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의 양희은’, 벌거벗은 목소리의 빛나는 숭고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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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의 양희은’, 벌거벗은 목소리의 빛나는 숭고함
  • 이권형
  • 승인 2022.06.23 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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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형의 인천인가요]
(11) ‘양희은’의 《사랑 - 그 쓸쓸함에 대하여》

 

성문(聲紋), ‘목소리의 무늬’ 정도로 번역할 수 있겠습니다. 지문이나 홍채처럼 사람의 목소리 또한 각자 고유하기 때문에, 목소리 주파 분석을 그래프로 변환한 모양, 그러니까 성문을 가지고 신원 확인이 가능하다고 하죠. 그만큼 목소리는 고유한 것이고, 목소리를 다룬다는 것은 그 어떤 악기를 다루는 것보다 세밀하고, 다양할 수 있으며, 복잡한 과정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런 점에서 목소리라는 도구의 위상은 개개인의 영혼과 감정이 보편적으로 발현되는 시작 지점에 있다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온 신체를 이용해 소리를 내고 발음하는, 지극히 개별적인 과정, 그러니까 노래를 통해 보편적인 감정을 공유할 수 있다는 게 새삼 신비롭습니다. 아마도 그건, 가요(/대중음악)의 보편적인 형식이 그 안에서 그것을 수행하는 존재의 고유함과 공명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겠죠.

노래할 때 우리의 몸은 ‘노래 기관’처럼 기능하게 되지요. 전통적인 의미의 중세 성가의 경우 노래하는 행위 자체가 신성한 교리와 신에 대한 영광의 세속적 확장이었다는 사실을 상기해보려고 합니다. 오로지 신을 향한 영광송에 참여하는 기관으로서의 군중. 그 거대한 의식(Ceremony) 안에 개인의 고유함이나 특수함 따위가 개입할 여지 같은 건 당연히 없었을 겁니다. 하지만 거의 반대로 대중음악이라는 유동적 장(場) 안에선 이미 구축된 음악의 형식에서 마저 개인의 고유한 떨림이 묻어나지요.

‘양희은’의 <사랑 - 그 쓸쓸함에 대하여>는 목소리의 무늬가 아주 선명하게 느껴지는 곡 중 하나입니다. 아주 개인적인, 서간체 가사와 그것을 노래하는 양희은의 보컬은 숨소리 하나까지 세밀하게 레코딩되어 이병우의 클래식 기타 연주에 덩그러니 올라가 있습니다. 사랑의 쓸쓸함이라는 보편적인 주제를 다루지만 목소리의 표정과 결이 앙상하게 드러나는 형식을 통해, 이 곡에는 ‘마흔의 양희은’(“1991년 여름, 나는 마흔이 되었다.” - 양희은의 앨범 소개글) 이라고 명명할 수 있을 법한 고유한 아우라가 드러납니다.

마치 개입할 자격이 없다는 듯 숨죽이며 귀 기울이는 대중 앞에, 단 하나의 악기와 단 하나의 목소리만이 벌거벗은 듯이 고스란히 재생됩니다. 그는 오롯이 자신의 몸에 새겨진 사랑의 쓸쓸한 상처를 드러내고, 앙상하게 드러나는 목소리의 고유한 떨림은 초라하지만, 모순적이게도 영광스런 훈장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 안에서, 상처받은 주체는 자신의 상처를 오롯이 드러냄을 통해 명예회복의 기회를 노리는 것 같습니다.

단조롭게 보이지만 세밀하게 구축된 형식, 그리고 그 안에서 고유하게 드러나는 고유한 몸의 떨림, 그리고 이를 재생하는 대중적 의지, 이 모든 과정이 마치 하나의 의식(Ceremony)을 이루듯이 공명합니다. 그러니까, 이 음악을 재생함으로써, 우리는 격렬한 사랑의 힘에 상처 입은 주체가 (비록 그것이 실패의 과정일지라도) 스스로 그 경험과 흔적의 유일무이함을 드러내며 그 자신의 영광으로 돌려세우는 의식의 과정에 참여하게 됩니다.

<사랑 - 그 쓸쓸함에 대하여>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깊은 울림과 위안이 있다면, 더 나아가 그 안에 어떤 숭고함이 있다면, 그 의식이 참여하는 이에게 ‘정화’의 언어로서 기능한다고 할 수도 있을 테죠. 또, 그것이 제가 이 음악을 가요사의 가장 내밀하고 섬세하며, 빛나는 숭고함이 드러나는 장소로 꼽게 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1991년 발매된 ‘양희은’의 음반 [1991]. ‘이병우’와 함께 작업했다.

 

“다시 또 누군가를 만나서 사랑을 하게 될 수 있을까?

그럴 수는 없을 것 같아.

도무지 알 수 없는 한가지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일

참 쓸쓸한 일인 것 같아.

사랑이 끝나고 난 뒤에는 이 세상도 끝나고

날 위해 빛나던 모든 것도 그 빛을 잃어버려.

누구나 사는 동안에 한번 잊지 못할 사람을 만나고

잊지 못할 이별도 하지.

도무지 알 수 없는 한가지 사람을 사랑한다는 그일

참 쓸쓸한 일인 것 같아.”

- ‘양희은’ <사랑 - 그 쓸쓸함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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