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곁에서 살아가는 조용하고 작은 이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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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곁에서 살아가는 조용하고 작은 이웃
  • 최종규
  • 승인 2011.06.30 0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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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이 좋다] 스즈키 마모루, 《새들아, 어디 사니?》

 “새 둥지를 찾았다(鳥の巢みつけた)”라는 이름으로 일본에서 2002년에 나온 그림책이 2005년에 한국에서 《새들아, 어디 사니?》(비룡소,2005)라는 이름으로 바뀌어 옮겨집니다. 새들이 숲속에서 둥지를 틀어 지내는 삶을 가만히 바라본 멧골사람이 따스하면서 보드라운 손길로 엮은 그림책입니다.

 이 그림책을 내놓은 스즈키 마모루 님은 숲속에 지은 작은 집에서 살아간다고 합니다. 그런데, 숲속에서 살면서 ‘새 둥지’가 집 둘레 어디에나 흔하게 퍽 많이 있었으나 그동안 거의 알아보지 못하며 살았다고 합니다. 밭일을 하던 어느 날 문득 빈 새 둥지 하나를 찾아보고는, ‘아, 새가 이곳에서 살았구나. 이제는 어디에서 어떻게 살아갈까?’ 하고 궁금하게 여겼고, 이윽고 다른 새 둥지는 어디에 어떻게 있을까 찾아다녔다고 합니다.

.. 그러고 보니 집 주위에 여기저기에 빈 새 둥지가 있었어요. 새끼들이 다 자라 둥지를 떠났기 때문이에요. ‘아, 이런 곳에도 새 둥지가 있었구나. 좀더 빨리 알았으면 좋았을걸.’ 나는 아쉽기도 했지만 마음은 어느새 따뜻해졌답니다 ..  (6∼7쪽)

 숲사람 스즈키 마모루 님이 밭일을 하며 새 둥지를 알아보지 못했다면, 새마다 다 다른 곳에서 다 달리 둥지를 틀어 다 달리 한삶을 꾸리는 흐름은 아랑곳하지 않았으리라 봅니다. 숲속 작은 집에서 살아가는 숲사람이면서 정작 숲사람답게 숲새하고 동무하는 나날을 못 보냈으리라 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거의 다 도시에서 삽니다. 시골에서 산다는 이들도 읍내나 면내에서 살아가지, 시골자락에서 흙과 내와 들과 바다와 메를 낀 보금자리에서 조용히 살아가지 않습니다. 흙과 내와 들과 바다와 메를 낀 보금자리에서 살아가는 시골사람은 아주 적습니다. 더욱이, 도시에서든 여느 시골에서든 사람 삶터에 온갖 새가 함께 살아가지만, 이들 온갖 새를 ‘나와 함께 이곳에서 살아가는 이웃’으로 여기지 못합니다.

 은행 상징(까치)으로 여기며 아무 데나 풀어놓기도 했고, 평화 상징(비둘기)으로 다루며 함부로 풀어놓기도 했지만, 이들을 풀어놓은 다음 자연 터전이 어떻게 되고, 다른 새들하고는 어떻게 어우러질는지를 살피지 않았습니다. 도시에서 풀어놓은 비둘기가 어떻게 삶을 꾸리다가 어떻게 차에 치여 떡이 되고 목숨을 앗기며 먹이를 찾는지를 헤아리지 않아요. 아마, 비둘기가 둥지를 트는지 안 트는지, 둥지를 튼다면 어디에서 어떻게 트는지를 찾아보는 사람은 없지 않을까 싶습니다. 참새는 둥지를 틀지 않고 무리를 지어 서로 몸을 비비며 겨울나기를 하는데, 참새가 왜 무리를 지어 살아가는가를 곱씹는 사람이 있을까 없을까 궁금합니다. 아니, 아이들이 마음껏 뛰놀 빈터나 골목이란 하나도 남아나지 않으면서 주차장으로 바뀌는 마당에, 작은 새들 보금자리나 먹이에 눈길을 둘 사람은 없을 테지요.

.. 봄이 되자 집 주위에서 새들의 노랫소리가 들려왔어요. 새들이 둥지를 트는 계절이 돌아온 거예요. 새들은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가장 마음에 드는 자리에 가장 안전한 모양으로 둥지를 틀지요 ..  (36쪽)

 갓 태어난 둘째 아이는 밤새 똥기저귀를 내놓습니다. 옆지기는 둘째 아이한테 밤새 젖을 물리느라 고단하고, 아버지는 밤새 똥기저귀를 빠느라 고달픕니다. 그러나 둘째 아이를 보살피느라 0시·1시·2시·3시·4시·5시·6시 …… 밤부터 새벽을 거쳐 아침이 밝을 때까지 자는 둥 마는 둥 조는 채 자는 채 깬 채 얼뜬 채 지내다 보니, 때마다 어느 새가 어떻게 지저귀는지를 가만히 들을 수 있습니다.

