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에서는 책읽기를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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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서는 책읽기를 할 수 없다
  • 최종규
  • 승인 2011.07.18 0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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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책과 함께 살기] 허먼 멜빌, 《모비딕》

- 책이름 : 모비딕
- 글쓴이 : 허먼 멜빌
- 그린이 : 모리스 포미에
- 옮긴이 : 김석희
- 펴낸곳 : 작가정신 (2010.1.25.)
- 책값 : 48000원

 (1) 삶이 없는 사람

 학교를 다니면서 아름다운 삶을 배운 적은 없다고 느낍니다. 학교를 다닐 때에 착한 삶을 배운 적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학교를 다니는 동안 참다운 꿈을 배운 적은 없구나 싶습니다. 학교에서는 오직 시험공부만 했으며, 시험점수만 살폈고, 시험등급으로 값이 매겨졌습니다.

 나는 학교가 몹시 못마땅했지만 중학교에서도 고등학교에서도 학교를 박차고 나오지 못했습니다. 그나마 대학교를 두 해 다니고는 떨쳐나왔습니다. 이들 학교가 아무런 삶을 보여주지 못할 뿐더러 어떠한 삶도 가르치지 못했지만 쉽사리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오늘날처럼 대안학교가 없던 지난때이니, 제도권학교를 뛰쳐나온들 어찌하겠느냐 생각할는지 모르나, 오늘날 대안학교라 한대서 참말 대안이 될 만한지는 알쏭달쏭합니다. 왜냐하면, 대안학교라면서 제도권학교와 똑같이 교과서를 쓰는 곳이 많습니다. 교과서를 안 쓰는 대안학교라지만, 막상 아름다움과 사랑과 삶과 꿈을 알뜰살뜰 보여주면서 착하게 생각하도록 돕는다고는 느끼지 못합니다.

 나는 생각합니다. 배움터라고 한다면, 제도권학교이든 대안학교이든 자유학교이든 무엇보다도 사랑을 몸소 보여주고 사랑으로 살아가며 사랑을 배우도록 이끌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랑이 없이는 배움터 노릇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랑은 없이 지식만 있거나 시험만 있다면, 사랑은 없는데 대안이라고만 한다면 무슨 값이 있거나 어떤 보람이 있을는지요.


.. “스타벅!” “예?” “내 영혼의 배는 세 번째로 항해를 떠난다네, 스타벅.” “예, 선장님은 그걸 원하시겠지요.” “어떤 배는 항구를 떠난 뒤 영영 행방불명이 된다네, 스타벅.” “그건 사실입니다, 선장님. 참으로 슬픈 사실이지요.” “어떤 자는 썰몰에도 죽는다. 어떤 자는 얕은 물에도 빠져 죽고, 어떤 자는 홍수에 죽는다. 나는 지금 가장 높은 물마루에 도달한 파도 같은 기분일세. 스타벅, 나는 이제 늙었네. 자, 악수하세.” ..  (770쪽)


 더 깊이 생각하면, 제도권학교이든 대안학교이든 학교라는 이름이 걸맞지 않습니다. 제도권이든 대안이든 무엇을 보여주는지 궁금합니다.

 가르침(교육)이란 지식을 집어넣는 일이 아닙니다. 가르침이란 삶입니다. 가르침은 삶이기 때문에, 가르치면서 배웁니다. 배우는 아이 눈높이에서 헤아릴 때에도 배움은 삶인 터라, 배우면서 가르칩니다.

 교사나 학생이나 서로서로 삶입니다. 삶을 나누는 배움터입니다. 삶을 나누지 않고서는 가르침도 배움도 없습니다. 교과서이든 문학책이든 교재가 되지 않습니다. 교재가 되는 한 가지는 오직 삶입니다. 어떻게 살아가느냐 하는 몸가짐이 교재가 되는데, 삶은 ‘교재’가 아닌 ‘삶’이에요. 그러니까, 학교에서 학교살이를 어떻게 누리거나 즐기거나 맞아들이느냐에 따라 가르침이나 배움이 달라집니다. 집에서 집살이(집살림)를 어찌 누리거나 즐기거나 맞아들이느냐에 따라 가르침과 배움이 거듭납니다.

