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문통의 시작 - 화촌포 제방과 수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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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문통의 시작 - 화촌포 제방과 수문
  • 배성수
  • 승인 2022.06.14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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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성수가 바라보는 인천 문화유산]
(15) 수문통 다시보기 ①

수문통. 동인천역 북쪽 화평파출소에서 동국제강에 이르는 도로 일대를 부르던 옛 이름이다. 수문이 있어 붙은 지명일 터인데 어디서도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그 자리에서 꿋꿋이 영업을 이어가고 있는 이발관 이름에서 수문통을 떠올릴 뿐이다. 이제 수문은 사라지고 수문통을 기억하는 이도 많지 않지만, 물은 여전히 복개 도로 아래로 흐르고 있다.

화촌포 갯골

송현동과 화평동 사이의 저지대는 원래 바닷물이 드나들던 갯벌이었다. 주안포에서 갈라져 나온 갯골은 화평철교 부근까지 흘러들었고, 여기서 다시 갈라진 한 줄기 물길이 배다리까지 이어졌다. 갯골 끝자락 화평철교 일대에 있던 마을이 곶말, 한자로 표기하면 화촌(花村)이라 화촌포 갯골로 불렀다. 그러고 보면 주변으로 ‘곶’과 관련된 지명이 여럿이다. 화평동과 화수동, 만석동 일대는 조선시대 인천도호부 다소면 고잔리에 속해있었다. 곶의 안쪽에 있던 마을이라는 의미다. 또 화도교회가 있는 언덕에 곶섬, 즉 화도(花島)라는 이름이 붙었다. 여기서 말하는 곶은 화도언덕일 것이다. 화도진도에 그려진 당시의 지형을 보면 주안포에서 갈라진 화촌포 갯골은 화도고개 즉 곶섬을 휘감고 돌아 곶말까지 흘러들었다.

 

화도진도에 보이는 화촌포 갯골(국립중앙도서관 소장)
화도진도에 보이는 화촌포 갯골(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수문통의 시작 ; 화촌포 제방

‘화촌’이라는 지명은 갑오개혁 이후인 1896년 3월 6일 인천부 관찰사 박세환(朴世煥)이 외부대신 이완용(李完用)에게 올린 질의서에 처음 등장한다. 개항 후 인천의 조선 상인들이 청나라와 일본 상인에 의해 밀려나자, 인천부에서 조선인의 상업 활동을 보장하기 위해 지금 동구 일대를 조선인 전용공간으로 확정해 달라고 외부(外部)에 질의한 문서다. 그 중 ‘화촌 앞 신방축(新防築)’이라는 내용이 보이는데 당시 화촌에 쌓은 지 얼마 안 되는 방축이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방축은 바닷가나 강가에 쌓은 제방으로 대개 농사를 위해 저수지를 만들거나, 바닷물과 강물의 범람을 막기 위해서, 또는 간척이나 매립을 위해 쌓기도 한다. 어느 경우든 제방에 수문을 설치하고 장마나 만조 때 적절히 수문을 열어 제방 안팎의 수위를 조절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제방이 무너지거나 물이 범람하여 피해가 커지기 때문이다. 수위 조절을 위해 열고 닫을 수 있게 수문에 설치한 나무로 만든 장치. 이를 가리켜 ‘수문통(水門桶)’이라 한다. 이곳이 수문통이라 불린 이유다.

인천항안(仁川港案) 제2책, 질품서(質稟書) 제1호(규장각 소장)
인천항안(仁川港案) 제2책, 질품서(質稟書) 제1호(규장각 소장)

화촌포 제방은 1894년 일본 조계 확장을 위해 일본영사관이 작성한 지도에서도 확인된다. 계획도인 까닭에 정밀도가 떨어지고 ‘화촌’이라는 지명도 보이지 않지만, 화도진 서남쪽 점선으로 표시된 갯골 끝자락에 ‘제방(堤防)’이라는 글자가 보인다. 또 1896년 주한 일본공사관에서 작성한 인천 전환국(典圜局) 조사 보고서에도 화촌포 제방에 대한 기록이 등장한다. 전환국은 지금의 조폐공사와 같은 기능을 하는 곳으로 처음 서울에 설치했다가 1892년 인천으로 이전해서 은화와 동화 등을 찍어냈다. 보고서에는 ‘전환국은 인천의 화촌에 있고 북쪽으로 바다에 접하는데 제방이 있어 조수를 막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인천 전환국은 전동 중구보건소(옛 인천여고) 자리에 있었는데 당시 이 일대도 화촌에 속해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또 전환국 북쪽의 화촌포 제방은 만조 때 해수가 범람하는 피해를 막기 위해 쌓은 것으로 해석된다. 바닷물이 범람한다면 화촌포 해안에서 가까웠던 전환국은 심각한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다. 동전을 만들기 위해 쌓아놓은 각종 금속 자재와 주조 기계 등은 습기와 염분에 쉽게 손상되기 때문이다. 바닷물의 범람으로부터 전환국의 자재와 기계를 보호하기 위해 쌓은 화촌포 제방, 그리고 수위조절을 위해 낸 수문, 수문통이라는 이름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1894년 일본조계확장 계획도에 표기된 화촌포 제방(일본 국립공문서관 소장)
1894년 일본조계확장 계획도에 표기된 화촌포 제방(일본 국립공문서관 소장)

