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잊은 사람들 삶을 다큐사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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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잊은 사람들 삶을 다큐사진으로
  • 최종규
  • 승인 2011.07.12 05: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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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 읽는 사진책] 노순택, 《RED HOUSE》

 다큐사진을 찍는 노순택 님은 《RED HOUSE》(청어람미디어,2007)라는 사진책 머리말에서 “북한을 바라보는 어떤 시선도, (그것이 내부에서 비롯된 것이건, 외부에서 비롯된 것이건) 밀도 있는 작업이 되기 어렵다는 것을, 나는 타인의 작업들을 바라보면서, 또 내 작업을 검토하면서 알게 되었다(10쪽).”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북녘 이야기와 삶을 사진으로 담든, 남녘 사람들과 사랑을 사진으로 싣든, 깊이 있게 사진말을 나누기란 몹시 어렵습니다. 어느 사진감을 고르든 똑같습니다. 어느 일을 하든 매한가지입니다. 쉬운 일이란 없고, 쉬운 사진이란 없으며, 쉬운 파헤치기나 사귀기란 없습니다.

 사진책 《RED HOUSE》 머리말에는 “사진이 보여줄 수 있는 것은 ‘겉’뿐이다(9쪽)”라는 이야기도 한 줄 적힙니다. 어느 모로 본다면, 사진은 겉을 찍고 겉만 나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모로 본다면, 사진은 속을 찍고 속만 나눌 수 있어요. 겉과 속을 함께 찍을 수 있으며, 겉과 속을 하나도 못 찍을 수 있어요. 스스로 겉을 찍으려 하면 겉을 찍습니다. 스스로 속을 찍으려 할 때에는 속을 찍어요. 사람을 사귈 때에도 겉치레로 사귄다면 겉훑기로 그칩니다. 사람을 마주하며 속사랑을 나누려 한다면 속사랑을 이루어요.

 사진이기 때문에 눈으로 보는 모습만 찍지 않습니다. 글이기 때문에 눈으로 볼 수 없는 모습까지 담지 않습니다. 그림은, 춤은, 노래는, 영화는, 연극은 어떠하다고 할까 돌아볼 노릇입니다. 어떠한 길을 걷든, 내가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따라 무엇을 담아내고 무엇을 보여주며 무엇을 나누는가는 사뭇 달라집니다.

  사진책 《RED HOUSE》를 들여다봅니다. 세 갈래로 나누어 사진을 싣고 보여줍니다. ‘펼쳐들다’와 ‘스며들다’와 ‘말려들다’로 나눈 《RED HOUSE》입니다. 펼쳐들다에서는 “질서의 이면”을 말한다 하고, 스며들다에서는 “배타와 흡인”을 말한다 하며, 말려들다에서는 “전복된 자기모순”을 말한다 합니다.

 사진을 넘기면서 세 갈래 이야기 펼쳐들다와 스며들다와 말려들다가 이러할 수 있겠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입니다. 그리고, 세 갈래 이야기란 따로 떨어뜨린 셋이 아니라 한몸이고, 세 갈래 이야기는 북녘사람 삶이나 남녘사람 삶이 세 갈래라는 뜻이 될 수 있지만, 북녘과 남녘을 바라보는 사진쟁이 삶이 세 갈래라는 뜻이 되기도 합니다.

 노순택 님은 ‘종이쪽 놀이(카드섹션)’를 하는 북녘사람들을 바라보며 ‘질서 뒤에 가려진 모습을 펼쳐든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종이쪽 놀이를 펼치는 10만 어린이와 어른들 움직임을 질서라 일컬을 만한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런 종이쪽 놀이란 질서라 일컬을 수 없을 텐데요. 질서가 아닌 권위이고 권력이며 군국주의라고 느낍니다. 질서일 수 없는 슬픔과 바보짓과 아픔이라고 느낍니다. 질서하고는 동떨어진 눈물이며 생채기인데다가 용두질이구나 싶습니다. 깊이를 따지면, 종이쪽 놀이를 하는 사람은 북녘사람만이 아닙니다. 남녘에서도 똑같이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다른 모습으로 똑같이 벌이는 일입니다. 북녘이나 남녘이나 틀에 박힌 초·중·고등학교 교육입니다. 북녘 군대나 남녘 군대나 틀에 박힙니다. 서로서로 평화를 지키려는 군대가 아니라 평화를 밟고 서로를 더 잘 죽이려는 ‘사람 죽이는 재주’를 길들이는 군대예요. 이는 사진책 《RED HOUSE》 셋째 갈래인 말려들다를 넘기면 숱하게 나오는 ‘군인옷 입은 어르신’ 얼굴을 보면 쉬 어림할 수 있습니다. 무시무시한 모습으로 그렸다는 김일성 얼굴보다 이 ‘김일성 그림을 들거나 불사르는 군인옷 입은 남녘 남자 어르신들 얼굴’이 훨씬 무시무시하구나 싶어요.

