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을 당장 멈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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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을 당장 멈춰라
  • 이세기
  • 승인 2022.06.10 0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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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기의 손바닥소설 - 북창서굴]
(8) 비전론(非戰論)
염하와 보구곶리
염하와 보구곶리

비전론

낙원동 이문학회(以文學會)를 다닐 무렵이다. 노촌(老村) 선생댁에 묵자 강의를 듣기 위해 자주 들렀다. 묵점(墨店) 기세춘(奇世春) 선생은 원문에 발음 및 토를 달며 서당식으로 강독을 했었다.

자왈, 말끝마다 천지현황(天地玄黃) 원형이정(元亨利貞)만 알아도 모든 게 일괘에 꿰어진다며, 돋보기안경 너머로 까만 눈동자에는 서기가 흘렀다.

한번은 북녘 땅 개풍이 훤히 보이는 보구곶리에 화실이 있는 홍선웅 화백이 동학들을 초대하여 묵점 선생께서 주역을 강독한 적이 있었다. 기왕이면 주역 점도 쳐보자며 복주머니 꿰듯 가져온 보자기를 펼쳤는데 산통이었다. 마침 주역 공부를 하니 직접 점을 쳐봐야 하지 않겠느냐며 산통을 가져왔던 것이었다.

방바닥에 산가지를 죽 늘어놓으니 50개가 맞아 드디어 점을 치는 태세를 갖췄다. 동학들은 은근히 자신의 점도 쳐주길 기대했다. 그런데 웬걸? 점이라는 게 재미 삼아 보는 것이 아니라 생사가 걸린 것이라 본인 점 이외에는 함부로 점을 치는 것이 아니라고 신신당부하며 운을 뗐던 것이다.

하긴 미운 놈이 있으면 그놈의 점을 쳐서 생사흥망을 안다는 것만큼 무시무시한 염력 예측도 따로 없는 것이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러니 오늘은 점을 쳐 달라고들 말씀은 하지 마시게, 하더니 어떻게 주역 점을 치는지 잘 살펴보라며 손에 쥔 산가지를 나누어 덜어내기 시작했다.

드디어 육효(六爻)를 만들더니 웬걸, 점괘가 그리 썩 좋지는 않았는지, 얼굴에 먹구름이 일순간 드리웠다. 잠시 곰곰이 생각하다가 한마디 했다.

점이라는 것이 상보적이여!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듯, 제아무리 나쁜 점괘라도 한쪽이 기울면 한쪽이 승하는 법이니!

하며 신통하지 않은 괘가 나오자 쩔쩔매며 산통을 흔들었다. 재차 쳐본 점도 운세가 맹탕이었는지 혀를 찼다.

얼굴빛이 어두워지는 게 영 점괘가 신통치 않은 모양새였다. 효를 맞춰보더니 두말하지 않고, 두 손을 털고는 산통을 챙기는 것이 아닌가. 의아해 무엇을 물었길래 그리 접느냐고 했더니,

모든 것은 상통하니 아무리 덮개로 하늘을 짓눌린다고 해도 한 줄기 빛이 들어올 터이니, 흉이든 길이든 무엇이든 개의치 말란다.

마침 땅거죽도 메말라가던 여름 한복판으로 들어가는 초여름 더위에 염하에서 불어오는 쪽바람이나마 있어서 그만 송골하게 맺혔던 송곳땀도 씻겨나갔다.

그리하여 보자기에 다시 산통을 정성스럽게 싸고는 자리를 털고 화실을 나왔는데, 해는 어느새 어둑어둑하게 물들기 시작하고 염하 건너 개풍은 온통 낙조가 붉게 물들이며 북녘 산등성 너머로 떨어지고 있었다.

강 너머 노을에 물든 벌거숭이 산을 바라보며 묻는 것이었다.

하, 얄궂네! 그래도 뿌리는 살아야 하는 법인데?

혼잣말을 했지만, 숨죽였던 담장에 가죽나무도 듣고 염하 철조망도 듣고 강을 건너가는 왜가리도 들었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해거름 저녁에 묵점 선생이 우거하던 부평까지 와 허기나 채우자며 국밥을 먹은 후에 헤어졌다. 산통을 보자기에 들고 묵자의 후예답게 싸움의 최상은 한쪽 손이 다른 한쪽 손을 치지 않는 데에서 비로소 시작된다는 비전론(非戰論)을 펼치고는 홀연 어둠 속으로 표표히 사라졌다.

엊그제 오랜만에 묵자 책을 뒤적이던 중에 책갈피 속에 참외 씨앗 한 알이 납작하게 짓눌러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땅으로 돌아가지 못한 씨앗에게 못내 미안했다. 필시 강론을 마치고 동학과 시원한 참외를 나누다가 책갈피에 떨어진 것이 틀림없을 터. 천하에 남이란 없다[天下無人]는 말이 의(義)롭게 서지 못 하고 납작해진 세상을 보는 것 같아 못내 답답하고 얄궂었다.

요즘 먼 나라에서 벌어지는 전쟁 소식을 접하니 비전론이 떠오른다. 천하가 다 형제라고 생각한다면 어찌 미워하고 해치겠는가. 꽃의 아름다움보다 뿌리의 곤욕을 생각한다면 어찌 어린아이들이 처참하게 죽는 것을 보고만 있단 말인가. 전쟁을 당장 멈춰라!

덧붙이는 말: 홀연 이승을 견디고 황망하게 떠나신 평화생명주의자 묵점 기세춘 선생의 명목(瞑目)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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