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왕이 거미를 사랑하게 된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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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왕이 거미를 사랑하게 된 사연
  • 최원영
  • 승인 2021.10.11 2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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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영의 책갈피] 제21화

 

 

요즘 트로트 열풍 때문인지 트로트를 자주 듣게 됩니다. 노래의 가사를 들어보면 대부분 사랑 이야기입니다. 시대와 관계없이 사랑을 노래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만큼 삶에서 사랑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기 때문은 아닐까요?

《김광석, 우리 삶의 노래》(김용석)라는 책에서 저자는 우리가 사랑 노래에 큰 관심을 보이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철학자 카뮈가 그랬다. ‘삶이란 캄캄한 어둠 속에서 끝없이 사랑이라는 성냥불을 켜대는 것’이라고. 맞다. 삶이 있는 곳이라면 사랑도 있다. 그러나 ‘어떤 사랑’인가를 묻는다면 머뭇거린다.

인생관에 따라 사랑의 관점도 달라진다. 그러나 그만큼 삶과 사랑이 엮여 있는 것 또한 재확인된다. 우리는 살면서 사랑을 많이 노래한다. 그래서 사랑 노래에 관심이 큰 것이다.”

힘겹게 살아가시는 분들에게 카뮈가 말한 것처럼 ‘삶이란 캄캄한 어둠 속에서 끝없이 사랑이라는 성냥불을 켜대는 것’이라는 말을 다시 한번 들려드리고 싶습니다.

그러니 견뎌내야만 합니다. 조금만 더 버텨내셨으면 좋겠습니다. 조금만 더 견디면 동이 틀 테니까요.

삶은 양극단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절반은 좋고 절반은 좋지 않은 모습으로 다가옵니다. 만남이 있으면 이별이 있고, 사랑이 있으면 미움도 있습니다. 기쁨이 있으면 슬픔도 있고, 분노가 있으면 용서도 있습니다. 이렇게 삶은 극과 극을 오가는 시계추처럼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삶을 이해하는데 시계추만큼 좋은 예는 없습니다. 먼저 시계추는 좌우로 끊임없이 움직입니다. 시계추가 멈춰 서면 고장 난 겁니다. 죽은 겁니다. 살아 있는 모든 생명체는 끊임없이 움직이고 변화합니다. 살아 있으니까요. 시계추가 좌우로 끊임없이 움직이는 것은 우리들의 삶에도 어김없이 적용됩니다. 저는 이것을 삶의 ‘운동성’이라고 부릅니다.

〈채근담〉에 나오는 글입니다.

“굼벵이는 몹시 더럽지만 매미로 변해 가을바람에 이슬을 마시고, 썩은 풀은 빛이 없지만 반딧불이로 변해 여름밤에 환한 빛을 낸다. 이렇게 보면 깨끗함은 늘 더러움에서 나오고, 밝음은 늘 어둠에서 생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습니다. 밝기 때문에 그림자가 생기고, 어둠이 있어서 밝음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겉으로 봐서는 상반된 모습이지만 사실은 하나에서 나온 겁니다. 같은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이지만, 남자와 여자의 모습으로 존재합니다. 남자와 여자는 결국 같은 인간입니다. 서로 다른 모습 때문에 사랑하기도 하지만 서로 다른 모습 때문에 다투기도 합니다.

기원전, 이스라엘의 제2대 왕인 다윗이 어느 날 심기가 무척 불편해졌습니다. 거미들이 줄을 쳤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거미를 증오했고, 쓸모없는 동물이라고 여겼습니다.

다윗의 거미에 대한 편견이 바뀌게 된 계기가 《위대한 굴욕》(김민조)에 나옵니다.

“전쟁터였다. 수세에 몰린 다윗은 사방에서 몰려드는 적군을 피해 숨을 곳을 찾았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이렇게 죽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 다행히 동굴이 하나 보였다. 가까이 갔다.

동굴 입구에는 거미줄이 그득했다. 거미줄이 싫었지만 어쩔 수 없이 거미줄을 피해 들어갔다.

캄캄하고 음습했다.

