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은 한국의 LA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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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은 한국의 LA였다"
  • 배영수
  • 승인 2011.08.04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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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시민들 기억에 흔적으로 남은 '록 음악의 메카'



1988년 발매됐던 '프라이데이 애프터누운' 옴니버스 앨범.
인천의 록 밴드들도 참여했던 기획 음반이다. 

취재 : 배영수 기자

'인천 펜타포트 록 페스티벌'이 지난 16일 개막됐다. 동인천과 부평 등지에선 주말마다 '버스킹'(Busking,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관객이 있는 곳을 찾아가는 공연)이 펼쳐진다. 오는 8월 5일부터 7일까지는 서구 드림파크에서 본격적인 '록 페스티벌' 막을 올린다. 이런 '열기' 속에서 지난 인천의 '음악활동'을 되짚어 보는 자리를 마련했다.


"정말 그랬단 말이에요? 믿기지 않네요.”
 
얼마 전 인천에서 직장인 밴드에 몸을 담고 있는 몇몇 사람과 만날 기회가 있어 이야기를 하다가, 펑크 밴드의 기타리스트로 활동 중인 오모(29, 남구 학익동)씨가 한 말이다. 그가 '믿기지 않는다'라고 말한 이유는 인천이 과거 부산과 함께 '록 음악 메카'였다는 사실을 누군가 말한 데 따른 반응이었다. 

인천에는 여름철 '펜타포트 축제'가 끝나면 사실상 예술활동이 별로 없는 편이다. 그나마 최근 인천아트플랫폼 등지에서 인천 문화 부활을 위한 노력을 기울이면서 서서히 일어날 조짐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과거 영화(榮華)에 비하면 아직은 '조족지혈'(鳥足之血) 수준이다. 그만큼 인천은 '왕년에 음악이 한 몫을 했던' 도시였다.
 
"그땐 그랬지. 날고 긴다는 밴드들, 연주자를 보면 죄다 인천에서 왔대요. 그래서 나도 인천에 몇 번 가보게 됐고. 그러면서 (지금은 없어진) 인천시민회관 등지에서 공연도 몇 번 했죠. 그때도 뭐, 지금처럼 대중들이 다 좋아하는 수준은 아니었지만, 공연 한 번 하면 그 일대 중·고생부터 해서 많이 와요. 서울 사람인 나도 그랬지만, 얘길 들어보니까 서울에서도 잘 나갔던 블랙홀 같은, 이른바 '돈 좀 벌던 밴드'들도 인천에서 자주 공연을 했대요."
 
한국에서 기타를 가장 빠른 속도로 친다고 알려진 기타 연주자 이현석(43)씨가 인천에 대한 추억을 물어봤을 때 했던 답이다. 맞다. 록 음악에 관심을 갖던 마니아들은 말할 것도 없고, 1990년대 중·고등학교를 다니던 인천 '3040세대' 중  상당수는 인천 여러 곳에서 헤비메탈 공연과 음악감상회 등의 행사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1997년 국가 경제 위기가 닥쳐 그 인프라가 모두 사그러들기 전까지만 해도, 인천에서 '머리 좀 길렀다는 형님들' 보기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음은 당시 10대 시절을 공유했던 이들이 동의하고 있다.

인천 록 밴드 블랙 신드롬의 세 번째 앨범. CD를 소장중인 시민 이모(38)씨는
밴드 멤버들이 사진촬영했던 곳이 바로 당시 동인천역 뒷편이라고 전했다.

인천에서 밴드를 하며 '기타줄 좀 만지작대고 드럼 스틱 좀 돌린다는' 사람들 중 일부는 정식 앨범까지 유통시키며 전국적인 마니아층을 불러모은 사례도 있었다. 그중 지금까지 활동하고 있는 블랙 신드롬(Black Syndrome)은 10장이 넘는 앨범을 발표해온 한국 록계의 전설. 한국의 헤비메탈 밴드 중 처음으로 라이브 앨범을 발매한 기록을 남긴 이들은 일본과 유럽 등의 시장도 가장 먼저 진출했던, 그러니까 '최초'라는 단어와 친숙한 팀이다.
 
인천의 록 밴드 인프라는 이들뿐만 아니다. 1980년대 동인천 일대에서 음악하는 사람끼리 결합한 '사하라'는 결성 7년 만인 1993년 데뷔 앨범이 호평을 받은 후 3년 후인 1996년 '셀프 에고(Self-Ego)'라는 앨범으로 록계에 '지각변동'을 일으켰다. 바로 일본의 세계적 음악 전문지 '번(Burrn!)'에서 이 앨범이 평점 87점을 맞은 것이다. 앨범은 한국어로 되어 있음에도 일본 현지에서 2만장 넘게 팔아 화제를 뿌렸다. 본 조비나 머틀리 크루 등 당시 전 세계를 돌며 수백만장의 앨범과 공연 티켓을 팔아치우던 영미권 밴드 앨범도 보통 70점대를 기록했던 것과 비교하며 한국 록계에는 그야말로 한바탕 난리가 났었다.


사하라 1집. 사진촬영한 장소를 자세히 보면
인천상륙작전기념관에서 진행했음을 알 수 있다.

