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교의 무거운 죽음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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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의 무거운 죽음 앞에서
  • 허회숙 시민기자
  • 승인 2022.03.07 0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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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기획]
남동구 장수동 '이승훈 역사공원' 조성사업장을 찾아

 

'사람은 누구나 한번은 죽지만 어떤 죽음은 태산보다 무겁고 어떤 죽음은 새털보다 가볍다’ 라는 말이 있다.

앞으로 한 달 후인 4월8일은 한국 최초의 영세자이며 우리나라 천주교 창설자 중의 한 사람인 이승훈(베드로)이 순교한 날이다. 그는 1801년의 신유박해 때 서대문 밖에서 대역죄인으로 처형 당했다. 그 무덤이 인천시 남동구 장수동 산 132-1에 있다.(인천광역시 기념물 제 63호) 이승훈은 1856년(철종 7)에 아들 신규의 탄원으로 대역죄만은 신원되었다.

 

이승훈의 가문은 훌륭한 남인 학자 집안이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재주가 뛰어나 1780년(정조4) 진사시험에 합격했다. 20세 전후부터 고명한 학자들과 사귀었으며 정약용과는 처남매부 간이다.

1868년 (고종 5)에 아들 신규와 손자 재의가 순교하고, 1871년에 증손인 연구, 균구가 제물포에서 순교하였다. 그의 집안에서는 4대에 걸쳐 5명의 순교자를 냈다.

천주교사(史)에서 한국은 매우 특이한 나라로 자리 매김하고 있다. 17세기 초엽부터 조선의 지식인들은 한역 서학서(漢譯 西學書)라고 하는 서양 책들을 통해 서학(서양 학문)의 과학 기술과 함께 천주교를 알게 되었다.

해마다 두 차례 이상 중국으로 떠난 조선의 사신들은 북경을 갈 때마다 천주당에 들러 선교사와 필담을 나누고 그들이 주는 각종 선물을 받아 왔다. 과학기술과 역법(曆法)에 대한 강렬한 호기심과 관심은 그 배경 사유의 문제로 확장되었다.

마테오리치의 ‘천주실의’나 판토하의 ‘칠극’, 그리고 스콜라철학의 사유를 담은 ‘영언여작(靈言蠡勺) 같은 책에는 이제껏 보지 못한 놀라운 통찰과 깊은 사유의 힘이 깃들어 있었다.

주리(主理)와 주기(主氣)로 갈리고 인성(人性)과 물성(物成)같은 형이상학적, 철학적 사유로 100년 넘게 사생결단하고 싸우던 사대부들은 이러한 글들을 읽으며 홀연 답답함이 뻥 뚫리고 새로운 세상의 한 축이 열리는 느낌을 가졌다. 이렇듯 천주학은 서양 과학기술의 전파 붐을 타고 조금씩 알게 모르게 지식사회의 의식저층으로 스며들었다.

1783년 겨울, 이승훈은 아버지 이동욱이 동지사겸사은정사(冬至使兼謝恩正使) 황인점의 서장관으로 중국으로 가게 되자 부친을 수행하는 자제군관 자격으로 북경을 향해 출발했다. 그는 약 40일간 그곳에 머물면서 선교사들로부터 필담으로 교리를 배운 뒤, 1784년에 그라몽 신부에게 베드로라는 본명으로 세례를 받고 귀국했다.

수십 종의 교리서적과 십자가상, 묵주, 상본(象本)등을 가지고 귀국한 이승훈은 한양 명례방에 신앙공동체를 만들고 동료들과 함께 교리를 연구하며 9월부터 영세를 주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 공동체에는 신부가 없이 완전히 평신도만으로 구성되었다.

복음은 양반과 중인을 가리지 않고, 남녀를 가리지 않았으며 서울에서 뿐만 아니라 지방에서도 놀라운 속도로 전파되었다. 이리하여 조선은 선교사의 파견 없이 자생적으로 천주교가 전래된 세계 천주교사에서 그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유일한 나라가 되었던 것이다.

이승훈의 시조가 난 곳은 인천 남동구 외곽지인 반주골(장수동)이다.

이승훈이 참수되어 묻힌 곳이 반주골이며, 역시 참수당한 그의 아들 택규와 신규가 살았고, 참수되어 묻힌 곳도 이곳이다.

황사영 백서 사건을 일으킨 황사영이 태어나 유년기를 보낸 곳이 인천시 강화군 강화읍 월곶리 대묘동이다. 인천은 천주교 전래의 주요 성지임을 알 수 있다.

이승훈의 아들 이신규와 손자 이재의는 1866년 병인양요 이후 천주교도에 대한 박해가 더욱 심해진 가운데서도 비밀리에 포교 활동을 하다가 1868년 서울 서소문에서 참수형을 당하였다. 이승훈의 증손자 이연구, 이적구 형제는 1871년 신미양요 때 인천 제물포에서 사형되었다.

이신규는 만수동에서 전교 활동을 하면서 1839년의 기해박해 때에도 살아남아 무너진 교회를 재건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이들 다섯 명의 순교자들은 고향인 장수동 조곡산에 나란히 매장되었으나 이승훈의 유해는 부인과 함께 1982년 경기도 광주군 천주교 성지인 천진암으로 옮겨져 현재는 비석과 터(가묘)만 그의 아들 택규, 신구의 묘와 함께 남아있다.

봄을 시샘하는 바람이 심하게 부는 날, 바람에 날리는 옷깃을 여미며 이승훈의 묘 앞에 선다. 그들의 무거운 죽음 앞에 새털 같이 가벼운 삶을 살아온 내 모습이 티끌같이 느껴진다.

2021년 9월 14일 유정복 전 인천시장은 교황 대사, 정신철 주교와 함께 ‘이승훈베드로기념관’ 기공식에 참석하였다. 이승훈이 순교하고 220여년이 흐른 후인 2016년 유정복 인천시장의 재임 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이승훈 묘역의 성역화 사업’이 승인되고 추진되기에 이르렀다. 드디어 이 날 이승훈베드로기념관 기공 미사를 드리게 되었던 것이다. 인천시는 이해 11월 17일 이승훈 묘역에서 ‘이승훈 역사공원’ 조성사업 착공 기념행사를 개최했다. 이승훈 역사공원은 올해 말 완공될 예정이다.

이승훈 역사공원이 완공되면 이곳은 인천 시민을 위한 새로운 문화공간이 될 것이다. 또한 천주교사에서도 새로운 역사 현장이 되리라 생각된다.

앞으로 이곳을 찾는 인천시민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은 삶과 죽음에 대하여 한번쯤 생각에 젖게 되지 않을까? 그리고 문득 무거운 죽음에 대한 깊은 통찰에 이르게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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