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밖 빼어난 그림을 '한국말로 읽다가'
상태바
나라밖 빼어난 그림을 '한국말로 읽다가'
  • 최종규
  • 승인 2011.07.20 05:1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책읽기 삶읽기] 게르베르트 프로들, 《KLIMT》

헌책방을 다니면서 나라밖 빼어난 그림들이 담긴 책을 제법 장만했습니다. 아직 나라안에는 손꼽을 만큼 괜찮거나 훌륭히 엮은 ‘그림 이야기책’이 드물기 때문입니다. 나라밖에서는 좋은 종이에 좋은 엮음새로 빚은 책이 많지만, 나라안에는 이 또한 드물며, 종이에 앉힌 그림결이나 빛느낌이 썩 안 곱기도 했습니다.

 일본말이나 영어나 프랑스말이나 독일말로 된 나라밖 그림 이야기책을 읽을 때에는 글은 안 읽고 그림만 읽습니다. 그림마다 무슨 풀이를 붙였을까 궁금하지만, 막상 풀이가 어떠한가를 알아낼 길은 없습니다.

 생각해 보면, 그림책뿐 아니라 사진책도 이와 같습니다. 나라밖 빼어난 사진쟁이 작품 가운데 한국말로 옮겨진 책은 거의 없습니다. 유진 스미스 님이 빚은 《미나마타》라든지 으젠느 앗제 님이나 스티글리츠 님이 일군 사진책이 한국말로 옮겨지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나라밖에서 나라밖 말로 빚은 책을 어찌저찌 장만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나라밖 사진책을 읽을 때에도 사진에 붙인 풀이는 못 읽습니다. 그저 사진만 읽습니다. 사진평론가가 사진을 어떻게 말하건 말건 아랑곳할 수 없습니다. 무어라 적혔는지 모르니까요.

 이렇게 책읽기를 해서야 사진읽기가 되겠느냐 싶지만, 풀이글은 모르는 채 열 해 스무 해 사진읽기를 하면서 시나브로 깨닫습니다. 풀이글을 읽으며 사진을 읽었다면, 수많은 나라밖 사진쟁이 사진을 ‘풀이글대로 읽는 틀’에서 홀가분하기란 어려웠으리라고. 그러니까, 나라밖 그림책을 한국말 아닌 서양말이나 일본말로 된 책을 헌책방에서 장만해서 그림읽기만 하던 일이란 ‘풀이글대로 읽는 틀’이 아니라 ‘내 가슴으로 스며드는 느낌’을 찾는 일이 되는구나 싶어요.


.. “나는 화가이므로 아침부터 저녁까지 매일 그림을 그린다. 인간의 형상과 풍경, 그리고 이따금 초상화들을.” ..  (클림트/12쪽)


 게르베르트 프로들 님이 글을 쓰고 엮은 《KLIMT》(열화당,1991)를 장만해서 읽습니다. 일본말이나 서양말로 된 클림트 님 책은 곧잘 읽었기에 그동안 ‘클림트라는 사람이 어떻게 살아왔는가’라든지 ‘클림트라는 사람은 무슨 생각을 했는가’ 같은 대목이 궁금했습니다. 한국말로 된 책을 읽으면 이렇게 궁금해 하던 이야기를 알 만하겠지 하고 생각합니다.

 기쁘게 장만해서 기쁘게 책장을 넘깁니다. 그런데, 막상 한국말로 된 책을 읽기가 벅찹니다. 한글로 된 《KLIMT》라는 책에는 클림트라는 사람이 어디에서 태어나, 무엇을 배우며 자라고, 몇 살에 어디에서 무슨 그림을 배우면서 그렸는가, 하는 이야기가 깨알같이 적힙니다.

 신나게 책을 펼치다가 힘겨이 책을 덮습니다. 그림은 그예 그림으로 보아야 할 노릇 아닌가 하고 새삼스레 생각합니다.

 문득 한 가지 떠오릅니다. 인천에서 수채그림을 그리는 박정희 할머님이 떠오릅니다. 박정희 할머님은 미군부대 도서관에서 나온 ‘반 고흐 화집’을 하나 얻어 당신 딸아이한테 보여주며 그림을 가르쳤다고 했습니다. 어떤 ‘화가 되기 수업’이 아닌 ‘그림을 좋아하며 즐기도록’ 그림을 가르쳤다고 해요. 그림쟁이가 되라는 가르침이 아니라, 언제나 그림을 사랑스레 즐기도록 가르쳤다고 했습니다.

 수채그림을 그리는 박정희 할머님은 서양말로 된 이야기를 하나하나 옮기면서 그림을 가르치지는 않았으리라 생각합니다. 그저 ‘그림으로 된 책’에서 ‘그림을 당신 깜냥껏 읽으’면서 가르쳤으리라 생각해요.

 그림쟁이 한 사람 삶과 발자취를 낱낱이 파헤치며 꼼꼼히 다루는 일은 무척 뜻있다고 생각합니다. 비평이나 평론이 맡은 몫이니까요. 그림쟁이 한 사람이 어디에서 누구하고 무엇을 하며 살아왔는가를 좇는 일이란 그림쟁이 한 사람을 더 살뜰히 읽도록 돕는 길 가운데 하나라고 느낍니다.

 다만, 그림 하나만 읽으면서 그림쟁이 삶을 읽을 수 있어야지 싶습니다. 사진 하나를 읽으면서 사진쟁이 삶을 헤아릴 수 있어야지 싶습니다. 글 하나를 읽으면서 글쟁이 삶을 돌아볼 수 있어야지 싶어요.

 좋은 삶과 좋은 그림과 좋은 꿈과 좋은 책으로 좋은 나날을 일굴 수 있으면 누구나 어디에서라도 아름다우리라 생각합니다.


― KLIMT (게르베르트 프로들 글,정진국·이은진 옮김,열화당 펴냄,1991.10.1./4만 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시민과 함께하는 인터넷 뉴스 월 5,000원으로 소통하는 자발적 후원독자 모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