 다만, 숱한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를 들으면서 ‘이 새는 무슨 새일까. 이 새는 또 어떤 새인가.’ 하고 생각할 뿐, 어느 새인지는 모릅니다. 그저, 똑같이 우짖는 소리를 아침이나 낮이나 저녁에도 듣는다고 떠올리면서, 새들은 새들대로 한삶을 일구니까, 밤에는 밤대로 볼일을 보며 지저귈 테고, 아침과 낮에는 또 아침과 낮대로 볼일을 보며 지저귀겠거니 여깁니다. 둘째 아이가 돌을 지나고 첫째 아이가 제법 클 무렵에는 네 식구가 숲속으로 들어가서 ‘하루 내내 우리 귀를 해맑게 간지럽히는’ 숱한 목소리를 누가 내는지 찾아볼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가만히 귀를 기울이면 같은 새라 하더라도 지저귀는 소리가 같은 적이 없습니다. 높낮이·길이·크기·느낌·맑기 모두 다른 소리입니다. 꾀꼬리이든 올빼미이든 뻐꾸기이든 딱따구리이든, 같은 소리를 들려주지 않습니다. 엊그제부터 가느다랗게 조금씩 들리는 풀벌레소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같은 풀벌레라 하더라도 똑같은 소리란 없습니다. 이제 밤에만 오글오글 복닥복닥 들리는 개구리소리도 매한가지예요. 수백 수천 개구리가 한꺼번에 울지만, 수백 수천 개구리는 다 다른 목소리로 웁니다. 이 다 다른 목소리가 한꺼번에 울리며 어슷비슷한 한 가지 소리로 들리려니 하고 여길 뿐이에요.

.. 나는 산속에 있는 조그만 집에서 살아요 ..  (2쪽)

 그림책 《새들아, 어디 사니?》를 곰곰이 되읽습니다. 아버지가 먼저 혼자서 읽고, 아이를 불러 팔베개를 한 채 누워서 다시 읽습니다. 혼자 읽을 때에는 책이 어떻게 짜이고 줄거리와 엮음새가 어떠한가를 곱새깁니다. 아이한테 그림책을 읽힐 때에는 번역글이 어떠한가를 돌아보고, 그림이 얼마나 살갑거나 올바르거나 알맞은가를 가눕니다. 혼자 읽을 때에는 미처 못 느꼈는데, 아이한테 읽히는 동안 번역글은 번역글대로 조금 엉성하고, 그림결은 그림결대로 곳곳에 잘못된 대목이 드러납니다.

 맨 첫 그림인 2∼3쪽 그림부터 엉성합니다. 2∼3쪽을 보면, 그린이가 숲속에서 나무로 집을 짓고 밭을 일구는 모습이 나오는데, 밭에서 괭이질을 하면서 괭이 잡은 손이 잘못되었으며, 괭이가 너무 짧습니다. 흙을 뒤엎을 때에 쓰는 괭이는 무척 깁니다. 무척 긴 괭이는 손잡이 끄트머리 쪽만 잡으며 땅을 폭폭 찍습니다. 손잡이 가운데나 앞쪽을 잡으며 괭이를 휘두를 수 없을 뿐더러, 이렇게 하면 힘이 많이 들고 땅을 찍지 못합니다. 괭이질을 하는 허리 모습도 잘못 그렸어요. 이어지는 4쪽 그림에서는 괭이가 아닌 곡괭이가 나옵니다. ‘응, 곡괭이로 밭을 일군다고? 이러할 수도 있지만 말이 안 되잖아?’

 곡괭이와 괭이는 길이와 크기와 모양 모두 다릅니다. 2∼3쪽 그림은 괭이 모양이지 곡괭이 모양이 아닙니다. 2∼3쪽에서 곡괭이를 그리려 했다면 날이 더 굵고 앞뒤로 삐죽하게 나와야 할 뿐 아니라, 손잡이는 더 짧아야 합니다. 더구나, 곡괭이로 땅을 찍을 때에는 이러한 손과 허리 모습이 나올 수 없습니다. 곡괭이는 날이 무척 무겁기 때문에, 머리 위로 쳐들 때에는 한손은 날 바로 밑에 힘을 뺀 쥐 살짝 쥐고 다른 한손으로 어깨죽지 께에서 단단히 붙잡습니다. 내리찍을 때에는 날 바로 밑에 힘을 뺀 채 쥔 손을 스르르 밑으로 내리며 아래쪽에서 단단히 쥔 손 위쪽으로 미끄러지듯 내려오며 만납니다. 땅을 찍을 때에는 두 손으로 손잡이 아래쪽을 쥐는 모양이 됩니다.

