다. 북풍한설을 막아주는 진산은 그 지역에서 아버지 같은 의미의 산이다. 지역의 문화와 역사를 품은 장소지만, 결을 무시하는 개발이 풍수지리를 제거하면서 계양산을 비롯해 전국 각지의 진산은 그저 등산로 이상의 가치를 잃어가는지 모른다.

계양역에서 계양산 북사면을 따라 정상으로 오르려면 골프장으로 파헤치고 싶었던 롯데그룹의 땅을 지나야 한다. 그 땅 일부는 오랜 시간 울타리로 시민의 시선을 차단한 불법 개농장이었다. 등산객은 25년 이상 소음과 악취로 눈살 찌푸렸는데 지금 조용해졌다. 관심 있는 시민들의 헌신적 노력으로 폐쇄되었기 때문인데, 목숨 건진 덩치 큰 개의 일부는 해외로 입양되었지만 160마리 정도는 안전한 임시보호소에 남았다. 현재 자원활동가의 보호를 받으며 입양을 기다린다는데, 계양산을 떠나지 못한다.

질 낮은 사료를 먹여도 성장이 빠르도록 어설프게 육종한 농장의 개들은 극단적 근친교배로 질병을 피하지 못할 뿐 아니라 좁아터진 철망 안에서 스트레스를 받은 상태였다고 한다. 보호소는 넉넉하게 넓힌 철망을 땅바닥으로 내렸다. 철망 사이에 발이 빠져 뼈가 부러지는 사고를 면할 수 있지만, 본성처럼 대지를 뛰어다닐 수 없다. 장기간 불법을 방치하던 계양구청은 갑자기 ‘무단 형질변경’이라며 철거명령을 내린 모양이다. 개농장으로 환원하라는 의미는 아닐 테고, 진산의 면모를 되찾게 하겠다는 의지일까?

한남정맥 끝자락에서 서해안을 호령하던 계양산은 지금 초라해졌다. 계곡을 파고든 개발에 넓은 자락을 잃었고 아스팔트에 허리가 끊겼다. 주민에게 땔감을 내주며 헐벗었어도 천천히 자연의 모습을 회복해왔는데, 땅을 소유한 사람에 의해 골프장과 천박한 놀이시설로 망가질 위기에 여러 차례 몰렸다. 그때마다 깨어 있는 시민의 힘겨운 노력으로 위기에서 벗어났지만, 진산보다 이용 가치에 눈이 먼 자들의 사유지가 넓게 존재하는 만큼, 위기는 언제든지 재현될 수 있다.

지난 10월 1일 ‘계양산보전을위한한평사기운동본부’는 2차 시민행동에 돌입하기로 마음을 모았다. 2011년 발족해 300여 개인과 70여 단체의 기부로 현재까지 6,200여만 원의 기금이 모았지만, 진산을 지키기에 턱없이 모자라다. 최근 부동산 투기 열풍은 계양산도 예외로 여기지 않을지 모른다. 다시 마음을 모은 시민단체는 10년 만에 경각심을 끌어올리려 행동에 나섰는데, 호응이 얼마나 이어질지 궁금하다. 기대 이상으로 모인다면 임시보호소의 개들은 비로소 안심할 수 있을까?

추수감사절이면 미국은 백악관에서 한 마리의 칠면조를 사면하고 안전한 장소에서 여생을 보내도록 풀어준다. 칠면조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왜 한 마리만 사면할까? 그날 요리될 나머지 수백만 마리 칠면조는 매우 불결한 축사에서 비참하게 사육되어 도축되었을 것이다. 딱 한 마리를 살리는 행사를 방송 카메라 앞에서 미 대통령이 연출할 텐데, 우리 대통령은 얼마 전 우리 개고기 사육과 도살에 문제를 제기했다. 이후 선거철을 만난 정치권부터 논란이 벌어졌고 시민사회의 논란도 이어졌는데, 시민이 구한 계양산의 개들은 언제 사면될까? 사면되면 어디에서 여생을 보낼 수 있을까?

반려견 천만 시대를 맞았다. 반려하는 인천의 개는 얼마나 되고 본성을 누리며 살아갈까? 그리 긍정하기 어렵다. 싫증이 나거나 부담이 늘어나면서 반려하겠다던 개를 버리는 사람이 적지 않고, 입양할 사람이 나타나지 않으면 보호소에서 안락사되는 개도 적지 않다. 개고기 즐기는 사람이 크게 줄었다지만 찬성 의견도 만만치 않다. 개를 은밀히 사육, 도축하는 농장을 금지하기 그만큼 어려운데, 아무리 살펴봐도 개는 고기용일 수 없다. 본성이 그렇다. 인류사회에 들어와 동행하는 이유가 그렇다.

키우던 금붕어가 동작이 느려지면서 어항에서 떠오르면 마음이 아프다. 현관문을 열기 전부터 반색하며 꼬리치던 개는 마음이 통하는 생명체다. 눈이 흐려지다 배설물을 흘리며 숨을 멈출 때 가슴이 무너진다. 비단 개만이 아니다. 집안에서 반려하든, 마당에서 반려하든, 반려를 위해 입양하는 생명체에 대한 책임은 일시적일 수 없다. 그렇다면 먹으려고 키우는 가축은 어떨까? 그들도 생명체인데 효율적 돈벌이를 위해 좁은 공간에 가둬 본성을 억제하며 서둘러 살찌워 잔혹하게 도축하는 행위는 정당화될 수 있을까? 가축이든 반려하는 생명체든, 본성을 배려하지 않는 태도는 언젠가 인류사회에 부메랑이 될 수 있다.

간신히 사면된 계양산의 덩치 큰 개들은 예쁘고 작은 개를 선호하는 우리 가정에 쉽싸리 입양되지 못한다. 그렇다면 어디로 보낼 것인가? 시민 성금으로 사들인 땅이든 아니든, 계양산이 아니라면 받아들일 장소를 찾기 어렵다. 미국처럼 극히 일부의 가축을 자유롭게 보호하는 ‘생추어리 농장’을 광활하게 마련할 수 없다면, 계양산에서 견뎌야 하지 않을까? 가끔 지나는 사람이야 조금 불편하지만, 철망에 갇힌 개는 많이 불편할 게 틀림없다. 그 개들이 살아 있는 동안이라도 반려동물은 물론, 축사의 가축과 어떻게 동행해야 바람직할지 논의할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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