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로가 되어버린 화도진 화약고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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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가 되어버린 화도진 화약고 터
  • 배성수
  • 승인 2021.11.09 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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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성수가 바라보는 인천 문화유산]
(8) 화수동 다시 보기③ - 배성수 / 시립박물관 전시교육부장

 

해안을 통해 상륙하는 적을 막기 위한 요새였던 만큼 화도진에는 여러 가지 시설이 속해 있었다. 특히 화도진의 임무 중 하나가 해안을 따라 설치된 포대의 운용과 관리였기 때문에 그에 필요한 시설을 곳곳에 배치했다. 가장 중요한 시설인 포대는 만석동 묘도에서 소래포구 인근의 장도까지 모두 8개를 축조했고, 병사들의 막사에 해당하는 파수직소(把守直所)를 웃터골과 만석동에 각각 하나씩 두었다. 그밖에도 응봉산 등 높은 지대에는 바다를 정찰하던 요망대를, 해안 저지대에는 토둔(土屯)이라 불리던 참호를 설치했고, 화포에 필요한 화약을 보관하기 위해 화수동에 화약고를 두었다.

 

화도진 화약고

지금도 그렇지만 예로부터 화약은 화재와 폭발을 야기하는 인화성 물질이기에 특별히 관리해야 했다. 조선시대 화약은 염초(焰硝)라 불렀는데 무기를 관장하던 관청인 군기시(軍器寺)에서 화약제조 기술자인 염초장(焰焇匠)과 취토장(取土匠)을 각각 35명씩 두고 화약을 만들게 했다. 이들은 각 도마다 두었던 도회소에 배치되어 화약을 제조했고, 군기시는 이를 전국의 각 군영에 공급했다. 화도진에 속한 8개의 포대에는 모두 36기의 화포가 배치되어 있었다. 화약은 화포 외에 화승총에도 사용되었기 때문에 화도진에는 꽤 많은 양의 화약이 필요했을 것이다. 인화성 물질인 화약을 보관하기 위해서는 별도의 화약고를 설치해야 했고, 화약고는 관아나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두어야 했다. 화재가 발생했을 때 관아 기능이 마비되거나 마을 전체가 쑥대밭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화도진도에 그려진 화도진 화약고도 마찬가지여서 마을에서 떨어진 해안가 언덕에 위치하고 있다.

화도진의 화약고가 어디에 있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1933년에 발간된 인천부사에 “현재 신화수리 46번지에 화도진의 일부로 생각되는 건물이 남아있다”라고 기록된 것에서 이곳이 화약고 자리가 아니었을까 추정해 본다. 화도진도의 화약고 위치와 1912년 지적원도에 표시된 신화수리 46번지 주변을 비교해 보면 이 자리가 화약고 터였음이 어느 정도 확실해 보인다. 지적원도에서 46번지의 남쪽 281번지와 북쪽 1번지, 3번지의 지목이 모두 임야이고, 동남쪽에 위치한 275번지의 지목은 잡종지(雜種地)로 그 아래 ‘간석(干潟; 갯벌)’이라 표기되어 있다.

즉 화도진 화약고로 추정되는 신화수리 46번지는 산으로 둘러싸인 해안가 언덕에 위치하고 있는 셈이다. 이는 화도진도에 표시된 화약고 주변 지형과도 일치한다. 다만, 화도진도에는 화약고 주변으로 아무런 건물이 없지만, 지적원도의 46번지는 이미 대지로 둘러싸여 있다. 두 지도가 30여 년의 간격을 두고 제작되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이는데 개항기를 거치며 화수동 일대로 민가가 모여들었음을 말해 준다. 결국 인천부사에 기록된 ‘신화수리 46번지에 남아있는 화도진의 일부 건물’은 화도진의 화약고였을 가능성이 높다.

(좌)'화도진도'에 표시된 화약고(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우)1912년 지적원도에 표시된 화도진 화약고 터(푸른색)
(좌)'화도진도'에 표시된 화약고(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우)1912년 지적원도에 표시된 화도진 화약고 터(푸른색)

 

