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사랑씨에서 태어난 예쁜 목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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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사랑씨에서 태어난 예쁜 목숨
  • 최종규
  • 승인 2011.07.04 0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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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이 좋다] 무라카미 쓰토무·사토 사토루, 《커다란 나무가 갖고 싶어》

 올봄에 살구나무 두 그루를 심었습니다. 하나만 살구나무로 하고 다른 하나는 다른 나무로 심을 수 있었지만 살구나무 두 그루로 했습니다. 씨를 받아서 자라도록 한 나무는 아니고, 몇 해 자란 어린나무를 마련해서 심었습니다. 씨앗에서 싹이 트며 천천히 자라는 나무를 바라본다면 훨씬 애틋할 텐데, 사람은 그리 오래 못 살기 때문에 일 미터 즈음 자란 어린나무로 심었습니다.

 우리 나라에는 사월 오일을 두고 나무 심는 날로 삼습니다. 따로 나무를 심는 날이 달력에 적힙니다. 아무래도 이런 기림날 때문이 아니랴 싶은데, 나무는 나무를 심어야 자란다고 으레 생각합니다. 그러나, 나무는 나무에서 비롯하여 자라지 않습니다. 풀이든 나무이든 똑같이, 씨앗 하나에서 새 목숨이 비롯합니다. 풀씨에서 풀이 자라고, 나무씨에서 나무가 자라요. 곧, 모든 풀은 꽃을 피고 열매와 씨앗을 맺습니다. 모든 나무 또한 꽃을 피우며 열매와 씨앗을 맺어요.

 나라에서 기리는 날을 여느 사람 힘으로 바꿀 수 없습니다. 다만, 생각을 할 수 있고, 내 나름대로 내 살림집에서 요모조모 고치거나 새롭게 돌보면서 지낼 수 있어요. 그래서 나는 생각합니다. 꼭 사월 오일에 나무를 심어야 하지도 않습니다만, 굳이 나무를 심으면서 살아야 하지는 않다고 느껴요. 나무를 심는 사람 이야기가 널리 알려지기도 합니다만, 나로서는 나무를 심는 사람은 나무에 앞서 씨앗을 심을 수 있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곧, 나무심기보다 씨앗심기를 하고, 나무사랑에 앞서 씨앗사랑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느낍니다.

.. 엄마도 예전에 가오루만 한 꼬마 여자 아이였을 무렵, 나무에 오른 적이 있습니다 ..  (5쪽)

 사람도 씨앗 하나에서 비롯합니다. 아주 조그마한 씨앗 하나가 고운 살밭에서 씩씩하게 자라납니다. 풀이나 나무 또한 씨앗 하나에서 비롯합니다. 참으로 자그마한 씨앗 하나가 고운 흙밭에서 튼튼하게 자라납니다.

 사람은 어머니 고운 속살로 이루어진 밭에서 자라납니다. 풀과 나무는 지구별 고운 흙으로 이루어진 밭에서 자라나요.

 도시에서 살던 때에는 다 자란 나무만 바라보곤 했습니다. 그도 그럴 까닭이, 어린 씨앗이 싹이 틀 만한 빈터가 거의 없는데다가, 빈터가 있더라도 이 빈터에 뿌리를 내린 씨앗이 기쁘게 자라나기는 어렵거든요. 대여섯 해를 지나고 일고여덟 해를 지나며 열 몇 해를 지나야 여느 사람 눈으로 보기에 ‘아, 나무로구나.’ 할 만합니다. 도시에서는 열 해나 스무 해쯤 사람 손길을 타지 않을 만한 빈터가 없어요. 빈터를 놀리지 않는 도시예요. 무언가 건물을 세워야 하고, 하다못해 자동차를 세우는 자리로 쓰려고 합니다. 도시에서는 우람하게 다 자란 나무를 몇 천만 원씩 들여서 장만한 다음 땅에 박아야 해요. 시골마을 어디에선가 크게 키운 나무를 사오든, 멧자락 어디에선가 씩씩하게 살아가던 나무를 따로 파내야 합니다.

 문득, 인천에서 살던 일 하나 떠오릅니다. 우리 식구가 시골로 오던 해 봄날이었습니다.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던 날인데, 인천 도화동에 자리한 인천대학교를 송도에 새로 마련한 도심으로 옮긴다고 하면서, 도화동 옛 도심에 깃든 인천대학교 안팎에 우람하게 자라며 흐드러진 꽃을 피운 벚나무를 모조리 뽑더군요. 학교도 옮기고 벚나무도 옮긴다 했어요.

