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구국(오키나와)은 삼별초가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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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구국(오키나와)은 삼별초가 세웠다"
  • 이창희
  • 승인 2022.01.12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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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칼럼] 이창희 / 자유기고가
류큐 왕조의 거처였던 슈리 성 정전ⓒ 위키미디어 커먼스 | CC BY-NC-SA
류큐 왕조의 거처였던 슈리 성 정전ⓒ 위키미디어 커먼스 | CC BY-NC-SA

유구국(류큐왕국)은 현재 오키나와로 불리우고 있으며, 지금은 일본 영토로서 우리에게는 휴양지, 미군 기지로 잘 알려진 곳이다. 단 오키나와라고 하면 섬 하나만 가리키는 줄 아는 사람이 많지만, 사실 그 섬은 오키나와 본도도 소재하고 있고, 인근의 여러 섬이 오키나와 제도에 속한다. 그런데 과거에 오키나와의 영향력은 훨씬 넓었다. 지금의 오키나와 제도뿐 아니라 인접하고 있는 여러 제도를 모두 자기 영향 아래 둔 독립왕국으로, 일본과 구분되는 별개의 나라였다. 이 나라가 류큐왕국이며 우리 식으로는 유구국이라고 불렀다하지만 류큐왕국은 이제 존재하지 않는 나라다. 일본에 의해 흡수되어 지금은 오키나와현, 몇몇 섬은 가고시마현이 되었다.

 

- 11세기~15세기 류쿠왕국

원래 류큐는 3개 나라로 나뉘었다가 1429년 통일 왕국을 이루었다. 이후 여러차례 일본의 침략을 받으면서도 1854년 미국에 이어 프랑스, 네덜란드와도 수호조약을 맺었다. 조선보다 먼저 문을 열고 서구문물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하지만 1872년 일본 메이지정부에 의해 류큐번이 되었고 류큐 왕은 졸지에 일개 영주로 전락하고 말았다.

류큐왕국은 각 지역에서 부족국가 형태의 정치체제가 처음 나타난 건 11~12세기쯤부터다. 이러한 변화는 오키나와 본섬에서만 보인 게 아니고, 주변에 있는 여러 섬에서도 비슷하게 일어났다. 오키나와 본섬에서 처음 왕이라 일컫는 지배자가 나타난 건 1187년이었다. 국왕의 이름은 슌텐이라 했고, 이 왕조는 3대를 존속한 뒤 유력한 신하였던 에이소에게 양위하여 다시 새 왕조가 5대를 이어진다.

하지만 이 시기까지 오키나와에서 강력한 통일국가가 있었다고 할 수는 없었다. 슌텐 왕조, 에이소 왕조 왕들은 여러 족장을 이끄는 영도자 정도의 지위였고, 왕권은 강하지 않았다. 이 왕조들을 그저 신화시대의 전설적인 존재 정도로 보는 견해가 있을 정도이다. 왕이 있었다고 해도 왕권이 강하지 않았음은 분명하다. 그래도 14세기 초가 되면 오키나와 본도에는 대략 3개의 왕국이 상호 경쟁하면서 체계를 갖추게 된다. 중국에서는 이들을 각자가 지배하는 영역에 따라 북산왕, 중산왕, 남산왕이라고 불렀다.

이들 세 나라는 모두 조선과 명나라로부터 책봉까지 받으면서 생존을 걸고 체제경쟁을 벌였고, 그 승자는 중산왕이었다. 북산, 남산을 모두 멸망시키고 중산국이 오키나와 본도 전역을 장악한 해가 1429년이었다. 하지만 대만에서 규슈에 이르는 류큐 열도 전체를 류큐 왕국이 영유하게 된 때는 그러고도 더 뒤였다. 통일 이후 두 번째 왕조인 제2차 상씨 왕조의 3대 왕이었던 쇼 신은 지방에 거주하는 호족들을 모두 수도인 슈리에 모아 중앙집권을 강화했고, 함대를 조직하여 오키나와 주변 여러 섬을 정복하여 140여 개 섬을 지배하에 두었다. 이때가 류큐의 최전성기였다.