 교사가 되든 어버이가 되든, 저마다 나 스스로를 일으켜세워야 합니다. 내 삶을 돌보면서 사랑해야 합니다. 이때에 아이들은 비로소 삶을 바라보면서 배웁니다. 아이들은 ‘어른이 들려주는 지식이나 이야기’로 배우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어른이 어떻게 살아가며 움직이고 일하느냐’를 살피면서 배웁니다. 어른이 보여주는 모습(삶)이 고스란히 교과서이거나 교재이거나 책입니다. 어른 삶은 아이한테 사람책입니다.
 

.. “아, 스타벅, 이따금 사람에게 기대는 것은 누구에게나 즐거운 일이군. 이 늙은 에이해브도 좀더 자주 기댔더라면 좋았을걸.” ..  (761쪽)


 자동차를 즐겨 타는 어른(교사와 어버이 모두)은 아이한테 ‘자동차 즐겨 타기’를 가르칩니다. 자동차를 즐겨 타는 어른 둘레에서 자라는 아이들은 ‘기름을 안 먹는 자동차’라든지 ‘자동차가 달리며 쓰는 기름과 자동차가 달리며 나오는 배기가스 때문에 더러워지는 삶터’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저 아주 마땅히 ‘자동차 즐겨 타기’를 할 뿐입니다.

 나이가 열 살이나 되었는데 제 옷가지를 아이 스스로 빨래하지 못한다면, 기계에 집어넣고 단추를 누르는 짓이 아니라, 아이 스스로 손을 움직여 빨래하지 못한다면, 이 아이는 열 살을 덧없이 살아온 셈입니다. 나이 열 살이라면 아이 스스로 제 옷을 빨아서 입을 줄 알아야 합니다. 열 살 아이는 열한 살 아이보다 힘이 여리고, 열한 살 아이는 열두 살 아이보다 힘이 여리겠지요. 열 살 아이는 열 살 아이대로 빨래를 할 수 있고, 열한 살 아이는 열한 살 아이대로 빨래를 할 수 있어요. 스스로 빨아서 입을 수 있을 만한 옷을 입어야 하고, 스스로 입는 옷을 스스로 빨고 말려 다릴 줄 아는 삶매무새여야 합니다.

 아이들이 열 살이 되었는데 스스로 빨래를 할 줄 모른다면, 어른들부터 스스로 제 옷가지를 빨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집에서든 학교에서든 어디에서든, 어른들은 ‘집일을 하는 사람(집일꾼)’을 따로 두기 때문입니다.

 으레 어느 집에서나 아직까지 ‘집일꾼 = 어머니(여자)’입니다. 그런데 집일꾼 몫을 맡는 어머니는 손으로 빨래하지 않습니다. 집식구 빨래는 적어도 세 사람 몫이 나올 테니까 손빨래를 하자면 아무것도 못한다고 여겨 기계에 집어넣고 단추를 누릅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집식구가 스스로 제 옷가지를 빨래하지 않으니까, 기계를 빌 수밖에 없습니다. 집식구가 스스로 제 밥그릇을 채우지 않으니까, 집일을 도맡는 어머니(여자)는 힘겹습니다. 참답거나 바른 먹을거리로 나아갈 겨를을 내기는 꿈만 같습니다. 스스로 흙을 일구어 먹을거리를 마련하기는 아득할 뿐 아니라 생각조차 할 수 없습니다.


.. 퀴퀘그는 철학이라는 것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이야기도 들어 본 적이 없을 테지만, 우리들 인간이 참된 철학자가 되기 위해서는 철학적으로 살거나 그렇게 살려고 애쓰는 것을 의식하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나는 어느 누구가 철학자를 자처한다는 말을 들으면, 그 사람은 소화불량에 걸린 노파처럼 위장을 망가뜨린 게 분명하다고 결론짓는다 … 세상 사람들이 우리 고래잡이를 존경하기를 거부하는 주요 이유는 우리 직업이 기껏해야 일종의 도살업이고 그 일터는 온갖 더러움으로 들러싸여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도살자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이 기꺼이 존경하는 군대 사령관들도 도살자들이고, 게다가 잔인하기로 이름 높은 도살자들이다 ..  (96, 172쪽)