 학교를 옮기며 텅 비고 마는 건물은 버려지는 셈입니다. 어쩌면 헐어 없앨 수 있어요. 이때에 옛 건물과 함께 옛 건물을 둘러싼 오래된 나무를 싹둑 베어낼 만합니다. 도시 개발업자 눈썰미로는 우람한 나무를 파내어 옮기는 값보다 새로 사들여 박는 데에 들이는 값이 적게 들 테니까요. 어떻게 보면, 나무를 베어 없애지 않고 파내어 옮기는 일이 고맙다 여길 수 있어요.

 그렇지만, 옛 도심 대학교를 새 도심으로 옮긴다 하더라도, 옛 도심에 살던 사람이 모조리 새 도심으로 옮겨 살지 않아요. 옛 도심 사람은 그대로 옛 도심에서 살아갑니다. 옛 도심 사람들 터전에 오래오래 삶벗으로 있던 나무를 몽땅 파내어 옮기면, 옛 도심 사람들은 어떡하라는 뜻이 될까 무척 궁금했습니다.

.. 커다란 나무 꼭대기에서 가까운 곳이라, 전망대에서는 아주 멀리까지 훤히 보입니다. 바람이 살랑 불어와 가오루의 머리칼을 흩뜨립니다. 나뭇잎도 사삭사삭 소리 내고요 ..  (19쪽)

 그림책 《커다란 나무가 갖고 싶어》(논장,2003)를 아이와 읽으면서 생각합니다. 커다란 나무가 없지만 커다란 나무가 있으면 좋겠다고 꿈을 꾸는 카오루라는 아이가 마음속으로 펼치는 이야기를 담는 그림책입니다. 커다란 나무에 사다리를 받치고 영차영차 높이높이 올라가서 마을을 휘 내려다보기도 하고, 퍽 높은 자리에 오두막을 지어 이 오두막에서 빵도 굽고 살림도 꾸리며 어린 동생까지 불러 함께 지내면 참으로 좋겠다고 꿈을 꾸는 이야기를 살며시 들려줍니다.

 카오루라는 아이는 커다란 나무에 오두막을 지은 다음 우듬지까지 신나게 기어 올라가서 우듬지에 앉은 곤줄박이한테 인사를 할 뿐 아니라, 이곳에서 지내는 봄과 여름과 가을과 겨울이 얼마나 사랑스러우면서 즐거울까 하고 꿈을 꿉니다.

 참 좋겠지요. 커다란 나무에 오두막을 지어 마을을 멀리까지 바라보면서 탁 트인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으면 참 좋겠지요. 그런데 이와 같은 꿈은 어린 카오루뿐 아니라, 카오루를 낳아 함께 살아가는 어머니와 아버지도 카오루만 한 나이에 똑같이 품던 꿈이라고 합니다. 어린 날 곧잘 나무타기를 했고, 나무타기를 하며 맛보는 기쁨이 무엇인지를 아는 카오루네 어머니와 아버지는 카오루가 꿈꾸는 나무놀이를 흐뭇하게 바라봅니다. 이윽고, 카오루한테 선물 하나를 살포시 건넵니다. 카오루네 어버이가 카오루한테 건네는 선물이란 곧 ‘나무심기’입니다.

.. 다음 일요일, 아빠와 가오루는 정말로 나무를 심었습니다. 돌참나무라는 건데, 아주아주 커다랗게 자라는 나무라고 합니다. 지금은 가오루 키만 한 나무지만요 ..  (32쪽)

 어린 카오루가 심은 나무가 우람하게 자라자면 카오루가 어른으로 한참 커야 하리라 생각합니다. 아마, 어린 카오루는 어린 카오루가 심은 나무에서 못 놀는지 몰라요. 어린 카오루가 무럭무럭 자라 어른이 되어 어린 카오루만 한 아이를 낳을 무렵에야 어린 카오루가 낳은 어리디어린 아이가 이 나무를 타면서 놀 수 있으리라 봅니다. 또는 카오루가 낳은 아이가 자라 새롭게 낳은 아이 때부터 우람한 나무를 올려다보면서 놀는지 모르지요.