큐슈왕국 국기
유구국 국기

 

- 류큐왕국의 패전, 1609년

16세기 중반을 넘어가면서 류큐는 점점 내리막길을 걷는다. 일본 상인들이 류큐가 가져온 물품을 사는 대신 직접 동남아시아에 나가기 시작하고, 명나라가 해금정책을 완화하며, 서양 상인들이 아시아 내부 무역에 끼어들면서 류큐의 주력이던 중개무역이 쇠락했다. 여기서 임진왜란이 치명타를 가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류큐에 조선 원정에 사용할 군량미를 제공하라고 명령했고, 류큐에서는 명나라로부터 질책을 받으리라고 예상하면서도 일본이 침략하지 않게 하려고 요구받은 양의 일부만 일단 보냈다.

문제는 임진왜란이 끝난 뒤였다. 임진왜란으로 큰 손해를 본 사쓰마의 시마즈 씨는 류큐에서 그 손해를 메우려고 했다. 처음에는 정치적으로 위압해서 목적을 달성하려 했으나, 이제는 확실히 친명정책으로 선회한 류큐는 시마즈 씨의 요구를 거절하고 에도 막부가 성립되었음을 축하하는 사절도 보내지 않았다. 이에야스도 처음에는 류큐를 후대하여 명나라와의 관계 개선을 위한 창구로 사용할 생각이 있었지만, 류큐가 일본과의 접촉 자체를 거부하자 시마즈 씨가 승인을 요청한 대로 군사력을 동원해 류큐를 복속시키기로 한다.

160934, 오랜 전국시대와 임진왜란으로 단련된 시마즈 씨의 정예병 3천 명이 류큐 왕국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약해진 류큐에는 적을 바다에서 막을 수 있는 수군조차 없었다. 사쓰마에서 가장 가까운 아마미 제도가 먼저 함락되고, 죽 늘어서 있던 섬들은 차례로 시마즈군의 손에 들어갔다. 오랜 평화에다가, 그나마 존재하는 군사력은 반란을 막기 위해 수도가 있는 오키나와 본도에 몰려 있어서 전력은 비교도 되지 않았다.

오키나와 본도에서 숙련된 베테랑에 류큐 군사들은 갖지 못한 조총까지 보유한 일본군은 연승했다. 결국, 적이 쳐들어온 지 1달도 되지 않은 41일에 쇼 네이 국왕은 화의를 맺었다. 왕자와 정승 격인 고관들을 인질로 보내는 조건이었다.

이후 류큐는 진정한 독립국이라고 할 수 없었다. 중국에 하듯이 새 국왕이 책봉을 받는 정도가 아니라, 왕 외에 대신들까지도 취임할 때마다 시마즈 씨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서약서를 제출해야 했다사쓰마는 재번봉행이라는 관리를 상주시켜서 류큐 정부를 철저히 감시했다. 류큐는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군대와 무기도 보유할 수 없었다. 사쓰마는 류큐의 토지 면적을 따져 토지세를 부과했고, 류큐 정부가 각 섬에 인두세 형태로 할당한 이 세금 부담이 너무 커서 섬에 사는 주민들이 스스로 서로를 죽여 세금 액수를 줄일 정도였다.

그럼 왜 일본은, 사쓰마는 류큐를 정식으로 일본 영토로 병합하지 않고 독립국의 형태는 유지하게 두었을까? 그 배경에는 류큐의 조공무역이 있었다. 류큐는 조선과 마찬가지로 중국과 조공무역을 했는데, 중국에서 조공을 받는 대가로 내주는 물품들은 귀한 사치품이었다. 쇄국정책을 택해 모든 무역이 끊긴 일본으로서는 류큐가 행하는 조공무역에서 얻는 이득이 매우 중요했다. 조공무역을 계속하려면 류큐는 일본의 일부가 아니라 중국의 조공국이어야 했다. 그래서 사쓰마는 류큐가 자신들의 지배를 받는다는 사실을 청나라에 철저하게 숨겼다. 그리고 류큐가 조공무역으로 얻는 이익을 착취했다.