 그러나, 땅을 찍고 나서 스르르 곡괭이를 잡아당겨 다시 위로 올리는 모습을 그렸다고 할 수 있을 텐데, 이러한 모습이라 하더라도 그림은 잘못 그렸습니다. 곡괭이질을 해 보면 쉬 알 수 있습니다.

 7쪽 그림에서 나무를 타며 둥지를 찾는 그린이 모습이 나옵니다. 이 그림에서도 어른이 타는 나무마다 줄기와 가지가 너무 가느다랗습니다. 이토록 가느다란 줄기와 가지라면 어른이 나무타기를 할 수 없어요. 나뭇줄기나 나뭇가지가 꺾이니까요. 훨씬 두꺼워야 합니다. 27쪽 까치 그림도 까치인가 싶어 고개를 갸웃합니다. 34쪽 꾀꼬리 그림도 꾀꼬리 맞나 싶어 고개를 갸우뚱합니다.

 《새들아, 어디 사니?》는 자연 터전이나 멧새나 들새를 꼼꼼히 그려내어 보여주는 도감이 아닙니다. 살짝 엉성하게 그리든 아주 빈틈없이 그리든, 따스한 느낌이 살아나도록 보드랍게 그리면서 그린이 뜻대로 사랑스러운 손길을 나누면 됩니다. 그렇지만, 사람을 그리든 자연을 그리든 새를 그리든 둥지를 그리든, 조금 더 마음을 쏟아 그림을 그려 준다면, 훨씬 놀라우면서 아름답고 좋은 그림으로 마무리지을 수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29쪽 황새 그림에서 황새는 날개가 이보다 훨씬 더 큽니다. 32∼33쪽 까마귀 그림에서도 까마귀는 이보다 몸뚱이와 날개가 더욱 큽니다. 까마귀는 부리도 되게 커요.

 그림책 《새들아, 어디 사니?》는 ‘자연 지식’이나 ‘과학 지식’을 보여주는 책이라고 느끼지 않습니다. 일본에서 나온 책이름 “새 둥지를 찾았다”라는 말처럼, 숲속에서 살아가며 비로소 깨달은 새 둥지가 더없이 사랑스러우면서 반갑기에, 이들 새 둥지를 하나하나 사귀는 걸음걸이를 보여줍니다.

 생각해 보면, 그림을 더 예쁘게 그리려 했기에 이렇게 ‘자연 모습하고는 살짝 동떨어진’ 그림이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까마귀는 그야말로 새까만 빛깔이 아주 빛나면서 우람합니다. 꾀꼬리는 그야말로 노란 빛깔이 까만 얼룩이랑 아주 아름다이 어우러지면서 멋집니다. 까치는 흰빛과 검은빛이 예쁘게 어우러진 귀염둥이입니다(밭을 다 망가뜨리니 마냥 귀염둥이일 수만은 없지만).

 새 둥지를 찾아보며 어여쁜 ‘멧새 한삶’이나 ‘숲새 한살이’를 돌아본다면, 둥지 모양뿐 아니라, 이 둥지에 깃든 작은 목숨 또한 한결 사랑스레 바라보면서 이웃으로 어깨동무하리라 생각합니다. 그림결을 예쁘게 가다듬어도 좋지만, 조금 더 옳고 바르게 마주바라보면 좋겠어요. 나무 한 그루를 그리더라도 ‘예쁘장하다고 여기는 나무 모습’이 아니라, 참말 ‘숲에서 자라는 씩씩한 나무 모습’을 그리면 좋겠어요. 들새는 들새답게, 멧새는 멧새답게, 숲새는 숲새답게 마음껏 날갯짓을 하면서 먹이를 찾고 짝짓기를 하며 새끼를 보듬는 사랑스러운 한삶과 한살이를 나눌 수 있게끔, 그림결을 더 매만지면 좋겠습니다.

― 새들아, 어디 사니? (스즈키 마모루 글·그림,이선아 옮김,비룡소 펴냄,2005.3.3./7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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