 나는 학교에서 아무것도 못 배웠습니다. 꼭 하나 학교에서 배웠다면, 학교는 아무것도 가르치지 못하는구나 하고 배웠습니다. 학교에서 교사가 가르친다는 지식은 혼자 책을 읽으면 다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훨씬 깊고 넓게 깨달을 수 있습니다. 게다가 혼자 책읽기를 할 때에 더 빨리 배웁니다. 학교에서는 교과서 한 권을 한 해 동안 쓰지만, 이삼백 쪽이든 삼사백 쪽이든, 얄팍한 책 하나로 이토록 오래 잡고 늘어질 까닭이 없어요. 배우는 사람으로서는 하루에 천 쪽을 읽어도 모자라거나 아쉬운 판이거든요.

 나는 학교를 떨쳐나온 뒤에 비로소 배웠다고 느낍니다. 학교를 떨쳐나온 뒤에 비로소 책읽기를 배우고, 우리 말글을 배우며, 내 삶을 배웠다고 느낍니다. 학교에 있는 동안에는 책읽기조차 배우지 못했습니다. 어느 수업이든 교재란 있을 수 없으며, 수업을 하는 때마다 새로운 책을 몇 권씩 가르치거나 배워야 할 텐데, 어느 수업도 이렇게 하지 못했다고 나중에서야 느낍니다.

 학교 교사는 우리 말글을 모릅니다. 학교 교사는 교재나 교과서 지식을 집어넣기에 바쁜 나머지, 바르거나 알맞거나 곱거나 참답거나 착하거나 옳거나 슬기롭게 나눌 우리 말글을 스스로 배우지 않을 뿐 아니라, 스스로 배우지 않으니 가르치지 못합니다.

 말 또한 지식이 아닌 삶이기 때문에, 삶을 꾸리는 대로 말을 합니다. 삶을 사랑스레 꾸릴 때라야 사랑스레 나누는 말입니다. 삶을 착하게 다스릴 때라야 착하게 주고받는 말입니다. 고운 삶에서 고운 말이지, 메마른 삶에서 고운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 우리는 크로제 제도에서 북동쪽으로 가다가 보리새우가 우글거리는 거대한 바다 목장을 만났다. 그 노란색의 작은 생명체는 참고래가 즐겨 먹는 먹이다. 보리새우 떼는 몇 마일씩이나 배 주위에서 파도를 타고 넘실거려서, 우리는 마치 잘 익은 황금빛 밀이 끝없이 펼쳐져 있는 밀밭을 헤치며 달리고 있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  (396쪽)


 삶이 없는 사람이란 살아가지 않는 사람입니다. 목숨은 붙었으나 살아간다 하기 어려운 사람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른 목숨을 먹으면서 제 목숨을 잇습니다. 목숨을 먹지 않으면 목숨이 끊어지는 사람입니다. 다른 짐승도 마찬가지이고, 푸나무 또한 매한가지입니다. 모두들 목숨을 먹으며 목숨을 잇습니다. 목숨을 먹지 않으면 살지 못합니다.

 삶이 있는 사람이라면 다른 목숨을 받아들여 내 목숨을 잇는 줄 깨닫습니다. 다른 목숨을 고맙게 받아들여 내 목숨을 아름다이 일구는 나날인 줄을 슬기로이 알아챕니다.

 돌이켜봅니다. 이오덕 님 책을 퍽 어린 나이부터 읽기는 읽었으되 모든 참뜻을 알알이 아로새기며 읽었다고는 여기지 않습니다. 어린 나이부터 이오덕 님 책을 읽을 때에 ‘어린 날에 한 번 읽었다’ 해서 ‘나중에 안 읽어도 되는 책’이라고 여기지 않았습니다. ‘어린 날에는 내 어린 날 깜냥대로 삭이며 읽’고 ‘나이를 더 먹은 뒤에는 나이를 더 먹으며 더 달라진 깜냥대로 아로새기며 거듭 읽’을 책이라고 여겼습니다. 곁에 놓고 열 번이고 백 번이고 되읽어야지, 한 번 읽었으니까 ‘한 번 읽은 책은 이제 다 알아.’ 하는 마음이 될 수 없습니다.

