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로마에 세금을 내실까, 안 내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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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로마에 세금을 내실까, 안 내실까?”
  • 최원영
  • 승인 2022.03.28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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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영의 책갈피] 제45화

지난주 방송에서 우리는 우리를 행복한 삶으로 안내하는 중도의 길을 가기 위해서는 역지사지하는 태도가 필요하다는 점을 알 수 있었습니다.

역지사지하는 태도는 양쪽 모두를 헤아리는 겁니다. 이때 놀라운 지혜가 솟구치기도 합니다.

《유머와 화술》(이득형)에 예수님의 일화가 나옵니다.

“‘로마에 세금을 바쳐야 합니까, 바치지 말아야 합니까?’

예수를 시기하던 예루살렘 율법학자들이 예수를 찾아와 질문했다. 예수는 새로운 지도자이며 위안을 주는 분이라고 민중들에게 인기가 있을 때, ‘어떻게 하면 민중들에게서 예수를 떼어놓을까’를 고민하던 율법학자들이 예수를 곤경에 빠뜨리려고 이런 질문을 던진 것이다.

당시 예루살렘은 로마 지배하에 있어서 세금을 바치지 않아야 한다고 말하면 예수는 즉시 로마군에게 체포될 것이고, 바쳐야 한다고 하면 독립을 바라고 있는 유대인을 배신한다며 예루살렘 시민들이 당장 등을 돌릴 것이므로 매우 곤란한 질문이었다.”

무척 곤란했을 질문입니다. 지배자들에게 세금을 내겠다고 하면 예루살렘 시민들은 실망할 것이고, 그렇다고 세금을 내지 않겠다고 하면 그 자리에서 즉시 체포될 테니까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 어려운 질문에 예수님은 뭐라고 하셨는지를 알아보겠습니다.

“예수님은 주머니 안에서 동전 한 푼을 꺼내 그들에게 보이며 반문했습니다.

‘이 돈에 새겨진 초상은 누구의 초상입니까?’

‘그것은 케사르의 초상이오.’

‘그렇다면 이것은 케사르의 것이니 케사르에게 돌려주는 것이 좋을 것이오. 그리고 신의 것은 언제나 신에게로 돌려보내십시오.’”

얼마나 지혜로운 대답인가요?

한쪽에는 세금을 ‘내는’ 것, 다른 한쪽에는 ‘내지 않는 것’ 중에서 어떤 선택을 해도 비난을 받을 것이 분명했습니다. 로마군에게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든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양쪽 모두를 만족시키는 현명한 답을 주셨습니다. 본인이 어떤 쪽에 있든 간에 반대편의 입장을 헤아릴 수 있을 때 이런 지혜로운 답이 가능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은 어떤 반박도 할 수 없는 답을 주셨으니까요.

지혜로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상대의 그릇된 행동을 직접 비난하기보다는 오히려 자신을 돌아보는 여유를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이 어떤 말이나 행동을 할 때는 누구나 그럴듯한 이유, 즉 정당한 이유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고 행동할 겁니다. 그래서 자신이 어떤 잘못이나 실수를 했는지 모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상대방은 그런 말과 행동으로 인해 큰 상처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말하기 전이나 행동하기 전에 잠시 생각하는 여유가 필요합니다.

이런 깨달음의 필요성을 김남기 시인의 〈그때 왜〉라는 시에서 배울 수 있습니다.

저는 이 시를 읽으면서 시의 화자가 저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저 사람은 거짓말을 너무 좋아해, 저 사람과는 결별해야겠어, 하고 결심했을 때

그때 왜, 나의 수많은 거짓말했던 모습들이 떠오르지 않았지?

저 사람은 남을 너무 미워해, 저 사람과는 헤어져야겠어, 하고 결심했을 때

그때 왜, 내가 수많은 사람을 미워했던 모습들이 떠오르지 않았지?

저 사람은 너무 교만해, 그러니까 저 사람과 그만 만나야지, 하고 결심했을 때

그때 왜, 나의 교만했던 모습들이 떠오르지 않았지?

저 사람은 너무 이해심이 없어, 그러니까 저 사람과 작별해야지, 하고 결심했을 때

그때 왜, 내가 남을 이해하지 못했던 모습들이 떠오르지 않았지?

이 사람은 이래서, 저 사람은 저래서 하며 모두 내 마음에서 떠나보냈는데

이젠 이곳에 나 홀로 남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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