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들판 양로원 할머니한테 마실 가는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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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들판 양로원 할머니한테 마실 가는 아이
  • 최종규
  • 승인 2011.07.06 0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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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이 좋다] 안느 베스테르다인·자크 드레이선, 《우리 할머니는 나를 모릅니다》

 아이를 낳은 어버이는 아이하고 함께 살아갑니다. 아이가 무럭무럭 자라서 스스로 제금날 때까지 어버이는 아이하고 함께 살아갑니다.

 일찍부터 어버이 곁을 떠나는 아이라면 스무 살 무렵부터 따로 살아갈 테지요. 어쩌면 스물이 안 된 나이에도 따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스물을 갓 넘긴 나이부터 따로 살아갈 수 있어요.

 어느 아이는 서른을 넘고 마흔을 넘어도 어버이 곁을 안 떠날 수 있습니다. 오래오래 어버이하고 함께 살아가는 아이도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거의 모든 아이는 젊은 나이에 어버이 곁을 떠납니다. 학교를 다닌다거나 회사를 다닌다거나 사랑하는 짝꿍을 만난다거나 하면서 어버이 곁을 떠납니다. 어버이는 제 아이가 한창 빛나는 나이에 떠나 보냅니다. 어버이는 제 아이가 가장 빛나는 나이에 곁에서 지켜볼 수 없습니다. 아이는 참으로 빛나는 나이에 어버이가 아닌 제 마음에 드는 새로운 짝을 찾아 새로운 터전에서 새로운 살림을 일굽니다. 이무렵부터 어버이는 둘만 남거나 홀로 남은 채 기나긴 나날을 보냅니다. 어느 어버이라 하더라도 아이를 낳아 돌보던 나날보다 훨씬 긴 나날을 둘 또는 혼자서 보내야 합니다.

 한 해 두 해 열 해 스무 해 흐르고 보면, 어버이가 낳은 아이도 어버이가 되어 저희 아이한테 제 어버이가 했듯이 똑같이 하겠지요. 그리고, 이 아이도 어버이가 된 만큼 이 아이가 어버이가 되어 낳은 아이 또한 머잖아 스스로 살림을 꾸리겠다며 제금을 날 테고요.


.. 기차에서 엄마와 페트라는 꼭 붙어 앉았어요. 둘은 땅거미가 지는 저녁 하늘을 바라봅니다. “엄마, 이다음에 내가 아이를 낳고, 엄마가 내 이름을 기억하지 못 하면요, 내 아이도 엄마를 찾아가서 노래를 불러 줄 거예요.” 페트라가 말하자 엄마가 페트라를 감싸 안으며 덧붙입니다. “그래, 풀밭에서 함께 춤도 출 거야.” ..  (22쪽)


 어버이 되는 사람이 아이하고 함께 보내는 나날은 그리 안 길다 할 만합니다. 아이를 낳아 어린이를 거쳐 푸름이를 지나 어른이 되기까지 보내는 나날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습니다. 고되다면 고되고 빠르다면 빨라요. 즐겁다면 즐겁고 보람차다면 보람차겠지요.

 아이는 어버이가 저를 보살피는 매무새를 가만히 바라봅니다. 아이는 어버이가 저와 함께 살아가는 나날을 찬찬히 지켜봅니다. 아이는 제 어버이한테서 배웁니다. 아이는 제 어버이가 쓰는 낱말과 말투를 배웁니다. 어버이가 고우면서 착하고 참다이 말을 한다면, 아이는 고우면서 착하고 참다이 말을 합니다. 어버이가 어여쁘며 해맑고 싱그러이 살림을 꾸린다면, 아이 또한 어여쁘며 해맑고 싱그러이 살림을 꾸리는 버릇을 들입니다.

 어버이가 자가용을 몰면 아이도 자가용을 모는 어버이 매무새를 받아들입니다. 어버이가 두 다리로 걸어다니면서 버스를 타거나 자전거를 타면, 아이 또한 두 다리로 걸어다니면서 버스를 타거나 자전거를 타는 삶에 익숙합니다. 어버이가 책을 읽으면 아이도 책을 읽습니다. 어버이가 텔레비전을 보니 아이 또한 텔레비전을 봅니다. 어버이가 손으로 빨래를 하고 손수 걸레질을 한다면 아이 또한 손으로 빨래하기를 즐기고, 어버이 곁에서 걸레질을 도우려 합니다. 어버이가 흙을 일구면 아이도 흙을 일구려 하고, 어버이가 집일과 집살림 모두 여자한테만 맡긴다면 아이는 이러한 살림새를 시나브로 받아들입니다.


.. 페트라는 엄마하고 기차를 탔어요. 초원의 집에 가는 거예요. 초원의 집은 언덕 꼭대기에 있는 창문이 많은 집이에요. 여름이면 언덕 아래가 온통 꽃과 푸른 풀밭이라 그렇게 이름을 붙였다고 해요. 페트라와 엄마는 할머니를 만나러 가는 길입니다 ..  (2쪽)


 그림책 《우리 할머니는 나를 모릅니다》(웅진주니어,2006)를 읽습니다. 그림책에 나오는 할머니는 양로원에서 살아갑니다. 할머니는 홀로 살아가다가 당신 아이들이 양로원에 넣었기에 이곳에서 살아갈 테지요. 할머니는 홀로 살림을 일굴 만큼 기운이나 마음이나 몸이 버티지 못하기 때문에 양로원에 들어갔겠지요.

