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전까지 인천 차이나타운 여인들은 '전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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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전까지 인천 차이나타운 여인들은 '전족'
  • 김석배 객원기자
  • 승인 2011.07.15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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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배의 인천이야기] 차이나타운과 전족


해방 전 인천 차이나타운이나 서울 북창동 등지에 모여 살던 중국 여인들은 모두 전족(纏足)을 하였다. 차이나타운 골목길을 이들 여인이 '띠뚝 때뚝' 하며 걸어가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었다.

전족은 옛날부터 중국에서 漢族(한족)이 여식을 낳으면 어릴 적에 천으로 발가락을 안으로 꺾고 묵어 매 발을 작게 보이게 하는 풍습이다. 중국 南北朝(남북조) 무렵부터 행해져 내려온 풍습으로, 2차 세계대전 후 근대에 와서 폐지되었다. 일설에는 여인들이 나돌아다니는 걸 막기 위한 수단으로 이 풍습을 강요하였다고 한다.

중국은 황족이나 귀족 또는 상류계층에서 첩을 여러 명 거느리고 살고 있으니, 하층계급인 '꾸리'(勞力)라고 칭하는 막노동꾼에게 시집을 올 여자가 귀할 수밖에 없었다. 남자와 여자의 균형이 깨지니 一夫多妻(일부다처)제가 아닌 一妻多夫(일처다부)제가 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 결과, 장가를 못 가는 늙은 총각들이 돈을 모아 한 여자를 사들여 한 집에서 공동생활을 하게 됐다. 남자들이 부엌일과 빨래 등의 일을 번갈아 했으며, 여자는 일을 안 하고 '밤일'만 종사하였다. 당시에 들리는 말에는 중국에는 여자는 아무일도 안 하고 남자들을 부려 먹고 산다고 하였다.

인천 차이나타운에서도 해방 전까지 상류층 부인이건, 첩이건, 하층계급의 여인이건 중국 여인이면 거의 예외없이 전족을 하였다. 당시 중국 사람들은 또 여인이 발이 크면 미인이 아니라고 믿고 있었던 것 같다.

당시 인천 차이나타운 중국인들은 요리를 하거나, 장사를 하거나, 막노동을 하는 이들로 크게 3가지 유형으로 분류됐다. 이들은 당시 한국인들도 그러했지만, 재력에 따라 여인을 첩으로 두는 일이 흔했다. 또한 이들 중국인은 한국인들과 달리, 막노동을 하는 하류층 남자 두 사람, 혹은 세 사람이 한 여인과 공동생활을 했다.

중국 여인들의 전족은 한국인들의 풍습과는 전혀 맞지 않아 이웃 한국 주민들의 쑥덕거림도 많았다. 발가락을 어찌어찌하여 꺾어버렸다느니, 도망을 못 가게 하려 한다느니 하는 말이다.

당시 기억에 해방 전까지 인천 차이나타운에 중국인들이 400~500명 거주했는데, 해방 후 대만으로 가거나 미국으로 이민을 가기 시작해 거주민들도 줄어들었으며, 서구 자유주의 영향으로 전족도 서서히 사라져갔다.

위 칼라사진은 1947년 전족한 중국여인을 촬영한 것이다. 발의 길이가 발가락 길이 만큼 줄어든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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