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된 일 마치고 드러누워 읽는 책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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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된 일 마치고 드러누워 읽는 책 하나
  • 최종규
  • 승인 2011.07.21 0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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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책 즐겨읽기] 사이바라 리에코, 《우리 집》

 더운 여름날, 창문을 활짝 엽니다. 아직 한 달이 안 된 둘째는 후덥지근한 날씨에 애를 먹습니다. 그런데 멧골자락 밭뙈기에서 골을 내어 고구마를 심는 이웃이 새벽과 아침과 낮으로 기계를 쓰느라, 기계 소리하고 기계에서 나는 매연이 집안으로 스며듭니다. 아이가 겨우 잠이 들 만하면 소리에 깨고 매캐한 냄새에 숨이 막힙니다. 창문을 닫으면 창문을 닫는 대로 답답합니다. 이웃에 갓난쟁이가 있는 줄 헤아리지 못하기도 하지만, 이웃에 갓난쟁이가 있는 줄 알아도 밭일을 미룰 수 없으니, 시끄러운 소리를 고스란히 떠안아야 합니다.

 오늘날은 시골이라 하더라도 기계 없이는 흙을 못 일군다 할 테지요. 흙하고 오래오래 살아온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빼고는, 시골사람 가운데 자동차를 몰지 않는 사람이란 없습니다. 논을 일구든 밭을 일구든 기계 없이 일구는 사람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괭이로 땅을 파고 호미로 풀을 베지 않습니다. 손으로 모를 심지 않고 손으로 벼를 베지 않습니다. 효율과 돈과 품과 겨를 모두를 따질 때에 기계만큼 좋은 일벗이란 없다 할 만합니다. 이제는 자연과 삶과 사람과 사랑과 흙과 물을 살피며 흙일꾼으로 지내려고 하는 사람은 아주 드뭅니다.


- “저 너머 마을에서 한 달 일하면 매일 아침 된장국에 계란을 넣을 수 있댔어. 계란 따위 안 넣으면 어때. 그냥 다 같이 사는 게 제일 좋은 건데, 그치?” “맞아, 나도 찬성이야. 된장국엔 조개만 있어도 냄새 좋은걸. 아침에 둑에 나가서 조개랑 돌김, 박박 긁어 오면 돼. 그게 젤 맛있어.” 배가 오자, 누나랑 나는 손을 흔들었다. 배에서는 귤꽃처럼 작은 손이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아마 모두들 자기들이 가장 보고 싶은 사람으로 착각했을 거라 생각한다. (2∼4쪽)


 첫째 아이를 낳고 두 해 즈음 살던 인천 골목동네를 떠올립니다. 골목 안쪽 작은 집이라 자동차가 적게 다니기는 했으나, 적게 다닐 뿐 안 다니지 않습니다. 자동차를 모는 이는 새벽이나 낮이나 밤을 가리지 않습니다. 골목을 달리든 큰길을 달리든 운전대를 쥔 사람이 얼마나 바쁜가만을 따집니다. 골목집 한켠에 갓난쟁이가 겨우 새근새근 잠들든 말든 아랑곳하지 않을 뿐더러, 생각조차 하지 않습니다.

 시골로 살림을 옮기면서 갓난쟁이가 낮잠과 밤잠을 걱정없이 잘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막상 시골로 살림을 옮기고 나서도 마을하고 아주 멀리 떨어지고 이웃집이 없는 외딴 곳에서 살지 않는다면, 시끄러운 기계 소리를 떨칠 수 없습니다. 우리 살림집에 빨래기계를 안 들이고 텔레비전을 안 들이면 뭐 하겠습니까. 이웃집이 자동차를 씽씽 몰거나 라디오를 큰소리로 틀면 도루묵입니다. 우리가 텃밭에 풀약을 안 치더라도 이웃이 너른 밭에 풀약을 치면 도루묵이 되듯, 이웃이 지내는 삶은 우리가 지내는 삶에 고스란히 묻어듭니다. 거꾸로, 우리가 지내는 삶이 이웃이 지내는 삶으로도 묻어들겠지요.

 저마다 무엇을 생각하거나 사랑하거나 아끼면서 살아가느냐를 돌아보아야 한다고 새삼 깨닫습니다. 나부터 조용하면서 착한 삶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살아가며, 내 이웃 또한 조용하면서 착한 삶을 사랑하는 터를 살펴야 한다고 다시금 일깨웁니다. 도시라 해서 늘 나쁘지만 않으나, 시골이라 해서 노상 좋지만 않습니다. 도시에서도 사람다운 내음과 멋과 꿈과 이야기를 돌볼 수 있고, 시골이지만 여느 도시와 다를 구석 없이 물질문명으로 둘러싸여 살가운 꿈하고는 동떨어질 수 있습니다.