간척을 위해 쌓은 또 하나의 제방

대한제국은 경인철도 개통에 따라 더 이상 인천에 있을 이유가 없어진 전환국을 용산으로 이전했다. 전환국이 옮겨갔어도 화촌포 제방은 여전히 그곳에서 바닷물을 막아주고 있었다. 제방 안쪽 새로 난 철길로 십 수 차례 기차가 오가고 기차를 이용하는 사람들로 축현역 일대가 붐벼댔지만, 철길과 제방 사이는 갈대가 무성한 땅으로 방치되고 있었다. 러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난 후 인천의 상권은 일본인이 장악했고, 일본 상인들은 혼란한 틈을 타 인천의 국유지를 불법으로 매입하며 부를 축적해 갔다. 국유지였던 제방 안쪽의 갈대밭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를 주목한 일본인은 인천미두거래소 이사장, 인천상업회의소 회장을 역임하고, 훗날 조선인촌주식회사를 창업한 가쿠 에이타로[加來榮太郞]였다. 그는 방치되고 있던 화촌포 갈대밭을 매입한 뒤 언덕에 인접한 땅부터 논밭으로 개간하기 시작했다.

1911년 지적원도에 표시한 가쿠 에이타로 소유토지(국가기록원 소장)
1911년 지적원도에 표시한 가쿠 에이타로 소유토지(국가기록원 소장)

가쿠 에이타로의 욕심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1908년 그는 화촌포 제방 바깥쪽 갯벌에 또 다른 제방을 쌓는 공사에 들어갔다. 그가 쌓았던 제방의 흔적은 지금 삼두 2차 아파트에서 중앙장로교회를 거쳐 솔빛주공 아파트 새마을금고에 이르는 길로 남아있다. 당시 제방 축조에 동원된 인부들은 일당을 쪼개어 송림동 뒷산에서 열린 ‘인천항 관공사립학교 연합운동회’의 개최비용 모금에 힘을 보태기도 했다. 가쿠는 화촌포의 두 번째 제방 건설을 마무리 한 뒤 그 안쪽의 갯벌도 자기 땅으로 만들었다. 그가 매입하거나 매립을 통해 획득한 송현동 일대의 토지는 무려 5만 6천 평에 달했다. 화평동에도 3천 9백 평의 땅을 가지고 있었으니 이를 더하면 화촌포 일대 6만 여 평의 토지가 가쿠 에이타로의 소유였다.

 

1918년 인천부지도(1:10000) (인천시립박물관 소장)
1918년 인천부지도(1:10000) (인천시립박물관 소장)

1918년 인천부에서 발행한 인천부지도를 보면 1차 제방 안쪽은 이미 개간되어 논으로 표시되고 있는 것에 비해 1차 제방과 2차 제방 사이의 땅은 아직 미개간지로 표시되어 있다. 또 물길을 상세히 그려놓았는데 화촌포 갯골은 2차 제방 오른쪽 끝의 수문을 통과해서 1차 제방의 우중간을 지난다. 이어 수도관 매립을 위해 수도국산에서 화평철교까지 새로 낸 신작로를 지나면서 물길은 좌우로 갈라진다. 좌측 물길은 웃터골에서 흘러내리는 개울과 만나고, 우측 물길은 배다리까지 흘러들고 있다. 아무리 작은 배라도 제방 아래 수문을 통과할 수 없었을 것이기에 배다리에 배가 닿았던 것은 화촌포 제방이 건설되기 전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적어도 20세기 들어서 배다리에 배가 닿은 적은 없지 않았을까?

골목길이 되어 버린 화촌포 1차 제방
골목길이 되어 버린 화촌포 1차 제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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