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년 장마, 종로에서' - 노래의 힘을 믿은 창작자의 회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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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년 장마, 종로에서' - 노래의 힘을 믿은 창작자의 회한
  • 이권형
  • 승인 2021.12.30 0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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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가 이권형의 인천인가요]
(5) 정태춘 박은옥의 '92년 장마, 종로에서'(1993년)
1993년 발매된, [92년 장마, 종로에서] 앨범아트
1993년 발매된, [92년 장마, 종로에서] 앨범아트

 

2016년 겨울, 광화문 광장 촛불집회에서 노래한 적이 있습니다. 그 날, 동료 싱어송라이터 ‘박영환’도 처음 봤습니다. 그 인연으로 2018년 [인천의 포크]라는 컴필레이션 음반을 함께 제작하기도 했어요. 제가 아는 박영환은 남 일에 그다지 관심을 두는 사람이 아니고, 저 역시 지금까지도 집회에 어울릴 법한 음악을 만드는 사람은 아닙니다. 그러고 보니, 그와의 첫 기억이 집회가 한창인 광화문 광장에 있다는 게 참 묘한 일입니다.

생각해보면, 그때 광화문의 분위기는 축제에 가까웠습니다. 모두가 각자의 이유로 집회에 참여했고, 각자의 방식으로 발언했습니다. 법의 경계가 흐려지고, 그 안에서 나름의 질서를 잡고 다시 흩어지는 운동의 반복. 그 안에선 무대의 조건이나 공연하는 음악의 형식도 중요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 축제의 광기가 지금의 결과로 수렴될 소용돌이였다는 걸 예상했건 못했건 말이죠.

“포크 계열 언더그라운드 싱어송라이터들에게는 흔히 음유시인이라는 별명이 붙어있는 경우가 많다. 정태춘에게도 그랬다. 그런데 이 음반을 들으면서 나는 그에게 ‘음유시인’이라는 이미 평범해진 낱말보다, 정말 세상살이를 이리저리 읊으며 노래하는 시인이란 뜻의 그럴싸한 별명을 붙여줄 수 없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는 단지 달콤하게 서정적이고 감상적이거나 차분하고 관조적이라는 의미에서 음유시인인 것이 아니라 확실히 시인다운 면모를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 얘기할 곡인 ‘정태춘 박은옥’의 <92년 장마, 종로에서>가 수록된 동명의 음반에 적힌 연극평론가 ‘이영미’의 글입니다.

<92년 장마, 종로에서>가 진행되는 5분 50초 동안의 짧지 않은 구성은 ‘할 말이 참 많았구나’라는 인상을 줍니다. 차라리, 이 곡은 흐르는 사람들 사이에 묻혀 흘러가는 “우리들의 한 시대” 위에, 노래로 남아야 했기 때문에, 구축된 것처럼 들립니다. 이 곡의 주된 정서는 하릴없이 흘러가는 역사 앞에 선 주체의 회한이라 할 수 있겠습니만, 그 회한 속에서도 노래가 지닌 힘에 대한 믿음이 없었다면 이런 곡이 만들어질 일은 없었을 겁니다. 정태춘이라는 음악가에게 “시인다운 면모”가 있다면 그건 그 믿음에서 비롯된 것 아닐까요.

2016년 촛불집회의 소용돌이는 박근혜 정권의 탄핵으로 수렴됐고, 이는 문재인 정권의 수립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지난 2021년 12월 24일 박근혜 씨의 특별사면이 결정됐습니다. 한명숙 전 총리의 복권, 이석기 씨의 석방도 함께 결정됐습니다.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 2016년 언론의 국정농단 정황 보도, 촛불 집회, 더불어 나열하자면 길어질 역사적 좌표들이 머릿속을 스쳤습니다. 역사적 사건 앞에서 우린 무엇이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어쨌든, 그런 건 별 상관없다는 듯이 올해도 여느 때처럼 성탄절을 맞이했고,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은 일상이 흘러갑니다.

흐릿한 경계들 사이에서 큰 힘을 수렴하던 여론의 광기도 사그라들었습니다. 거대한, 그래서 강 건너의 불처럼 막연해진 역사적 사건에 대해서 노래가 지닐 수 있는 힘이 얼마나 될까요. 갈수록 그 힘에 대한 믿음을 갖기 어려워지는 것 같습니다. 본래 다른 글을 작성 중이었으나, 뉴스를 접하고 본 내용으로 선회했습니다. [92년 장마, 종로에서]가 발표된 1993년 10월은, 우연히도 제가 태어난 시기와 정확히 겹칩니다. 당연히 제가 당시의 분위기를 직접 체감했을 리도 없죠. 그런데, 제가 이 곡을 들을 때의 기시감이 생생한 건 회한의 시대에도 노래의 힘을 믿고 구축한 어떤 창작자의 탁월함 때문일까요, 반복되는 역사의 굴레 때문일까요.

 

“모두 우산을 쓰고 횡단보도를 지나는 사람들

탑골공원 담장 기와도 흠씬 젖고

고가 차도에 매달린 신호등 위에 비둘기 한 마리

건너 빌딩의 웬디스 햄버거 간판을 읽고 있지

비는 내리고

장마비 구름이 서울 하늘 위에,

높은 빌딩 유리창에

신호등에 멈춰서는 시민들 우산 위에

맑은 날 손수건을 팔던 노점상 좌판 위에

그렇게 서울은 장마권에 들고

다시는

다시는 종로에서 깃발 군중을 기다리지 마라

기자들을 기다리지마라

비에 젖은 이 거리 위로 사람들이 그저 흘러간다

흐르는 것이 어디 사람뿐이냐

우리들의 한 시대도 거기 묻혀 흘러간다

워, 워....

저기 우산 속으로 사라져가는구나

입술 굳게 다물고 그렇게 흘러가는구나

비가 개이면

서쪽 하늘부터 구름이 벗어지고

파란 하늘이 열리면

저 남산 타워쯤에선 뭐든 다 보일게야

저 구로공단과 봉천동 북편 산동네 길도

아니, 삼각산과 그 아래, 또 세종로 길도

다시는

다시는 시청 광장에서 눈물을 흘리지 말자

물대포에 쓰러지지도 말자

절망으로 무너진 가슴들

이제 다시 일어서고 있구나

보라, 저 비둘기들 문득 큰 박수 소리로

후여, 깃을 치며 다시 날아 오른다 하늘 높이

빨간 신호등에 멈춰 섰는 사람들 이마 위로

무심한 눈길 활짝 열리는 여기 서울 하늘 위로

한무리 비둘기들 문득 큰 박수 소리로

후여, 깃을 치며 다시 날아오른다. 하늘 높이

훨, 훨, 훨....”

                     - 정태춘 박은옥’ <92년 장마, 종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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