 생각해 봅니다.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나무는 사람처럼 기껏 백 살도 못 살다가 죽는 일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종이를 만드느니 옷장을 만드느니 무어를 만드느니 하면서 베지 않는다면, 나무는 백 살도 안 되어 죽는 일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열매를 더 빨리 더 많이 얻으려고 나뭇가지를 억지로 휘어 난쟁이 나무가 되도록 하며 열매만 주렁주렁 맺도록 들볶는다면, 이러한 열매나무는 고작 열 해밖에 못 살고 죽습니다. 그렇지만 나무가 나무다이 살면서 열매를 맺을 때에는 열 해가 아니라 백 해나 이백 해나 삼백 해나 거뜬히 살아갑니다. 오백 해쯤 살아가는 감나무에서 얻은 감알이라면, 즈믄 해쯤 살아온 능금나무에서 얻은 능금알이라면, 만 해쯤 살아낸 포도나무에서 거둔 포도알이라면 어떤 맛 어떤 느낌 어떤 기운일까 궁금합니다.

 참말 사람은 고작 백 살을 살아내지 못합니다. 나무한테 백 살 나이란 아무것 아닙니다. 사람들이 눈먼 싸움을 일으키거나 바보스러운 막개발을 하지 않는다면, 나무는 삼천 살이나 오천 살뿐 아니라 만 살이나 십만 살도 살아낼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오래오래 씩씩하게 자라던 나무숲은 때때로 벼락을 맞아 숲이 통째로 불타 사라지기도 해요. 송두리째 불타 잿더미가 된 자리에는 새로운 나무씨가 바람을 타고 하나둘 찾아듭니다. 천천히 어린 싹이 자라나며 쉰 해가 지나고 백 해가 지나면 새삼스러이 우거지는 놀라운 새 나무숲이 이루어지고요.

 시골자락 묵정밭에서 여러 해 살아낸 어린 단풍나무를 바라봅니다. 백 미터 남짓 떨어진 곳에 어른 단풍나무 몇 그루 있는데, 이 단풍나무에서 봄철에 맺힌 꽃이 지며 씨앗을 맺을 때에, 이 씨앗 가운데 하나가 이렇게 꽤 떨어진 곳까지 날아와서 뿌리를 내리고 줄기를 올렸구나 싶습니다. 이 어린 단풍나무는 너덧 해는 좋이 자란 듯한데 너덧 해는 좋이 자란 듯한 어린 단풍나무 키는 어른 무릎 높이만큼도 안 됩니다. 줄기는 야물딱지게 굵고 잎새는 어른 단풍나무하고 똑같이 생깁니다. 다만, 잎사귀 크기는 어른 단풍나무만큼은 안 돼요.

 어른 단풍나무가 자라는 둘레로도 어린 단풍나무가 몇몇 고개를 내밉니다.수만 수십만 씨앗이 맺혀 땅으로 떨어질 텐데, 이 가운데 몇몇이 용케 뿌리를 내고 줄기를 올립니다.

 버드나무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떡갈나무이든 잣나무이든 꿀밤나무이든 이와 매한가지입니다. 자그마한 씨앗 하나 흙땅에 떨어져 기운차게 뿌리를 내릴 수 있을 때에 비로소 줄기를 올립니다. 줄기를 올린 다음에는 잎을 틔웁니다. 어린나무는 아직 꽃까지 피우지 못하고, 꽃을 피우지 못하니 열매나 씨앗을 맺지 못합니다. 아직 어리니까 줄기를 굵고 단단히 올리는 데에 온힘을 쏟습니다.

 어린이 카오루는 밥하고 빨래하며 아이를 낳아 돌보는 데에는 힘을 쏟지 못하거나 곁에서 가만히 지켜보며 배웁니다. 제 몸을 씩씩하고 튼튼하게 가꾸는 데에 힘을 쏟습니다. 어린나무도 제 어린 줄기와 가지를 튼튼히 올리거나 뻗는 데에 힘을 쏟겠지요.

 작은 사랑씨 하나에서 태어나 살아가는 어린 카오루는 ‘커다란 나무 오두막 살림’을 혼자 예쁘게 꾸리는 꿈을 꿉니다. 아직 이렇게 할 수 없으나 예쁘게 꿈을 키우며 몸을 다스립니다. 작은 사랑씨 하나에서 태어나 자라나는 어린나무는, 햇볕을 듬뿍 쬐고 바람을 실컷 받으며 빗물을 잔뜩 마시는 나날을 보내면서 머잖아 커다란 나무가 되겠지요.

― 커다란 나무가 갖고 싶어 (무라카미 쓰토무 그림,사토 사토루 글,이선아 옮김,논장 펴냄,2003.8.5./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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