 이오덕 님이 내놓은 책은 한결같이 ‘삶’을 밝힙니다. 삶을 말하고 삶을 다룹니다. 그러나, 이오덕 님을 섬기거나 따르거나 배운다고 하는 이들 가운데 삶을 섬기거나 따르거나 배우는 이는 아주 드뭅니다. 모두들 이오덕 님 ‘책’을 섬기거나 따르거나 배울 뿐입니다. 이오덕 님 ‘삶’은 살피거나 헤아리지 못합니다.

 “삶을 가꾸는 글쓰기 교육”에 바친 이오덕 님 나날이란 무엇인가를 참다이 돌아보아야 한다고 느낍니다. 그냥 글쓰기가 아닌 “삶을 가꾸는” 글쓰기입니다. 그냥 삶 가꾸기 또한 아니요 삶을 가꾸는 “글쓰기”이고 “글쓰기 교육”입니다.

 첫째 아이 똥오줌기저귀 빨래로 세 해를 보내다가 이제 마무리를 짓나 싶더니, 둘째 아이 똥오줌기저귀 빨래로 다시금 세 해를 보내겠구나 생각하면서 삶을 곰곰이 되짚습니다.

 (2) 삶이 없는 책

 소설책 《모비딕》을 읽으면서 생각합니다. 소설책 《모비딕》을 일컬어 ‘고전’이라 하는데, 이 소설책이 왜 고전인가를 깨닫거나 살피거나 느끼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하고 생각합니다.

 작가정신 출판사에서는 2010년 1월에 그림을 제법 곁들인 48000원짜리 두툼한 ‘완전번역’판을 내놓았다고 이야기합니다(나는 이 책을 장만해서 읽었습니다). 그런데 2011년 5월에 그림을 안 곁들인 20000원짜리 ‘보급’판을 새삼스레 내놓습니다.

 48000원짜리요 그림 곁들인 책을 읽으며 생각했습니다. 《모비딕》에 그림을 곁들여야 할까? 그림을 곁들인 《모비딕》은 더 《모비딕》다울까? 《모비딕》을 48000원짜리 책으로 만들어서 읽혀야 할까? 20000원짜리 《모비딕》도 20000원 값을 하는 《모비딕》이라 할 만할까?


.. 나는 고래를 모른다. 앞으로도 영원히 모를 것이다. 고래의 꼬리조차 모르는데 어떻게 머리를 알 수 있겠는가? 게다가 고래는 얼굴이 없는데, 내가 어떻게 고래의 얼굴을 알겠는가? 고래는 나한테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그대는 내 뒷부분인 꼬리는 보겠지만, 내 얼굴을 보지는 못할 거라고 … 미끄러지듯 나아가는 고래는 조용한 기쁨, 빠르고 힘찬 움직임 속에서 맛보는 평화로운 안정감에 싸여 있었다 ..  (527, 744쪽)


 소설책 《모비딕》은 퍽 예전부터 무척 두툼한 책으로 꽤 여러 곳에서 나왔습니다. 이제껏 나온 《모비딕》이 완전번역이었는지 한두 줄 잘라먹은 번역이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완전번역이라 해서 더 옹근 책이라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한두 줄 빼먹거나 살짝 간추린 번역이라 해서 더 모자란 책이라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누군가는 완전번역을 읽으면서도 몇 줄을 잊거나 놓칩니다. 몇 줄뿐 아니라 책을 통째로 못 떠올리기도 합니다. 누군가는 ‘안 완전번역’을 읽으면서 알알이 되새기거나, 간추린 번역을 읽으면서 가슴이 촉촉히 젖어듭니다.


