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체성 고민보다 非주체성에 대한 자각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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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성 고민보다 非주체성에 대한 자각부터
  • 장한섬
  • 승인 2021.11.05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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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영화로 읽다]
③ 파이란 : 인천바다의 탁함과 동해바다의 색조 - 장한섬 / 홍예門문화연구소 대표
파이란-포스터
파이란-포스터

 

아버지 없는 아들들의 생존기

1997년 IMF 금융위기 이후 지역공동체는 더욱 붕괴하고 파편화되고 상품화된다. 인천의 경우 지역경제의 한 축이었던 부평대우자동차는 GM에 매각되고 미국중심 글로벌스탠다드(신자유주의)에 더욱 물들게 된다. 인천시 또한 “Buy인천”과 “명품도시”를 비전으로 내세운다.

탈산업화와 금융자본의 시대는 근면과 성실로 가장의 권위를 세울 수 없는 세상을 만들자 산업화 시대를 이끈 아버지(노동자)는 도태된다. 1997년 베스트셀러 소설 『아버지』는 그 시대상을 대변한다(인천의 이혼율은 전국에서 가장 높아진다). 문제는 그 자녀들이고, 더 정확히는 산업화 도시의 자녀들이다. 그들은 산업화를 이끌며 산업전사와 산업역군으로 불린 아버지에게 공론영역에서의 의제설정 능력과 토론문화, 다시 말해 정치참여와 자기표현(말하기와 글쓰기)을 배우지 못했다. 그래서 대학진학과 주류사회에 편입하지 못한 인천과 같은 산업(공단)도시의 딸들은 처음부터 배제되고(다음 연재 [고양이를 부탁해]에서 조명), 아들들은 말과 글 대신 주먹과 돈으로 세상풍파를 헤쳐 나간다.

 

동해바다의 색조와 인천바다의 탁도

 

이강제는 파이란의 편지를 읽으며 동해바다에 도착한다
이강재는 파이란의 편지를 읽으며 동해바다에 도착한다

 

영화 [파이란] 주인공 이강재(최민식)는 군산 출신으로 인천(구도심) 삼류 깡패다. 자신의 친구이자 동기는 조직 보스가 됐지만, 이강재는 조직에서 무능력한 조직원으로 낙인 찍힌 채 후배들에게 무시당한다. 그의 꿈은 돈을 벌어 배 한 척 사서 고향에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이강재는 자신의 동기인 조직 보스에게 구타를 당한 후 술자리를 함께한다. 그러다 경쟁 조직원을 발견하여 싸움에 휘말리고, 조직 보스는 비 내리는 밤, 살인을 저지른다(영화 [북경반점]에서와 같이 [파이란]에서도 ‘비’는 부정적인 이미지다).

살인을 저지른 조직 보스는 친구 강재에게 거짓 자수를 부탁한다. 그 대가로 배 한 척을 살 수 있는 돈을 제시한다. 강재는 망설이다 수락한다. 그 후 경찰이 찾아와 부인의 사망소식을 전한다(중국에서 온 여성에게 취업할 수 있게 남편 명의만 빌려준 일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이강재는 법적으로 아내인 파이란(白蘭)의 시신을 처리하고자 동해로 향한다.

동해로 가는 기차 안에서 강재가 파이란의 편지를 읽을 때 (인천과 대조적인) 창밖 풍경은 흰 눈으로 덮인 설경과 푸른 바다로 차츰 변한다(영화 [북경반점]의 홍예문보다 [파이란]의 기차 터널이 경계이자 관계를 잇는 門으로 배치된다). 동해에 도착한 강재는 파이란의 유골을 들고 하얀 등대와 붉은 등대가 서 있는 포구에서 유언이 담긴 편지를 읽고 (이때 등대 사이로 배가 들어온다) 회한의 눈물을 흘린다. 카메라 시점은 두 등대를 비춘 후 동해의 푸른바다로 이동하다 오버랩하며 망해버린 인천백화점(동인천역)의 번잡스럽고 시끄러운 교차로를 보여준다.

 

동해바다의 푸른 색조와 대조되는 잿빛 하늘과 동인천역 (영화 [파이란] 中)
동해바다의 푸른 색조와 대조되는 잿빛 하늘과 동인천역 (영화 [파이란] 中)

 

인천, 역사성 없는 영화 속 ‘배경’으로의 장소

동인천역 대한서림 앞에는 ‘6월 민주항쟁 기념비’가 있다.

 

6월 민주항쟁 기념비

1987년 6월, 동인천역 광장에서

인천지역 노동자 학생을 비롯한 시민들이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에 저항하여 헌법 개정을 통해

국민들의 기본권 신장에 기여하였고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발전에 이바지 하였기에

이를 시민들과 함께 기억하고 기념하기 위하여

이곳에 기념비를 세운다.