- 누나는 내 귀를 파면서 이야기를 해 주었다. “오늘, 낮에 사람이 죽었어. 죽은 사람은 이제 할 수 없지만, 일을 저지른 애는 무척 착한 애거든. 단지 어렸을 때 조금 안 좋았어. 그래서 동네 사람들이 그 애 욕을 많이 했지. 그랬더니 그 애가 진짜로 나빠진 거야. 착한 아이였는데. 누나는 동네 사람들이 그 애를 나쁜 애로 만든 거라고 생각해. 그 증거로, 그 애 도망치기 전에 자기 엄마를 찾아왔었대. 그리곤, ‘힘들게 낳아 줬는데 미안해, 엄마.’ 그랬대.” (20∼21쪽)
- “이래도 저래도 다 같은 사람인걸. 가끔은 이런 일도 있는 거야.” (43쪽)


 만화책 《우리 집》(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2011)을 읽으면서 생각합니다. 이러하든 저러하든 ‘우리 집’이 가장 좋은 보금자리라고 이야기하면서 사람이 착하고 예쁘게 살아가는 길이란 무엇인가를 톡톡 건드리려고 합니다. 그렇지만, 가장 좋은 보금자리인 ‘우리 집’이지만, ‘집이라는 물건’이 아니라 ‘집에 깃든 사람을 사랑하는 넋’을 들여다보지 못한다면, 정작 ‘우리 집’에 머물어도 어떠한 살림터인가를 느낄 수 없다고 덧붙입니다.

 만화를 그린 분은 어떤 삶을 일구었기에 이러한 만화책을 그릴 수 있을까 궁금합니다. 숱한 물결을 헤쳤기에 이 같은 만화책을 그릴 수 있을까요. 아무런 물결을 헤치지 않았지만, 오래도록 한결같이 이은 고운 사랑을 따스히 보살피기 때문에 이렇게 만화책을 그릴 수 있을까요.


- “사오리.” “왜?” “남보다 조금 빨리 어른이 되었지만, 그건 또 그거대로 좋은 점도 있어.” (105쪽)
- “알았어. 그럼 이 누나가 용서해 준다. 네가 어디서 뭘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다신 안 한다니, 이 세상 사람 모두가 안 된다고 해도 누나는 용서해 줄게.” (111쪽)


 더 나은 일자리란 없습니다. 더 좋은 사람이란 없습니다. 더 훌륭한 책이란 없습니다. 더 빼어난 몸매란 없습니다. 더 높은 이름값이란 없습니다. 더 멋진 얼굴이란 없습니다. 더 많은 돈이란 없습니다. 더 착한 마음씨란 없습니다.

 다 같이 사람이고 사랑이며 삶이에요. 다 함께 꿈이고 꽃이며 열매예요.

 하루하루 고맙게 맞이하는 삶입니다. 누구나 울거나 웃으면서 보내는 나날입니다. 밥을 먹었으니 똥을 눕니다. 고단하게 일했으니 달콤하게 잠자리에 듭니다. 아이를 번쩍 안으면 까르르 웃음꽃을 피웁니다. 기저귀를 빨아 널면 햇볕과 바람에 보송보송 마릅니다. 냇물은 흐르고 구름은 지나갑니다. 따스한 햇살과 어여쁜 달빛이 온누리를 비춥니다.

 우리 집은 우리 사랑이면서 우리 이야기입니다. 우리 집은 내 집이면서 네 집입니다. 우리 집은 쉼터이면서 일터입니다. 곡식과 푸성귀와 열매에다가 술 한 병과 책 한 권이 덤으로 있으면 더할 나위 없이 즐겁겠지요.


- 누나랑 생선을 먹으면서 난 매일 생선 몇 마리랑 책을 읽을 이불 하나 정도의 공간만 있으면 평생 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누나한테 말하니 ‘그거 좋구나, 아주 좋아.’ 하고 웃어 주었다. (191쪽)
- “너, 이런 것에 왜 그렇게 집착해? 이게 그렇게 죽고 죽이고 할 만한 거니? 왜 안 해도 될 고생을 해? 싫으면 도망치면 될 것을.” (221쪽)


 네 살 아이를 왼팔뚝에 누여 재우면서 책 하나를 펼쳐 읽다가 스르르 잠듭니다. 아버지가 먼저 잠들고 아이는 나중에 잠듭니다. 아버지가 먼저 깨고 아이는 한 시간 남짓 더 잡니다. 아버지는 조용히 일어나서 아까 읽다가 잠들어 못 읽은 책을 조금 더 펼치다가 덮습니다. 기지개를 켜고 둘째 오줌기저귀는 또 얼마나 새로 나왔는가 가늠합니다. 오늘도 어김없이 마흔 장을 알뜰히 채우겠군 하고 생각합니다. 둘째 오줌기저귀가 줄려면 앞으로 또 몇 날을 눈코 뜰 새 없이 빨래살이로 보내야 할까 하고 헤아립니다. 참 바쁘고 몹시 벅찹니다. 그래도 이렇게 바쁘고 저렇게 벅차면서도 손에 책 하나 쥘 수 있으니 고맙습니다. 바쁘기에 바쁜 만큼 책을 손에 쥐고, 벅차기에 벅찬 만큼 책을 손에 듭니다. 어버이라는 자리에 앞서 한 사람으로서 내 삶을 사랑하고 싶고, 어버이로서 아이와 함께 이 보금자리에서 사랑스레 살아가고 싶습니다.

― 우리 집 (사이바라 리에코 그림·글,김문광 옮김,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펴냄,2011.1.20./7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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