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인년, 검은 호랑이를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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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인년, 검은 호랑이를 기다리며
  • 최병관
  • 승인 2022.03.31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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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칼럼] 최병관 / 인천노인종합문화회관 소통의 글쓰기반
인천학생교육문화회관 가온갤러리 전시작(2019)

 

억수 비가 내리는 날 밤, 삼밭 골 두렁 높은 논이 걱정이던 석이 아부지가 논에 나가 물고를 살피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갑자기 뒤가 마려워 길섶 저만치 서있던 다박솔에 몸을 가린 채 괴얄띠를 풀어 쪼그리고 앉아 담배를 피워 문 채 콧노래를 부르며 시원하게 큰일을 잘 치루고 돌아 왔다.

날이 밝자 대문 앞이 소란스러웠다. 나가 보니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진 듯 동네 사람들이 웅성대는 것이었다. 들어보니 어제 밤 삼밭 골에 집체만한 호랑이가 불을 밝히고 으르렁거렸다는 것이다. 목격자가 한 둘이 아니었으니 발 없는 소문은 삽시간에 동구 밖을 빠져나갔고 소문은 기정사실화 되었다. 석이 아부지도 하마터면 호랑이 밥 신세가 될 뻔한 자신이 목숨을 부지하게 된 것이 천만다행이다 싶어 스스로를 위로 하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소문은 옮겨 다니며 눈덩이처럼 불어나 삼밭 골은 오가는 발길마저 뚝 끊긴 채 절해의 고도로 변해갔다. 사건이 진정 될 기미가 보이지 않자 경찰까지 나서 진상 조사를 하게 되었고 사건의 결말은 석이 아부지가 피우던 담뱃불 때문인 것으로 밝혀졌다.

그날은 장대비가 쏟아지는 캄캄한 밤이라 석이 아부지가 담배를 쭉 빨면 그 벌건 불빛은 밝아져 멀리까지 보이게 되었고 내 뱉을 때는 희미해지는 것이 반복 되었으며 석이 아부지가 흥얼 대던 노래 소리는 호랑이의 포효로 들렸던 것이다. 지나가던 사람들의 두려움이 얼마나 컸으면 사람의 목소리조차 구분하지 못했을까. 졸지에 호랑이가 된 석이 아부지도 처음에는 자기로 인해 벌어진 일이라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사건이 커지면서 설마 그때 그 일 때문일까? 석이 아부지는 다박솔 뒤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려 보기도 했으나 ‘자기와는 무관한 일이다’고 애써 수긍하지 않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여러 사람 앞에서 말문을 연다는 것이 여간 민망한 일이 아니었다. 답답한 마음에 벙어리 냉가슴이 된 채 일이 쉽게 지나가기만을 지켜보다가 입에 붙은 불을 스스로 끄지 못 하고 결국 소방차를 부르고서야 진화한 꼴이 되었다.

아버지로부터 들은 이 이야기는 아버지도 아버지의 아버지로부터 들었다 한다. 실제 마을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하여 나는 재미있게 들었다.

이 일이 있은 후 마을 주민들은 한동안 우스갯소리를 자주 했다고 한다. 호랑이가 인간사회에 내려오지 않는 이유가 담뱃불만도 못하게 전락한 자신들의 처지가 개탄스러웠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코로나로 몇 년 움츠리고 살아온 사람들은 올해 ‘흑호랑이의 기운을 받아 근심을 내려놓고 살았으면’ 하는 기대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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