화약고에서 관왕묘로, 다시 화도교회로

1883년 인천이 개항하면서 화도진의 역할이 ‘해안 포대의 운용과 관리’에서 ‘개항장의 질서 유지’로 변했기 때문에 사실상 8개 포대는 그 기능을 상실했을 것이고, 더 이상 화약고를 유지할 필요도 없었다. 당시 화약고가 철거되고 그 자리에 민가가 들어섰을 수 있겠지만, 건물이 다른 용도로 활용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최성연 선생은 1959년 간행된 개항과 양관역정에서 이곳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조사한 바에 의하면 화수동 46번지의 이 집은 ‘관왕묘(關王廟)’이던 것을 미국 감리교회가 1907년 매수하여 화도교회를 개설하고 사용 중, 건물의 노화와 협소로 말미암아 1953년 화수동 281번지 소재 현 위치에 우선 단층 가옥 한 동을 구입하고 이전하였다가 1955년 1월 20일 당당한 벽돌 2층의 대 교회당을 신축하였다”

관왕묘는 중국의 고전소설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 등장하는 관우를 모시는 사당으로 임진왜란 때 명나라 병사들을 통해 우리나라에 전해졌다. 1882년 임오군란 당시 충주에 피신했던 명성왕후가 관우 신의 딸이라 자처했던 무녀 이성녀의 도움으로 안전하게 궁궐로 돌아올 수 있었고, 그 후 전국적으로 관우신앙이 퍼져나가 곳곳에 관왕묘가 건립되었다. 시기적으로 보면 인천 개항으로 화도진의 기능이 변화했던 때와 맞물린다. 인천에는 뱀내골(지금 시흥시 포동 일대)에 관왕묘가 건립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강화도에는 지금도 세 군데의 관왕묘가 남아있다. 최성연 선생이 말하는 화수동 관왕묘에 대한 기록은 확인되지 않지만, 기능을 상실한 화도진 화약고를 민간에서 매입하여 당시 전국적으로 유행했던 관왕묘로 활용했을 가능성도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강화읍 신문리에 위치한 동관제묘
강화읍 신문리에 위치한 동관제묘(東關帝廟)

 

신화수리 46번지가 화도진의 화약고였는지, 최성연 선생의 이야기처럼 이 자리에 관왕묘가 있었는지는 명확치 않다. 분명한 것은 1907년 이곳에서 화도교회가 설립되었다는 것이다. 화도교회 100년사에 따르면 ‘최은상이라는 신자가 관왕묘로 사용하던 건물과 부지를 내리교회에 기증하면서 화도 기도처가 되었고, 1907년 10월 그곳에서 화도교회 설립을 선포했다’고 한다. 최은상은 원래 관우 신을 모셨던 무속인으로 훗날 감리교로 개종하면서 내리교회에 신당 건물을 기증했고, 여기서 화도교회가 설립되었다는 내용이다. 화도교회 초기 건물을 보면 석축 위에 삼문이었을 것으로 보이는 정문이 위치하고, 그 안으로 다시 돌계단 위에 세 칸 규모의 본당 건물이 보인다. 건물이 언덕 위에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과 전형적인 사당의 형태를 하고 있음이 확인된다. 우연일지 모르겠지만 화도진도에 그려진 화약고도 정면 세 칸의 규모였다. 정리하자면 원래 화약고로 지어진 건물을 화도진의 기능이 변화된 후 무속인이 매입하여 관왕묘로 사용하였고, 1907년 기독교로 개종한 무속인 최은상이 건물과 부지를 내리교회에 기증하면서 그 자리에 화도교회를 설립한 것이다.

설립 초기의 화도 기도처(사진출처 : 화도교회)
설립 초기의 화도 기도처(사진출처 : 화도교회)

 

도로가 되어버린 화약고 터

화도교회는 설립 이후 그 자리에서 교세를 확장해 갔지만, 1944년 내리교회와 합병되면서 잠시 문을 닫아야 했다. 이때 화도진 화약고였던 교회 건물과 부지는 모두 매각되어 민가로 채워졌던 것으로 보인다. 광복 후 담임목사의 사택에서 다시 예배가 시작되었고, 화수동 281번지를 매입하여 1956년 벽돌조 2층 예배당을 새로 지었다. 신자 수가 늘어나면서 1976년 교회건물을 신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도로로 변해버린 화도진 화약고 터
도로로 변해버린 화도진 화약고 터

 

화도진 화약고가 들어선 이래 관왕묘, 화도교회로 사용되어 왔던 화수동 46번지는 광복 후 6.25전쟁을 거치며 민가로 빽빽이 채워졌다. 그리고 1996년 ‘동구랑 스틸랜드’까지 이어지는 ‘화수안로’가 뚫리면서 이곳에 있던 민가 건물은 대부분 도로부지에 흡수되어 철거되었다. 현재는 언덕길을 따라 서있는 낡은 주택과 빌라 건물만이 그 시절 이곳이 화도진 화약고였음을 짐작하게 한다.

 

화도진 화약고 터
화도진 화약고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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