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에서 인천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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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에서 인천 생각
  • 조정은
  • 승인 2022.01.21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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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에서] 조정은 / 뉴욕 거주 인천인

아침에 기차를 타고 맨해튼으로 출근하는 길. 출근길은 누구에게나 그렇듯 여유롭지만은 않다. 닫히려는 열차 문 사이로 용감하게 뛰어드는 일을 마다하지 않는 건 뉴욕 웨체스터(Westchester) 기차역에서도 흔하게 볼 수 있다. 거리두기를 실천하고자 다른 승객들과 최대한 멀리 앉아 영어책을 펼치고 오늘도 한 문장이라도 남의 언어를 습득해보려고 노력해 보지만, 이른 아침의 피곤함은 떨칠 수가 없다. 팬데믹으로 재택근무가 많아서 그런지 가끔 가는 이 길이 익숙하지 않아 더 불편하게 느껴지는 것 같다.

뉴욕 맨해튼 그랜드 센트럴 역
뉴욕 맨해튼 그랜드센트럴역

기차를 타고 창밖을 보면서 요즘 유행하는 멍을 때려보며 내 기억에 영원히 잊지 못하는 기차가 줬던 세 가지 예쁜 기억을 떠올려본다. 심신이 지치지 않으려면 소중히 접어 반질반질한 상자에 보관하고 있던 추억을 꺼내보는 것도 좋은 일이다. 첫 번째는 남편 중국 유학시절, 유학생활을 마치고 했던 여행길에서 중국 꾸이린시에서 광저우로 가며 탔던 밤샘 기차다. 처음에 표를 잘못 끊어서 서로 다른 칸에 타서 15시간을 이동해야 했었는데 운 좋게 남편과 같은 기차 칸의 중국 아저씨에게 손과 발로 부탁해서 자리를 바꿔 같이 밤새 같은 칸에서 지낼 수 있었다. 비가 오고 안개가 꼈던 창밖의 꾸이린 산수의 아름다움은 종종 이렇게 삭막한 뉴욕 메트로폴리탄 기차 안에서 떠올리며 명상도 할 수 있게 해준다.

두 번째는 중학교 때 성당 친구들과 갔던 정동진행 기차다. 기차 안에서 다른 승객들에게 야단을 맞을 정도로 시끄럽게 떠들고 게임을 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이제 생각해보면 그 때의 승객들께 참으로 죄송하다. 당시 테이프 레코더에 우리의 합창도 녹음하고 오랫동안 보관하며 갖고 있었는데 이제는 다 어디 있을까.

세 번째는 초등학생 때 탔던 마지막 수인선 협궤열차. 아버지가 어느 날 신문에서 보시고 수인선 두량짜리 협궤열차 운행이 곧 중단된다며 소래역에서 수원까지 열차를 타보자고 하셨다. 일제 강점기 때 물자 수탈의 상징이었고 다른 교통수단의 발달로 점차 승객이 사라져가던 그 요망한 두 칸짜리 열차를 그때까지만 해도 지나가는 것을 보기만 했지 타본 적은 없었다. 그래서 어느 일요일 아버지와 함께 열차를 타러갔다. 열차는 좁았고 좌우로 많이 흔들렸다. 같이 탄 사람들은 주로 소래 어시장에서 물건을 사서 가는 상인들이나 노인들이었고 우리처럼 관광 목적으로 기차를 탄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들떠있는 내 모습과는 달리 같이 탄 분들의 표정은 모두 비장해 보였다. 작은 열차 안에서 내 어린 목소리가 울려 퍼지지 않게 조심하며 아빠와의 짧은 여행에 대한 기대와 들뜬 마음을 내리 눌렀던 기억이 있다. 아슬아슬한 마음으로 아버지 손을 꼭 붙잡고 건너곤 했던 소래철교 위를 건널 때는 넓게 펼쳐진 갯벌을 비로서야 감상할 수 있었다. 천천히 느리게 가는 열차 안에서 그 어린 나이에도 곧 사라질 것에 대한 아쉬움을 느끼며 수원까지 목적 없이 그렇게 갔다가 다시 소래로 왔다. 소래에 다시 도착했을 때는 이미 어둑한 저녁이었는데 왠지 모를 후련한 마음이 들었다.

수인선 협궤열차가 다니던 소래철교(최용백 작)
수인선 협궤열차가 다니던 소래철교(최용백 작)

다시는 못 볼 것 같지만 이별은 충분히 한 것 같은 그런 기분에 언젠가 한 번 협궤열차처럼 오래된 열차는 뉴욕에 없는지 찾아본 적이 있다. 오랜 화물열차 선로는 빌딩 사이 고가공원으로 탈바꿈 된 하이라인, 오래된 기차는 전시되어 있는 뉴욕 트랜짓 뮤지엄 방문, 소래철교를 두 발로 건너며 느꼈던 아찔함은 부르클린 브릿지 2층 도보를 통해 약간의 추억을 소환할 수 있었다. 특히 하이라인은 오래된 선로를 영원히 도시의 휴식과 함께 할 수 있게 만들어준 선물 같았고 선로의 잔해가 군데군데 조금씩 보여, 걷는 내내 나만의 인천에서의 어린 시절의 추억이 불쑥불쑥 솟아올라 아련한 마음이 되기도 했다.

나는 인천에서 태어나 인천에서 학창시절을 보내고 대학교는 서울로 다녔다. 서울로 진학 한 인천의 학생들은 다들 당연하다는 듯 매일 두세 시간씩 경인선 열차를 타고 통학했고 시험기간에는 시간을 아끼느라 기차 안에서 공부를 했다. 지금 뉴욕의 교외지역인 웨체스터에서 미드타운으로의 통근은 40분 정도만 기차를 타면 되니 그 시절 이미 갖춘 근력으로 사실 어렵지 않다. 하지만 지금 내가 이렇게 피곤한 이유는 단지 내가 내 고향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오래 살고 있어 그런 게 아닌가 싶다. 뉴욕에 살면서 인천을 생각하고 있다면 누가 공감해 줄지 모르겠지만 오늘은 협궤열차를, 반짝였던 갯벌을, 그 날에 배웠던 아쉬움과 허전함을 생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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