잠시 후, 인기척이 났다. 적이다. 잔뜩 긴장하며 숨을 죽이고 있을 때 적장의 말이 들린다.

‘거미줄이 있는 걸 보니 여기엔 없다!’

다윗은 그때 깨달았다. ‘내가 그토록 싫어하던 거미가 나를 살리다니!’”

삶이라는 큰 맥락에서 보면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 역시도 하나입니다. 상황에 따라 좋아하기도 하고 싫어하기도 할 뿐입니다.

쓸모 있다고 여긴 것이 어느 날은 쓸모없는 것이 되어버리고, 평소에 쓸모없다고 여긴 것이 어느 날은 쓸모 있는 게 되곤 합니다. 이게 삶의 정상적인 모습입니다.

쓸모있는 것이나 쓸모없다고 여긴 것이나 사실은 하나였던 겁니다. 다만 상황에 따라 둘 중의 하나로 보인 것뿐입니다. 이렇게 삶의 모습은 필요에 따라 수시로 변합니다.

《내 인생에 힘이 되어준 한마디》(정호승)에서 고통 속에서 아파하는 이를 위해 저자는 이렇게 우리를 위로해줍니다.

“인생길엔 반드시 어두운 밤이 있다. 질병이란 밤, 이별이라는 밤, 좌절이라는 밤, 가난이라는 밤 등등 인간의 수만큼 밤의 수는 많다. 그러나 우리는 그 밤을 애써 피해왔다. 가능한 내 인생에는 밤이 오지 않길 간절히 바라왔다. 그러나 밤이 오지 않으면 별이 뜨지 않는다. 별이 뜨지 않는 인생이란 죽은 인생이나 마찬가지다.”

“누구도 밤을 맞이하지 않고서는 별을 바라볼 수 없다. 그 누구도 밤을 지나지 않고서는 새벽에 다다를 수 없다. 아름다운 꽃도 밤이 없으면 아름답게 피어날 수 없다. 이른 아침에 활짝 피어난 꽃은 어두운 밤이 있었기에 아름답게 피어났다. 봄에 꽃 피우는 꽃나무도 겨울이 있었기에 피운다.”

어둠과 밝음도 사실은 하나입니다. 상대가 있어야 비로소 자신이 존재할 수 있으니까요. 그러니 어둠이 싫다고 제거해버리면 밝음 역시도 사라져버립니다. 시계추가 멈춰버린 겁니다. 죽은 겁니다.

그래서 저자는 이렇게 덧붙이고 있습니다.

“별은 밝은 대낮에도 하늘에 떠 있지만 어둠이 없기 때문에 그 별을 볼 수가 없다. 우린 오직 어두운 밤에만 그 별을 바라볼 수 있다. 검고 어두운 눈동자를 통해서만 이 세상을 바라볼 수 있듯, 밤하늘이란 어둠이 있어야만 별을 바라볼 수 있다. 고통과 시련이라는 어둠이 있어야만 내 삶의 별을 바라볼 수 있다. 비록 그것이 견딜 수 없는 고통의 밤일지라도 그 밤이 있어야 별이 뜬다. 그리고 그 별들은 따뜻하다.”

절대적으로 ‘좋은’ 것만은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절대적으로 ‘나쁜’ 것만도 없습니다. 삶은 좋은 것과 나쁜 것이 뒤섞여 있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기쁜 일이 있으면 슬픈 일도 있는 겁니다. 이렇게 하나(삶)가 둘(좋은 것, 나쁜 것)로 이뤄져 있으니 하나를 얻으면 다른 하나를 잃는 것도 자연의 이치입니다. 거꾸로 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상반된 두 개는 원래 하나였던 겁니다.

그러니 비록 지금 현실이 너무도 고통스럽다고 해도 조금만 시간이 흐르면 기쁜 일들로 채워질 겁니다. 어쩌면 이 고통과 힘겨움이 그때를 준비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혹독한 겨울을 보내야 봄꽃이 피는 것처럼요. 마치 다윗왕이 그토록 싫어했던 거미줄을 사랑하게 된 것처럼 우리가 겪는 힘겨움도 봄을 재촉하는 겨울비라는 사실을 받아들였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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