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미읍성과 해미성지를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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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미읍성과 해미성지를 가다
  • 석의준 시민기자
  • 승인 2022.01.25 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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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기획]
눈 오는 날 떠난 역사기행

오후에 눈이 온다는 예보가 있음에도 해미로 향했다

역사적 내용을 많이 품고 있음에도, 당일 여행으로 거리가 짧지 않아 쉬 갈 수 없었던 곳이다.

해미는 지형적 면에서 보면 서산시에 속하며, 조선 초 해안지방에 출몰하는 왜구를 막기 위해 1407년(태종7) 정해현(貞海縣)과 여미현(餘美縣)을 합쳐 부르게 된 지명이다.

해미는 크게 두 개의 역사적 문화유산을 갖고 있다. 해미읍성과 해미성지다.

해미읍성은 단순 행정기능으로의 읍성(邑城)이 아닌, 조선 전기 충청병마절도사의 병영성(兵營城)이다. 충청병영은 원래 덕산에 있었으나, 왜구를 효과적으로 방어하기 위해 해안과 가까운 해미로 옮겨 1417년(태종17)부터 1421년(세종3) 사이에 축성되었으며, 이후 청주로 재 이전되기까지 230년간 충청지역의 군사권을 행사하던 귀중한 성이다.

이전된 후에도 서해안을 방어하는 중요한 지역이었기에 충청 5진영 중 하나인 호서좌영(湖西左營)을 두었으며, 해미현(海美縣)을 병영 안으로 옮겨 현감(縣監)과 영장(營將)을 겸하게 하는 겸영장제(兼營將制)를 실시하여 1914년까지 유지를 했다.

해미읍성의 귀중한 역사적 사실 중, 첫째 이순신 장군이 근무를 했다는 기록이다.

1576년 (선조9)에 무과에 급제를 하고, 세 번째 관직으로 1579년 충청병마절도사의 군관으로 부임하여 10개월을 근무하였다.

둘째로는 1790년부터 시작된 천주교 박해가 이 지역에서 극심하였으며, 이때 해미읍성은 호서좌영으로써 내포지방 13개 군현의 군사권을 쥐고 있으면서, 충청지역 천주교 신자들을 잡아들여 처형하는 주요 장소였다.

인천에서 우리가 먼저 도착한 곳은 해미성지다.

성지는 해미읍성에서 서쪽으로 700여m 떨어진 여숫골이라는 곳에 위치해 있다.

주차장에서 바로 정문에 들어서면 본당과 망루, 기념관이 있고, 그 넘어 십자가의 길 등 여러 사적지를 관람할 수 있으며, 월요일인데도 미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기념관은 천주교 박해의 현장을 생생히 보는 것 같았다. 발굴에서 나온 뼛조각, 처형 상황을 그린 조각상에서 깊은 슬픔을 맛보았다. 여숫골은 병인박해가 시작될 때 해미읍성의 서쪽 나무가 우거진 ‘숲정이’라 불렀던 곳으로, 천주교 신자들의 생매장 터였다.

생매장 터로 가는 길에는 큰 개울을 만나는데 개울 위에 외나무다리가 있고, 그 밑에는 물길이 패인 둠벙도 있었다. 두 팔을 뒤로 묶어 끌려오는 천주교 신자들을 외나무다리 위에서 둠벙에 밀어 넣어 죽이기도 했다. 그래서 이곳을 ‘진둠벙‘이라 불리어진다.

이어 우리는 ’피의 제사장‘이라는 ’자리개돌‘도 보았다. 읍성의 서문 밖 순교지에서는 군문효수, 배지사형, 교수형, 동사형, 자리게질 등 갖가지 방법으로 신자들을 처형했는데, 그중 특별히 잔인한 방법이 자리개질(태질) 처형이다. 돌다리위에 묶인 순교자를 군졸들이 들어 올려 머리와 가슴을 어스러지게 하는 처형방법이다. 지금도 그 돌이 처연하게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해미성지는 2014년 교황 프란시스코에 의해 윤지충 바오로와 함께 시복이 됐으며, 지난달 15일 이곳 해미성지를 국제성지로 인정하는 교령(교황청의 공식 결정문서)이 전달됐다. '천주교 서울 순례길’ 이 국제성지로 지정된 후 두 번째 경사다.

이어 두 번째로 해미읍성을 둘러봤다.

해미읍성은 성곽의 길이 1800m, 높이 5m, 성내면적 196,381㎡ 이다. 동문(잠양루) 서문(지성루) 남문(진남문), 북문(암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동문 쪽에 주차장이 있어 출입문을 찾느라 성 외곽을 한 바퀴 도는 곡절도 있었다. 채 30분이 안 걸렸다.

남문이 주 출입문인데, 남문안쪽 문루를 보면 황명홍치사년신해조(皇明弘治四年辛亥造)라는 붉은 글씨가 선명히 적혀 있다. 황명홍치(皇明弘治)는 명나라 효종의 연호인 홍치(弘治)를 의미하는데, 1491년(성종 22)에 남문(진남문)이 중수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남문(진남문) 양 옆 각자석(刻字石)엔 공주, 청주, 임천 등 각 고을명이 적혀있는데, 그 구간에 대한 부실공사를 막는 책임제의 증거로 보인다. 안쪽에 들어가면 병장기 전시와 회화나무가 나온다. 회화나무는 충청남도 지정 기념물 제 177호로 수령 300년 이상으로 추정된다.

1866년(고종3) 병인박해 때 천주교 신자들을 이 나무에 매달아 고문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어 옥사(獄舍)가 나온다. 1935년 발간된 ‘해미순교자약사’를 토대로 복원됐으며, 1790년부터 100여 년간 수많은 천주교 신자들을 국사범으로 규정하여 투옥한 곳이다. 모형물을 보면서 인간의 본성이 이렇게 잔인할 수 있나 하는 분노감을 느끼게도 했다.

옥사 뒤편에 동헌(東軒)이 있다. 동헌은 조선시대 지방관서에서 정무를 보던 중심 건물로, 관찰사, 수령들이 행정업무와 재판 등을 보는 곳이다.

 

관리와 가족들이 생활하던 관사인 내아(內衙), 지방을 여행하는 관리와 사신의 숙소로 사용한 객사(客舍), 조선시대의 부농, 서리(말단관리), 상인의 집을 재현한 민속마을도 있으며, 북문가까이 높은 언덕에는 청허정(淸虛亭)이 있다.

청허정은 1491년(성종22) 충청병마절도사 조숙기가 ‘맑고 욕심 없이 다스리라’ 라는 뜻으로, 병사들의 휴식과 활을 쏘며 무예를 익히고, 문객들이 시를 짓고 글을 남긴 장소다. 그 외 관광객을 위한 전통주막, 국궁 체험장, 활터, 대나무 숲길도 마련되어 있다.

해미읍성은 단순 병성과 행정기능의 읍성이 아니라, 거기에 일어난 1000여 명의 천주교 박해의 아픔을 많이 간직한 장소로써 알려지고 있기 때문에, 일반인에 더 많이 회자되고 있다.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1시가 넘어 근처 식사를 하니 밖에는 눈이 흩날리기 시작했다. 근처 관광지를 더 보겠다는 마음을 뿌리치고 귀경을 서둘렀다. 눈이 오는 가운데도 역사가 있는 유적지 관광은 나름 즐겁고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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