2020. 12. 인천민주화운동센터

 

동인천역 주변은 인천문화의 중심지였고, 정치공론화를 이끈 광장문화가 있었다(동인천역이 민자역사—인천백화점으로 바뀌자 광장은 없어졌다). 그런데 민주화 이후 오히려 인천이 등장하는 대부분의 영화 속 인천은 역사와 문화는 소거된 채 슬럼화 된 몰골만 보여준다(그래서 인천 ‘배경’ 영화다). 이러한 관성 속에서 영화 [파이란]의 서사는 삼류 깡패와 양아치로 낙인찍힌 쓰레기 같은 인간도 타자의 관심과 사랑으로 인간다움을 찾을 수 있다는 휴머니즘을 전달하지만, 인천의 관점으로 영화를 해석하면 서울의 시각과 언어로 인천(바다)은 불결한 곳이고, 동해(바다)는 순수한 곳이라 프레임으로 재단되어 배치된다.

서울은 인천에서 동해로 가는 경유지가 아니라 인천(바다)과 동해(바다)를 정의하는 권력인 것이다. 그래서 [파이란]의 시작은 (영화 속 동해바다와 상반되는) 어둠에 젖은 인천바다를 보여준 후 밀입국하는 분위기 속에서 중국 여인 파이란은 입국심사를 받는다. 그것도 안경 쓴 남성 공무원(중앙집권의 의인화)이 말없이 무표정하게 노려본 후 여권에 스탬프를 찍어준다. 또한, 강재가 동해에서 버스를 타고 인천에 돌아왔을 때 인천터미널 대기실 텔레비전은 인천항에서 발견된 (조직 보스가 폭행 살해한 경쟁 조직폭력배) 변사체 이야기를 중앙언론사가 뉴스로 보도한다.

 

이강제가 동해에서 인천터미널에 도착하자 범죄뉴스가 나온다
이강재가 동해에서 인천터미널에 도착하자 범죄뉴스가 나온다

 

산업화 시대의 인천은 “인천 앞바다에 뜬 사이다”(서영춘 노래)로 풍자되었다면, 탈산업화 시대에는 범죄 현장 내지 범죄은닉 장소로 인천(바다)은 서울의 시각과 언어로 배치된다. [파이란] 이후로 영화 [신세계](2012)에서는 드럼통에 산 사람을 시멘트와 함께 담아 수장시키고, 영화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2019)에서는 도피처이자 살해 현장으로 북성포구가 등장한다(자세한 내용은 영화 [차이나타운]에서 다룰 예정이다).

 

인천, 정체성에 대한 고민보다 非주체성에 대한 자각 필요

사람도 그렇지만 도시 또한 주체성을 상실하면 힘 있는 타자의 시선과 언어로 정체성이 재단되고 해석된다. 그래서 정치와 교육의 자치와 분권이 중요하다. 그러나 인천은 일제의 의해 ‘강제’ 개항한 근대도시로 형성되고 갯벌 매립으로 외연은 확장했으나 도시문화는 서울중심의 자본과 권력에 의해서 분열되고 서울을 위한 납품도시로 작동한다(영화 [천하장사 마돈나]의 노동자 아버지는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으로 고립되어 폭력적으로 변해가고, 아들은 주류사회에 편입할 수 있는 상품性 있는 마돈나로 변신한다).

영화 [파이란]의 결말은 (인천의 허름한 아파트에서) 강재(최민식)가 고향으로 떠나기 전 비디오에 담긴 (동해바다에서 노래하는) 파이란(장백지)을 바라보며 조직원에게 살해당한다. 다시금 동해(바다)는 순수하고 정화의 장소(파이란은 동해에서 세탁소 일을 한다)로 배치되고, 인천은 불순하고 범죄의 현장으로 그려진다.

 

인천, 영화로 읽다 - 연재순서

① 들어가는 말 : 인천 없는 인천영화제(10/22)

② 북경반점 : 가부장을 위한 디즈니랜드(10/29)

③ 파이란 : 인천바다의 탁함과 동해바다의 색조(11/5)

④ 고양이를 부탁해 : 인천여상 소녀들의 표류기(11/12)

⑤ 슈퍼스타 감사용 : 함께 시작할 줄 아는 용기(11/19)

⑥ 천하장사 마돈나 : 프로씨름단 해체기와 노동자 아버지의 소멸(11/26)

⑦ 차이나타운 : 신자유주의 속 가족의 재편(12/3)

⑧ 인천상륙작전 : 반공주의의 (재)생산기지 인천(12/10)

⑨ 오늘도 평화로운 : 장소의 재발견과 일상의 재미(12/17)

⑩ 맺음말 : 인천, 영화롭다(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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