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에 정착하며 나누어준 손자들의 출생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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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에 정착하며 나누어준 손자들의 출생 선물
  • 허경진
  • 승인 2021.12.07 0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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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부르는 소남 윤동규]
(22) 윤동규 집안의 분재기
[인천in]은 잊혀진 인천의 실학자 소남 윤동규의 삶과 업적을 총체적으로 조명하는 특집기사를 기획해 격주로 연재합니다. 특집 기획기사는 허경진 연세대 명예교수와 송성섭 박사(동양철학)가 집필합니다. 

 

- 윤동규의 아버지가 받은 탄생 선물

문정왕후의 친정아버지 윤지임(尹之任)의 셋째아들 윤원필의 후손 윤상전(尹商銓, 1592-?)이 46세 되던 1637년에 인천에 정착하였다. 윤지임이 중종의 장인이 되어 파산부원군(坡山府院君)에 봉해지자 후손들이 지나치게 부귀해지는 것을 염려하여, “자손 10대에 이르기까지 과거시험에 응시하지 말고, 지아비는 밭을 갈고 지어미는 길쌈을 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집의(執義 종3품) 벼슬을 하던 윤상전이 선조의 유언을 지키기 위해 농장이 있는 인천으로 내려온 것이다. 인천 파평윤씨의 입향조인 집의공 묘역에는 다른 지파에서도 찾아와 참배한다.

도림동에 살던 윤상전의 아들인 충의위 윤명겸(尹鳴謙, 1618-1687)이 쉰이 넘어 손자를 보게 되자 너무 기뻐서, 갓 태어난 손자 취망(就望)에게 선물을 주었다. 재산을 나누어 주는 것이니 분재기(分財記) 성격의 문서였으며, 아들 성수(聖壽)가 아니라 조카 태수(台壽)가 증인이 되어 문서를 작성하였다.

 

재산을 나누어 준 윤명겸과 증인이 되어 문서를 작성한 윤태수 이름 밑에 착명(着名)이 보인다
재산을 나누어 준 윤명겸과 증인이 되어 문서를 작성한 윤태수 이름 밑에 착명(着名)이 보인다

 

“이 문서는 내가 쉰이 넘은 뒤에 간신히 손자를 얻어 기쁜 경사가 비할 데 없는데 달리 마음을 표시할 것이 없기에 평안도 덕천에 있는 갑진년(1664) 출생의 종 태봉이와 황해도 평산에 사는 정미년(1667) 출생의 종 부귀를 준다.”는 내용이다. 재주(財主) 조부 윤명겸이 서명하고 필집(筆執) 조카 태수가 증인이 되어 문서를 작성하였지만, “혹시라도 이에 관해 잡담을 하는 자가 있으면 이 문서를 가지고 관청에 가서 증명하라”는 단서도 달아놓았다.

첫 줄이 찢어져 문서를 작성한 날짜가 정확치 않지만, 윤취망이 1675년생이니 그 무렵에 작성하였을 것이다. 종가 문서가 아직 다 정리되지 않았지만, 인천에서 작성된 문서 가운데 가장 오래 된 분재기이다. 취망이 바로 소남 윤동규의 아버지이다. 멀리 떨어져 사는 종을 나누어 주는 것은 그곳에 있는 땅을 관리하게 하려는 것이다. 요즘 말로 하자면 윤취망은 은수저를 가지고 태어난 셈이다.

 

- 도림동에 정착한 뒤에도 윤동규가 계속 땅을 구입하다

윤동규는 용산에 살다가 인천으로 이사온 뒤에도 건륭(乾隆) 2년(1737) 2월 17일에 도남촌에 사는 최인성(崔仁性)에게서 남촌 도리산 자락 땅 여러 필지를 71냥에 사들였다. 소유주 인성의 아우 인행(仁行)이 증인이 되어 명문(明文)을 작성하고 착명하였다.

 

소남이 1737년에 도남촌 산자락 땅을 사들인 명문
소남이 1737년에 도남촌 산자락 땅을 사들인 명문

 

윤동규는 10세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으므로, 외갓집 사랑을 받으며 외롭게 자랐다. 도남촌에 땅을 구입한 이듬해에 손자 신(愼)이 태어나자, 44세에 할아버지가 된 윤동규가 1738년 정월 13일 큰며느리 연일정씨(延日鄭氏)에게 분재기(分財記)를 작성해 주었다. 교하(交河) 논 7두락(斗落 마지기) 13복(卜) 3속(束)과 함께 여종 곱단이가 낳은 두 아들, 평안도 창성에 있는 종, 서울에 있는 종 등을 큰며느리 정씨에게 선물로 준 것이다. 논만 준 것이 아니라 농사를 짓고 살림을 도와줄 종까지 미리 증여하였다. 증조부 취망이 종 2명을 출생 선물로 받은 것에 비하면, 윤신은 금수저를 가지고 태어난 셈이다.

 

「건륭 원년 정월 13일 장부(長婦) 정씨 명문」이라는 제목에서 원년은 3년의 오기이다.
분재기(1736년)_큰며느리 정씨. 「건륭 원년 정월 13일 장부(長婦) 정씨 명문」이라는 제목에서 원년은 3년의 오기이다.

 

윤동규가 큰며느리에게 교하의 논을 일곱 마지기 넘게 선물하였지만, 맏아들 광로가 1754년에 37세로 세상을 떠나자 손자 신이 장성할 때까지는 결국 윤동규가 다시 관리하였다. 윤동규가 1758년 교하 농장에 다녀와서 성호선생에게 편지를 보낸 기록이 보인다. 윤동규가 1773년에 세상을 떠나고 윤신이 상속한 뒤에 작성된 건륭39년(1774) 호구단자에 수십 명의 노비 명단이 실렸으며, 이들의 이름이 다시 보인다.

 

윤신이 상속한 뒤에 작성된 건륭 39년 호구단자에서 왼쪽이 노비들의 명단이다.
윤신이 상속한 뒤에 작성된 건륭 39년 호구단자. 왼쪽이 노비들의 명단이다.

 

조선시대 선비들은 손으로 돈을 만지는 일을 부끄럽게 여겨서, 직접 상거래를 하지 않았다. 박지원이 지은 소설 『양반전』에도 양반은 “수불집전(手不執錢)”, 즉 손으로 돈을 만지지 말고, “불문미가(不問米價)”, 쌀값이 얼마인지 묻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 나온다. 그래서 상거래 문서를 글자도 모르는 종들이 대신 하였다.

도광18년 무술(1838년) 7월에 작성된 문서는 윤생원댁 종 귀인이 인천 남촌면에 있는 욕자(欲字) 땅 하루갈이를 30냥에 파는 내용이다. 윤동규 종가에는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시기의 등기문서에 이르기까지 토지와 관련된 다양한 문서들이 남아 있어서, 올해 12월 30일 소남의 날 행사 때에 이 문서들이 모두 인천시에 기증되면 조선후기 윤동규 집안의 상거래를 통해서 인천에 살던 한 지주 집안의 경제생활을 흥미롭게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도광 18년 토지 거래문서
도광 18년 토지 거래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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