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호학파의 작은 스승 소남 윤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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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호학파의 작은 스승 소남 윤동규
  • 구지현
  • 승인 2022.06.13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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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에서 만나는 소남 윤동규]
(1) 학문에 독실한 소남 / 구지현 선문대 교수
성호학파의 근간을 마련한 인천의 대표적인 실학자 소남 윤동규. 그의 종택에는 생전에 스승 성호 및 다른 제자들과 주고받은 서간 천여 통이 전해내려옵니다. 학문 토론에서부터 사적인 감정 교류까지 성호학파의 다양한 모습을 생생히 보여주는 이 서간들을 토대로 2022년 소남 기획을 시작합니다. 선문대 국문과 구지현 교수가 집필합니다.

 

행장
제자 권귀언이 지은 소남윤선생행장 11면. 첫 줄에 ‘소남촌인’(卲南村人) 네 글자가 보인다.

 

학파 내에서의 위상이라면 당연히 학문적인 위상을 기준으로 삼아야 하겠지만 그에 앞서 스승이 인정하는 순서가 있고 선후배들이 인정하는 순서도 있다. 한양의 용산방에서 태어난 윤동규(尹東奎, 1695-1773)는 18세 되던 1712년에 처음 성호 이익(李瀷, 1681-1763)문하에 들어갔다. 이때 성호가 “그의 지조가 견실하고 견해가 명석한 것을 사랑하여 우리의 도가 의탁할 곳이 있게 되었다.”고 하였다. 아직 학문의 길에 들어서기 전이었지만, 학자적인 자질과 사람됨을 가지고 이미 자신의 후계자로 인정하였던 것이다.

사부학당 가운데 서학의 학생이었던 윤동규는 대학에 해당하는 성균관에 입학하지 않고 한양을 떠나 인천의 도남촌으로 이사하였다. 성호가 살고 있는 안산과 가까이 있기 위해서였다. 소남이라는 호 역시 인천의 옛이름인 소성(邵城)에서 연유한 것으로, 명정에 '소남촌인'이라고 써달라고 유언을 남길 정도로 인천을 사랑하였다. 소남에게는 과거공부를 그만두고 성호를 따라 학문을 하였던 인천이야말로 태어난 한양보다도 더 진정한 고향으로 느꼈졌던 것이다.

소남이 입문한 이래로 35년이 지나서야 친인척이 아닌 제자로 안정복(安鼎福, 1712-1791)이 입문하였다. 그 사이 1724년 입문한 제자 신후담(愼後聃, 1702-1761)이 있었지만 그에게 소남은 친척 형이었고 성호는 인척이었다. 따라서 성호 생전에 학파라고 거론할 정도로 제자가 어마어마하게 많았다고 보기는 어려운데, 대체로 10명에서 20명 사이였던 듯 하다. 오히려 다산처럼 사숙하는 학자들이 많아지면서 학파가 형성된 것이다. 그렇다면 소남이 활동하던 시기는 곧 성호학파의 기반이 마련되던 때였던 셈이고, 소남은 학문을 후배들에게 전수해주는 가교 역할을 하였던 존재로 볼 수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소남은 스승과 불과 14세 차이였으나 다른 제자인 이병휴(李秉休, 1710-1776)와는 15세, 안정복과는 17세나 연장자였다. 그는 성호가 대학자로 성장하는 동안 함께 한 제자이자 동료 학자였고 후배들에게는 작은 스승이었다.

당시에 학문하는 선비들이 모두 이 선생[성호] 문하에 모여 있었는데, 독실(篤實)로는 邵南 尹東奎요, 정상(精詳)으로는 貞山 李秉休와 같은 사람이 있었다. 뜻이 같고 도가 맞아, 항상 강론하여 자상히 권면하는 것을 일삼았다. 혹시 식견에 조금이라도 차이가 있으면 역시 반복해서 논변하여 하나의 결론으로 귀결하였으니, 울창하게 건순 연간의 유풍이 있었다.(安鼎福, 『順菴集行狀』 「順菴先生行狀」.)

안정복의 제자인 황덕길(黃德吉)은 위 인용문에서 보듯 성호의 제자들은 어떠한 정치적 목적도 지연도 아닌 “뜻이 같고 도가 맞아” 학문의 길을 함께 하였다. 성호와 제자들은 상하를 가리지 않고 자신의 의견을 내어 토론하고 맞지 않으면 또 토론을 반복하여 결론을 도출해 나갔다. 그 제자들 가운데에서도 뛰어나다고 꼽힌 제자가 윤동규, 이병휴, 안정복이다. 그 가운데에서도 윤동규가 첫손가락에 꼽혔는데 성호의 첫 번째 제자이자 나이가 많아서 그렇기도 하겠으나 황덕길이 특징으로 거론한 “독실”이라는 미덕 때문이기도 하다.

『근사록』에는 “대임을 맡고자 한다면 모름지기 독실해야 한다. 독실하면 역량이 심후하면서도 계책과 생각이 자세하고 확고하니, 이에 큰 일을 맡을 수 있느니라”라는 구절이 나온다. 보통 주자와 병칭하여 정주(程朱)라 일컬어지는 명도선생(明道先生) 정호(程顥)의 말이다.

대임, 즉 큰 임무란 무엇일까? 일반적으로 공자 이후 떨어진 세도를 부지하고 지키는 일을 가리킨다. 앞서 성호가 소남을 평가하여 “우리의 도가 의탁할 곳이 있게 되었다”고 한 것은 소남의 자질이 독실함을 보고 꿰뚫어 한 말이다.

건순 연간이란 송나라 효종의 연호인 건도(乾道)와 순희(淳煕)로, 1162년에서 1189년 사이를 가리킨다. 이 시기 효종의 예우에 힘입어 주자, 장식(張栻), 여조겸(呂祖謙) 등의 학자들이 성리학을 크게 진작시켰다. 성호의 제자들이 논변을 통해 성리학을 발전시켜 나가는 모습이 바로 이 시기의 성리학자들과 비슷한 면모가 있었다고 말한 것이다. 바로 그 제자들의 중심에는 독실함을 지닌 소남이 있었다.

성호학파의 작은 스승으로서의 역할은 어디에서 확인할 수 있을까? 바로 서간이다. 교통과 통신이 자유롭지 않던 시절 서간, 곧 편지는 학자들간 의견을 교환하는 중요한 수단이었고 이 문장 그대로 학술서의 역할을 하였다. 성호와 제자들이 반복하여 논변하였다는 것은 곧 편지가 오고갔음을 가리키는 말이다.

『소남문집』 14권 가운데 8권이 서간이다. 성호에게 보낸 편지는 6권과 8권에 실려 있는데, 총 78편이다. 성호의 문집에 실린 소남에게 보낸 성호의 서간은 총 56편이다. 성호의 서간은 1719년부터 죽기 전 해인 1762년에 걸쳐 있고, 소남 역시 1724년부터 1762년에 걸쳐 있다. 소남이 장성기로 성장하는 시기인 20대 중반부터 성호가 사망하기까지 편지를 계속 주고받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문집에는 실리지 않은 편지 원본 1천여 통이 소남 종택에 전하여 온다. 이 편지들이야 말로 성호학파 성립의 구체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증거물들인 것이다. 또 소남이 소장하였던 만큼 성호의 제자들과의 교유를 망라하여 볼 수 있는 자료이기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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