 양로원에 들어간 할머니는 당신 딸아이와 손녀를 알아보지 못합니다. 당신 손녀가 당신이 당신 딸(손녀한테 어머니)한테 가르쳐 준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니 비로소 살짝 제 넋이 돌아옵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제 넋이 돌아오기는 아주 살짝일 테지요. 당신 딸과 손녀가 집으로 돌아가고 양로원에 할머니만 홀로 남는다면, 할머니는 다시금 당신 넋을 잃을 테지요.


.. 페트라와 엄마는 긴 복도를 걸어갑니다. 따각, 따각, 따각, 발자국 소리가 반짝이는 복도를 지나가요. 벽에는 작은 그림들이 걸려 있어요. 온통 비누 냄새, 바닥 닦는 왁스 냄새예요 ..  (8쪽)


 그림책을 여러 차례 되읽으면서 곰곰이 생각합니다. 할머니네 아이하고 손녀는 할머니하고 함께 살아가기 어렵겠지요. 어버이한테서 제금난 아이들은 어버이하고 따로 살고 다른 삶을 꾸리며 다른 살림을 일구듯, 그림책에 나오는 할머니로서는 양로원에 들어갈밖에 없습니다. 양로원에서 조용히 죽음을 기다릴밖에 없습니다.

 죽음을 기다리면서 가끔 찾아오는 손님을 목빼며 기다려야 하는 할머니들과 할아버지들이 지내는 요양원이라는 곳은 온통 비누 냄새와 왁스 냄새라고 합니다. 죽음을 앞둔 사람들 몸에서 나는 고약하다는 냄새를 가리거나 씻으려고 비누를 바르고 왁스를 문지르겠지요. 삶이 있으면 죽음이 있고, 갓난아이나 어린이한테서는 보송보송하며 싱그러운 살빛과 살내라 한다면, 머잖아 흙으로 돌아갈 늙은 사람한테서는 퀴퀴하거나 고약한 빛과 내음이 감돈다 할 만합니다.

 그나저나 왜 양로원이어야 할는지 궁금합니다. 양로원을 지으면 할머니나 할아버지는 느긋하게 당신 삶을 마무리할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양로원을 지으면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낳은 아이들은 느긋하게 당신 삶을 꾸릴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양로원에 가끔 마실을 가면 손자나 손녀가 될 아이들은 할머니 얼굴과 할아버지 목소리를 잊지 않을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그러면 서양 나라 아닌 한국은 어떠할 때가 아름답거나 즐거울까요. 우리 나라에서도 할머니나 할아버지는 물 맑고 바람 시원한 시골마을 요양원으로 보낼 때에 기쁘게 당신 삶을 마무리할 수 있을까요.

 시골에서 살아가는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눈을 감는 마지막날까지 호미를 들고 김을 매거나 흙을 일굽니다. 도시에서 살아가는 할머니와 할아버지로서는 시멘트로 콱 막힌 곳에서 흙을 일구려고 몸을 쓸 수 없을 뿐더러, 할머니나 할아버지한테 집일이든 집살림이든 맡기는 아이(어머니나 아버지가 된 어른인 아이)는 없으리라 봅니다.

 책을 덮습니다. 내 삶과 내 어버이 삶을 곱씹습니다. 내가 내 어버이한테서 제금나며 살아온 지 꽤 되었습니다. 스무 살부터 제금나며 지냈고, 머잖아 어버이하고 떨어진 채 지낸 지 스무 해가 됩니다. 내 어버이는 당신 아이를 내보내고 스무 해를 보내며 어떤 삶과 꿈과 마음을 품었을까요. 앞으로 스무 해쯤 지나 우리 집 아이들이 제금난다면서 홀로 당차게 이 집을 박차고 나선다 한다면, 이때부터 나는 내 아이하고 어떠한 이음고리로 살아갈 수 있을까요.

 그림책에 나오는 할머니는 당신 아이를 잊을 수밖에 없는 삶을 보냈구나 싶습니다. 아마, 오늘날 수많은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당신 아이를 떠올리기 힘들 만큼 고단하면서 외로운 나날을 보내지 않으랴 싶습니다. 이 그림책에 나오는 어머니와 아이는 할머니한테 가끔가끔 찾아간다지만, 아예 낯 한 번 비추지 않거나 목소리 한 번 들려주지 않는 어버이와 아이가 꽤 많으리라 생각합니다. 어릴 적에는 늘 곁에 붙어 하루 스물네 시간을 보냈을 어버이와 아이인데, 어느 때부터 어떡하다가 서로서로 이렇게 갈리면서 살아갔을까요.

 우리들이 저마다 사랑하며 살아간다는 보금자리는 얼마나 사랑스럽거나 믿음직하거나 아름다울까 헤아려 봅니다. 사람들이 서로서로 좋아하며 아낀다는 삶터는 어느 만큼 좋으며 아낄 만해서 아리따울는지 가누어 봅니다.

 푸른 들판에 예쁘게 선 요양원은 시설로서 훌륭하다 할 만합니다. 다만, 푸른 들판은 크고작은 들꽃과 들풀이 숱하게 어우러지면서 맑으며 고운 푸른 빛깔을 이룹니다.

― 우리 할머니는 나를 모릅니다 (안느 베스테르다인 그림,자크 드레이선 글,이상희 옮김,웅진주니어 펴냄,2006.12.5./7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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