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누리길 따라 덕포진으로 - 격전지에 찾아든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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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누리길 따라 덕포진으로 - 격전지에 찾아든 평화
  • 허회숙 시민기자
  • 승인 2021.12.05 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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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기획]
군영의 마지막 한명까지 장렬히 목숨 바쳐 싸워 승리한 곳
덕포진과 강화해협
덕포진과 강화해협

 

김포 대명항에서 출발하여 평화누리길 1코스를 거쳐 덕포진을 찾는다.

1866년(고종3) 9월 병인양요와 1871년 4월 신미양요때 강화도에 쳐들어온 프랑스 함대와 미국 함대를 맞아 치열한 포격전, 처절한 백병전을 치루며 군영의 마지막 한명까지 장렬히 목숨 바쳐 싸워 승리한 곳.

 

철조망을 따라 조성된 평화누리길 1코스

 

덕포진은 김포시 대곶면 신안리 산 105번지에 위치해 있다. 1982년 9월 25일 사적 제 292호로 지정되었으며 전체 지정 면적은 4만8794㎡(약 5만평)이다.

 

덕포진이 설치된 연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1666년(현종 7)에 이미 강화에 예속된 진이었다.

1679년(숙종5) 강화의 광성(廣城)·덕진(德津)·용두(龍頭)의 여러 돈대와 함께 이곳에도 돈대가 축성되었다.

덕포진은 병인양요 때 프랑스 함대는 군함 7척, 대포 10문, 1,000여명의 병력을 이끌고 강화도에 상륙하여 책 1,007종, 5067권이 보관된 외규장각 문고 중 가장 값지고 아름다운 395권을 약탈해 가고 나머지는 불태워 버렸다. 

조선군은 문수산성 전투에서 패배했으나 뛰어난 전략을 가진 양헌수 장군이 강화도 정족산성에서 맹포격으로 프랑스군을 물리쳤다.

지난 2011년 프랑스는 그 때 약탈해 간 외규장각 도서 297권을 돌려주었다. 

1871년 미국은 1866년 일어난 제너럴셔먼호 사건을 빌미로 아시아 함대를 이끌고 강화도에 쳐들어왔다. 아시아 함대 사령관 로저스는 군함 5척에 대포 85문을 싣고 1,230명의 해군을 이끌고 초지진에 상륙했다. 그리고 덕진진도 점령해 버렸다. 조선군은 광성보에서 어재연 장군이 600여명의 병력을 이끌고 장렬히 싸우다 전사했다.

그런 다음 날 밤 조선군은 초지진을 습격하여 미국군을 40여일 만에 조선 땅에서 내 쫒았다. 미 함대 사령관 로저스는 이 마지막 전투를 “분명 우리가 승리한 전투였으나 아무도 다시는 회고하고 싶지 않은 너무도 처절한 전투였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어서 그는 “조선군은 백병전에서 칼을 든 오른 팔이 베어지면 왼팔로 칼을 들었고 다시 왼팔이 떨어져 나가면 덤벼들어 물더라. 그 모습은 아귀와도 같았다. 그 모습이 너무도 기괴하고 무서워 아무도 다시는 그 전투를 입에 담을 수 없었다.”고 회상하였다.

그 전투 이후 미국은 퇴각하기로 결정했다는 것이다. 두 번의 승리로 외세를 물리친 대원군은 기세가 등등해져 전국에 척화비를 세우고 더욱 쇄국정책을 공고히 하였다.

 

아침 일찍 대명항에 도착하니 주차장도 넓고, 주차비도 무료, 입장료도 없다.

평화누리길 1코스는 비록 바다 쪽이 철조망에 가로 막혀 있으나 푸른 바다를 옆으로 끼고 길게 뻗은 길이 시원스럽다. 길가에는 이미 많이 져버리긴 했으나 아직도 곳곳에 예쁜 들꽃들이 늦가을 소슬한 바람에 흔들리며 반겨준다. 철이 지나 장미는 다 지고 없으나 멋지게 만든 장미 아치 밑을 지나노라니 향긋한 장미향이 풍겨 오는듯 하다. 

  누리길 입구에는 어릴 적 동네 꼬마들이 말타기 놀이를 즐기던 모습을 만들어 놓았다, 엉덩이가 거의 벗겨진 채로 말이 되어 엎드린 꼬마 모습에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길옆에 있는 커다란 평화의 나팔에서 우렁찬 나팔 소리가 울려 퍼지는 듯하다.

멀리 바다를 감시하는 망대도 보인다.

과연 우리는 지금 평화의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일까?

아직도 바다를 통해 침투하는 간첩 등을 막기 위해 존재하는 철조망의 아픔과 슬픔이 느껴진다.

 

이 길의 끝에서부터 덕포진 산책로 1.5km가 시작된다. 숲과 바다와 포대 위의 잔디가 어우러져 아늑하기까지 한 멋진 길이다.

거기에 낙조 또한 유명하다. 덕포진 솔숲사이 바다로 떨어지는 일몰이 장관이라는 소문에 저녁 결에 맞추어 이곳을 찾는 사람도 많다.

 

덕포진에 도착하니 이곳의 주차장도 대명항 만큼 넓고, 전시실과 문화해설사실도 구비되어 있다.

이곳에서 다시 산길을 돌아 포대, 파수청, 손돌 묘를 차례로 둘러본다.

덕포진의 포대는 가, 나, 다 세 개의 포대로 이루어져 있다.

가 포대는 7개의 포대로 구성되어 있다. 가 포대는 주차장에서 10분 거리에 있고, 나 포대와 다 포대까지는 20여분이 걸린다.

     나 포대는 5개의 포대로 이루어져 있다.

     다 포대는 3개의 포대로 이루어져 있다. 

 뒤 쪽으로 파수청 터가 있다.

1980년 포대·돈대 및 파수청(把守廳)터의 발굴조사에서 1874년에 만든 포와 포탄, 조선시대의 화폐인 상평통보 및 주춧돌과 화덕 등이 출토되었다.

파수청은 유구(遺構)로 보아 포대와 돈대의 중심부에 위치하여 포를 쏘는 불씨를 보관하던 장소인 동시에 포병을 지휘하던 장대(將臺)로 추정된다.

뒤쪽으로 손돌 묘가 있다.

 

이곳은 아픈 상처를 지닌 피맺힌 장소이지만 구국의 혼은 지금도 생생히 살아있어 우리민족에게 자긍심을 심어주고 있다.

평화의 나팔소리를 마음속으로 들으며 평화누리길 1코스를 걸어 예상치도 못했던 손돌공의 진혼제도 보았다.

마지막 순간까지 장렬히 싸우다가 돌아가신 조상의 넋들이 고요히 잠들어 계신 덕포진 포대와 파수청, 손돌묘를 둘러 보고 언덕 길을 걸어 내려온다.

문득  ‘평화는 적과 대등한 힘을 갖출 때만이 누릴 수 있는 것‘이라는 진리를 다시금 깨닫는다.

다음에 좀 더 시간이 넉넉할 때 '연리지의 애틋한 사랑'으로 유명한 덕포진 교육박물관을 찾아 취재하리라 생각하며 일몰도 기다리지 못한 채 발걸음을 재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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