멸망 직전까지도 류큐에는 약간의 독립성은 남아 있었다. 어느 정도 자치권도 있었고, 외교권도 있었다. 하지만 이미 일본에 막대한 세금을 바치며 국정 전체를 통제받는 처지였다. 그랬기에 일본 정부의 결정 한 번으로 왕국에서 일개 번으로 호칭이 바뀌었고, 600명이 되지 않는 일본 군대와 경찰에 점령당해 마지막 국왕이 도쿄로 끌려갈 수 있었다. 위에서 언급했듯 류큐는 1609년에 이미 일본에 정복당했다. 그때 완전히 망해도 이상할 게 없었을 것이나 일본이 필요해서 독립국으로서의 형식을 남겨두었던 것이고, 그 필요가 다해서 남겨두었던 형식조차 없앤 것이다.

 

큐슈왕국 자연 풍광
유규국(큐슈왕국) 자연 풍광

 

- 삼별초의 항몽투쟁, 진도에서 제주도로

대제국 몽고의 말발굽이 고려를 짓밟던 13세기 최후까지 대몽항쟁을 벌였던 군사집단이 삼별초였다. 최씨 정권의 사병이었던 삼별초는 왕실이 강화도에서 개경으로 돌아간 해인 1270(원종 11) 승화후 왕온을 새 임금으로 추대하고 배중손의 지휘 아래 항거를 시작했다.

삼별초는 12715월 여몽 연합군의 공격으로 근거지였던 진도가 함락되자 김통정을 중심으로 제주도로 옮겨 갔고 여기서 지금의 경기도 부천까지 공격하며 사투를 벌였다. 12734, 전선 160척에 탄 연합군이 압도적인 군사력으로 제주도를 맹공했다. 김통정은 자결하고 남은 1300명은 포로가 됐다. 지금까지의 역사는 거기서 이들이 멸망했다고 보고 있다.

제주도 애월읍 고성리에 있는 항파두리 항몽유적지는 일찍이 몽고의 침략을 받아 조국을 지키려고 궐기한 삼별초가 최후까지 항전하다가 순의한 유서깊은 곳이다. 지방기념물 제 29호 지정 보호되고 있다.1231년 부터 30여년 동안 몽고는 일곱차례에 걸쳐 고려를 침범하였고 이로 말미암아 우리 국토는 초토화되고 소중한 문화유산들이 파괴, 소실되는 등 역사상 보기드문 전쟁의 참화를 입어야 했다.

고려 원종 112(1270), 원과의 굴욕적인 강화를 맺고 개경으로 환도한다. 그러나 이 개경 정부에 반대하여 일어선 삼별초는 항전 끝에 김통정을 총수로 제주에 입성, 12734월 전멸당하기까지 이 항파두리 토성을 근거지로 항몽투쟁을 전개했었다.

큐슈왕국에서 출토되는 고려시대 기와 문양
유구국(큐슈왕국)에서 출토되는 고려시대 기와 문양(국립제주박물관 특별전에서)

 

- "1273년 삼별초, 제주도에서 오키나와로..."

삼별초가 제주도에서 전멸한 것으로 오랫동안 알려졌다. 1273년 여몽연합군이 제주도를 침략해 항파두성을 함락했고 이 때 삼별초들이 모두 사망했다고 알려졌다. 그런데 이게 사실이 아닐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발견이 일본 오키나와에서 이뤄졌다.

2007년 여름, 국립제주박물관은 탐라와 유구왕국이라는 주제로 특별전을 개최했다. 당시 제주박물관은 오키나와에서 발견된 계유년고려장인와장조라는 이름의 기와는 유구왕국 성립 직전에 고려인이 건너가 제작한 것으로, 이 시기 고려와 유구의 관계를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라고 소개했다.

유구국에는 모든 건물들이 우리나라 기와문양을 사용하였다. 이는 계유년고려장인와장조란 계유년에 고려의 기와 장인이 만들었다는 뜻이다. 이 기와는 오키나와 우라소에성과 슈리성 등지에서 다수 출토됐다.

오키나와 슈리성은 삼별초들이 세운 성으로 볼 수 있다그 전에는 류큐 왕국이 없었다그냥 조그마한 어촌 마을이었다.