 그나저나, 노순택 님은 왜 “붉은 틀”이라는 이름을 붙인 사진책 《RED HOUSE》를 내놓았는지 아리송합니다. 북녘 사회가 붉은 틀을 보여주기에 《RED HOUSE》를 찍었다 할 테지만, 정치권력자가 보여주는 붉은 틀이 북녘사람들 삶자락은 아니거든요. 붉은 틀에 가둔다 하더라도 사람들이 붉게 물들지는 않거든요. 아니, 붉은 틀에 오래오래 가둔 끝에 시나브로 붉게 물들었다지만, 어느 사람이든 붉은 피가 흐르지만 붉은 사람 아닌 흙빛 사람이에요. 흙에서 태어나서 흙으로 돌아가는 흙빛 사람입니다. 입시지옥에 얽매인 채 시험점수만 외워야 하는 남녘 어린이와 푸름이는 참으로 슬프며 불쌍한데, 북녘 어린이와 푸름이는 또 북녘 어린이와 푸름이대로 참으로 슬프며 불쌍해요. 서로서로 ‘더 낫지’ 않고 ‘더 나쁘지’ 않아요. 둘 모두 아름다움하고는 사뭇 동떨어진 채 숨을 잇습니다.

 정치권력을 쥔 사람이든 정치권력을 쥔 사람한테 눌리는 사람이든 갓난쟁이로 태어나서 늙은이로 죽습니다. 제아무리 오래 살더라도 백 살을 튼튼히 살지 못합니다. 제아무리 돈과 힘과 이름을 거머쥐었더라도 갓난쟁이일 때에는 똥오줌을 못 가립니다. 붉은 틀이란 아직 철모르는 사람들 바보스러운 짓이에요. 철모르는 사람들 바보스러운 짓을 사진으로든 그림으로든 글로든 담아서 나눈다 할 때에는, 조금도 아름답지 못한 이야기만 얻고야 맙니다. 다큐사진이란 아름답지 못한 이야기를 구태여 파헤치거나 들여다보는 일이어야 할는지 궁금합니다.

 다큐사진은 사랑사진입니다. 사람을 사랑하는 삶을 담는 사진이 곧 다큐사진입니다. 그래서 사진책 《RED HOUSE》를 넘기는 내내 노순택 님이 북녘사람과 남녘사람을 바라보며 어떠한 사랑을 무슨 빛깔로 어떤 손길로 담아서 나누려 하는가를 곰곰이 되씹습니다. “우리는 행복해요”를 까망하양 사진으로 보여주는데, “우리는 행복해요”를 무지개 빛깔로 보여주었다면 어떠한 느낌과 이야기가 되었을까 헤아려 봅니다. 아침나절에, 새벽나절에, 낮나절에, 저녁나절에, 햇살이 살포시 내려앉으며 뭇 꽃과 풀이 어여삐 어우러진 학교 문가와 둘레를 살펴본다면, 또 창문턱을 가만히 ‘깊게’ 들여다본다면 어떤 이야기가 샘솟을까 가누어 봅니다.

 사진기를 든 북쪽 경비원 몸짓 말고, 사진기를 든 북쪽 경비원 손가락과 손등과 손바닥을 사진으로 담아 본다면, 구두코와 발가락을 사진으로 담아 본다면, 옷깃과 지갑을 사진으로 담아 본다면, ‘붉은 틀’에 꽁꽁 싸매 두었다지만, 이곳저곳에 조용히 스며들어 선보이는 ‘사람내음’과 ‘사랑내음’을 곱게 어루만지듯 감싼다면, 무시무시한 주먹을 휘두르면서 서울 광화문 큰거리에서 목소리 높이는 어르신들 흰머리를 더 깊이 들여다본다면, 사진책 《RED HOUSE》에는 어떠한 이야기가 새삼스레 깃들는지 궁금합니다.

 더 사랑해 주셔요. 더 깊이 사랑해 주셔요. 더 따스한 손길로 더 깊이 사랑해 주셔요. 더 오래오래 내 고운 이웃으로 여겨 더 따스한 손길로 더 깊이 사랑해 주셔요.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다큐사진을 찍을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삶으로 내 하루하루를 흐뭇하게 웃고 떠들며 즐기지 않을 때에는 다큐사진하고 멀어집니다. 누군가를 붉은 틀이라고 이름붙일 때에는, 이 이름을 붙이는 사람부터 붉은 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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