더불어 이들 두 밴드에 비할 만한 대외적 성과를 거둔 건 아니지만, 현재 넥스트 기타리스트인 김세황이 오랜 기간 몸담았던 '다운타운(Downtown)'과 여균동 감독 영화 '세상밖으로'의 사운드트랙 앨범에도 참여했던 터보, 스쿨밴드 자격으로 정규 앨범까지 발표하는 '괴력'을 선보였던 1988년의 티삼스 등 인천의 록 밴드들은 서울의 같은 존재들에 충분히 '맞짱'을 뜨거나 '그 이상' 힘을 발휘했다.
 
시민 이모(33, 남동구 장수동)씨는 "만약 인천이 경제적 인프라까지 서울에 뒤질 게 없어 IMF 광풍 이후에도 그 힘이 사그러들지 않았다면, 신포동이나 부평 같은 지역에 지금의 서울 홍대와 비슷한 역할을 하고 있는 구역이 분명 있었을 것"이라며 안타까워했다.

그 안타까운 시선들을 의식해서인지, 최근 인하대 후문 인근 학산소극장에서 '인천 자유 록 페스티벌'이 과거 인천이 록 음악의 메카였던 것을 추억하던 한 기획자에 의해 열렸다. 예술·문화계에 흥미를 끈 건 물론이다.
 
그렇다면 당시 인천의 록 뮤지션과 마니아가 많이 모였던 장소는 과연 어디였을까. <인천in>은 그 당시 인천에서 '공연장 좀 다니고 음악 좀 들었다는' 사람들을 지인과 인터넷 등을 통해 찾아 설문할 수 있었다. 각각 추억하는 장소들은 조금씩 달랐지만, 다수가 공통으로 꼽는 곳은 대략 2~3군데.
 
먼저 가장 많은 사람들은 동인천역 남광장 앞에 있던 '심지음악감상실'을 꼽았다. 지금처럼 인터넷이 없고 영상물도 보기 힘들던 1990년대 초·중반, 미국 케이블 음악 채널 MTV를 통해 소개된 뮤직비디오를 녹화해 틀어주던 곳이다. "그곳에 없는 뮤직비디오는 이 세상에 아예 없다고 봐도 된다"는 말이 돌았을 정도로 방대한 영상물을 보유하고 있었다고 한다. 1,500원 가량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면 극장식으로 뮤직비디오를 몇 시간이고 볼 수 있어 돈 없는 중·고등학생들이 시간 때우기에는 그만이기도 했다. 설문에 답한 몇몇은 그곳에서 박기영, 김현성 등의 데뷔 전 모습도 볼 수 있었다고 했다.
 
주부 진모(37, 서구 연희동)씨)는 "1993년 무렵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친구를 따라 간 그 곳에서 대중음악, 록 음악이라는 존재의 매력을 느껴 나중에는 약속도 깨고 혼자 보러 다녔다"면서 "감수성이 예민할 때 들었던 당시 음악들은 아직도 집안일을 하며 듣는 레퍼토리다"라고 당시를 떠올렸다.

그랬던 심지음악감상실은 2001년 인터넷 보급으로 집에서도 얼마든지 뮤직비디오를 볼 수 있는 시대로 변하면서 자연스레 폐업의 길을 걷게 된다. (시민들 중에는 주안역 인근 음악감상실 '성림'을 언급하는 사람도 있었다.)
 
현재 인천예총이 사용하고 있는 수봉공원 문화회관 소극장과 지금은 공원화한 옛 인천시민회관 역시 과거에는 록 밴드들이 자주 공연했던 장소였다. 200~300명이 들어갈 수 있었던 문화회관 소극장은 당시 록 공연에 맞는 음향장비 등을 갖추고 있어 블랙홀이나 사하라 단독 공연과 인천 록 밴드들의 연합 콘서트 등이 자주 열려 뮤지션과 팬들이 자주 만나는 자리였다.

학생들의 학교축제 장소로도 자주 쓰였던 인천시민회관의 경우에도 록 공연이 좀 크게 열린다 싶으면 그 넓었던 자리가 모두 메워질 정도였다.

기타리스트 이현석씨는 "정확한 날짜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1990년대 초반 나를 비롯해 많은 팀들 연합공연이 그곳에서 있었는데, 거대한 홀이 가득 차리라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며 당시 열기를 전했다.
 
학창시절을 함께 했던 록 밴드들을 봐 왔고 그것이 추억으로 된 장소들은 어쩌면 사람마다 각각 다를지도 모른다. 이번 설문자들도 위에서 언급한 네 군데 말고도 더 많은 장소를 이야기했다. 그러나 그들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한 마디는 "인천이 록 음악의 본고장이요 메카와도 같은 곳"이라는 사실이었다.

그 중 조모(34, 부평구 산곡동)씨의 한 마디는 설득력을 갖고 있었다. 록 음악이 성행하고 자타공인 최고의 연주 실력을 가진 자들이 모인 과거의 인천이, 비슷한 사례로 록 음악의 중심지로 올라선 미국의 한 도시와 아주 흡사하다고 한 말이다.
 
"인천은 한국의 LA(Los Angeles)였어요."

인하공전 스쿨밴드 티삼스의 앨범. 왼쪽에서 두 번째가 현재 부활의 드러머인 채제민.
채씨는 당시 함께 하던 사람들이 지금은 음악계에 있지 않다며 아쉬워했다.
 
※ 기사와 관련해 소개하는 사진들은 설문에 참여한 시민들이 소중히 갖고 있던 음반 등을 빌려 산곡동 조씨 자택에서 촬영했음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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