현 오키나와는 일본의 남쪽 끝에 위치한 섬이다. 면적은 제주도보다 조금 작다. 오키나와에는 15세기에서 19세기까지 450여 년간 류큐국이라는 나라가 있었다. 그 전에는 어떤 왕조의 조짐도 없이 갑작스럽게 통치체제를 갖춘 국가로 출현하는 바람에 많은 역사학자가 그 출현 배경에 관심을 보였다. 이런 상황에서 고려의 유물이 나왔다는 점은 류큐국과 고려의 관계에 많은 상상력을 불어넣었다.

계유년고려장인와장조의 계유년은 구체적 연도를 추측하는 데 아주 중요한 단서이다. 학자들은 이 계유년을 고려 역사 500년 중 계유년이었던 1273, 1333, 1393년 가운데 하나로 추측하고 있다.

먼저 1273년은 삼별초가 제주도에서 패망한 해이다. 당시 삼별초에게는 선택지가 두 가지밖에 없었을 것이다. 죽거나 여몽연합군에 잡히거나. 그러나 한 가지 가능성이 더 있었다. 제주도를 떠나 다른 곳으로 피란하는 길.

개경에서 보낸 군대는 12715월 진도 용장성을 함락하고 남녀 1만여 명을 붙잡아 포로로 이송했다. 그런데 1273년 제주도가 함락될 때 포로로 잡혀 개경으로 이송된 삼별초군은 1300여 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제주도 삼별초군 일부가 오키나와로 망명한 것은 아닐까 하는 추측이 가능해진다.

'고려 기와'는 우라소에성과 슈리성 등 여러 곳에서 출토돼 오래 전부터 알려졌던 유물이지만 국내에선 그다지 큰 관심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일본 학계에선 대체로 기와의 '계유년'이 조선 개국 직후인 1393년이라고 봐 왔다. '고려사'에서 처음으로 고려와 유구국 사이의 교섭 기록이 등장하는 것은 유구국 중산왕 찰도가 사신을 파견한 1389년이기 때문이다.

 

- "기와를 만든 세력, 삼별초가 유력"

그런데 윤용혁 교수는 발표문을 통해 "계유년은 1273년 이외의 다른 해가 되기 어렵고 그 기와를 만든 세력은 삼별초가 유력하다"는 견해를 밝혔다. 1389년이라면 고려 장인이 원나라나 명나라의 연호를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기와에는 간지(干支·십간과 십이지)만을 기록했는데, 삼별초는 외교문서에서 간지만으로 연대를 표시했다는 것이다. 1392년의 조선 건국은 소수 정치 집단에 의한 쿠데타의 성격이 강했으므로 기술자 집단이 해외로 이주하는 상황이 벌어질 여건도 아니었다,

오키나와는 일본 류큐제도 남부에 있으며, 오키나와 현에서 가장 크고 중심이 되는 섬이다. 길이 108km, 너비 3~26km로 남서쪽으로 길게 뻗은 화산섬이다. 북부는 산과 밀림으로 이뤄져있고, 남부는 구릉 지대로 바위가 많다. 주민들은 대부분 남부에 거주한다. 남서부에는 현청 소재지인 나하가 있다.

오카나와의 옛 이름은 류큐다. 류큐 왕국은 1879년에 일본의 식민지가 되면서 오키나와 현으로 병합됐다.

오키나와는 조선인 표류 기록에도 자주 등장한다. ‘1802118일 흑산도 해역에서 조난한 문순득이 10여 일 만인 29일 오키나와에 표착해 목숨을 건졌다는 기록이 있으며, ‘177012월 제주 해역에서 조난한 장한철이 3일 만인 28일에 오키나와 열도 외곽의 섬에 표착했다는 기록도 있다.

오키나와는 제주도에서 해류만 타고 이동해도 며칠이면 닿을 수 있을 만큼 가까운 섬이었다.제주도 남쪽으로 700~800떨어졌으며 훗날 홍길동이 건너가 세웠다는 '율도국'이 바로 거기였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오키나와 류큐왕국은 고려의 삼별초들이 세운 나라가 분명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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