.. 이 위험한 바다에 나온 것은 자신의 생계를 위해 고래를 잡으러 온 것이지, 고래의 생계를 위해 고래한테 죽으러 온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영원히 경뇌유를 쥐어짤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나는 오랫동안 되풀이된 경험을 통해 인간이란 어떤 경우든 자기가 얻을 수 있는 행복에 대한 개인적 평가를 결국에는 낮추거나 어떤 식으로든 바꾸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행복은 결코 지성이나 상상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내나 연인, 침대, 식탁, 안장, 난롯가, 그리고 전원 등에 있다. 나는 이제 이 모든 것을 깨달았기 대문에, 기름통을 영원히 쥐어짤 준비가 되어 있다 ..  (182, 577쪽)


 한 줄을 읽더라도 내 가슴으로 또렷하게 아로새기며 읽을 문학이요 소설이며 책입니다. 하루를 살더라도 내 가슴으로 따스하게 아로새기며 읽을 삶이요 살림이며 사랑입니다.

 소설책 《모비딕》은 아름다운 삶을 슬프게 받아들인 아픈 사람들 굳은살을 찬찬히 적바림한 이야기책이지 않을까 하고 헤아립니다. 돋보이는 글월이나 빼어난 글월은 없으나 한 줄 두 줄 가만히 되새기면서 가슴으로 젖어들 이야기책이라고 할 만하지 않나 하고 느낍니다.

 삶이란 더 돋보이거나 더 모자라지 않습니다. 글이란 더 돋보이거나 더 모자라지 않습니다. 삶만큼 글을 쓰고 삶대로 글을 씁니다. 글대로 삶이고, 삶대로 글입니다. 내가 하는 일대로 삶이고, 내 삶대로 내가 하는 일입니다.


.. “하지만 공작님은 이 고래를 잡은 것과 아무 관계도 없었는데요.” “고래는 공작님의 것이다.” “우리는 죽을 고생과 위험을 무릅쓰고 돈도 꽤 썼는데, 공작님만 이득을 보시는 건가요? 우리는 고생만 죽도록 하고, 얻는 건 손에 생긴 물집뿐인가요?” “고래는 공작님의 것이다.” “공작님은 이렇게 악착같이 굴지 않으면 생계를 꾸려 갈 수 없을 만큼 가난한가요?” “고래는 공작님의 것이다.” “저는 이 고래에서 제 몫을 받으면 몸져누워 계시는 노모의 고통을 좀 덜어드릴 생각이었는데요.” “고래는 공작님의 것이다.” “공작님은 반의 반, 아니면 반으로 만족하시지 않을까요?” “고래는 공작님의 것이다.” ..  (556쪽)


 삶을 읽을 수 있기에 아름답다 여기면서 두고두고 읽거나 읽히는 소설책 《모비딕》이라고 생각합니다. 삶을 읽을 수 있는 책이기에, 《모비딕》은 학교라는 곳을 다니는 동안 읽을 수 없다고 새삼스레 깨닫습니다. 열대여섯 살은 되어야 비로소 이 이야기책에 깃든 알맹이를 조금씩 빨아먹을 만한데, 열대여섯 살 푸름이는 하루 스물네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하는가요. 오늘날 한국땅 열대여섯 살 푸름이는 푸르디푸른 나날에 《모비딕》을 첫읽기로 만날 수 없습니다. 열대여섯 살부터 첫읽기로 만나지 못하기에, 스물대여섯 살에는 《모비딕》을 거듭읽기로 만날 수 없고, 서른대여섯 살에는 《모비딕》을 다시읽기로 만날 수 없으며, 마흔대여섯 살에는 《모비딕》을 고쳐읽기로 만날 수 없습니다.

 열대여섯 살에 입시지옥에 갇힌 사람은 스물대여섯 살에는 다른 지옥에 갇히고, 서른대여섯 살이나 마흔대여섯 살에는 또다른 지옥에 갇힙니다. 쉰대여섯 살이나 예순대여섯 살에는 이렇게 두툼한 책을 읽을 만큼 ‘삶이 넉넉히 안 남았다’고 여기겠지요. 열대여섯 살부터 읽지 못하는 《모비딕》은 부질없습니다. 여러 차례 되읽지 않는 《모비딕》이라면 겉훑기조차 못한다 할 만합니다.

 모든 책은 성경을 읽듯 읽어야 하고, 성경은 여느 책을 읽듯 읽어야 합니다. 삶이 깃들어야 책입니다. 삶을 깃들일 때에 비로소 책이라는 이름이 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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