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읽는 좋은 벗과 함께 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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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읽는 좋은 벗과 함께 살기
  • 최종규
  • 승인 2011.08.02 0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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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책 즐겨읽기] 오자와 마리, 《이치고다 씨 이야기 (5)》

 그치지 않는 빗줄기 소리를 듣습니다. 시골자락에서 그치지 않는 빗줄기는 멧등성이를 타고 줄줄 흘러내립니다. 도랑을 내려다보면 멧등성이부터 흙이 조금씩 깎이거나 휩쓸리며 흘러내리는구나 하고 느낍니다. 멧자락에 풀이 없거나 나무가 없다면 비가 올 때마다 멧자락이 퍽 깎이거나 휩쓸리겠지요. 멧자락 흙이 밑으로 흐르고 아래로 쓸리기를 백 해 즈믄 해 만 해 이어지면 이 나라 터전은 어떻게 달라질까 궁금합니다. 내 몸이 고작 백 해를 살아내기 힘들다지만, 백 해 뒤 내 보금자리는 어떤 모습 어떤 이야기가 깃들는지 궁금합니다.

 마음을 읽는 벗처럼 살가이 만나거나 사귈 만한 사람은 드물다고 느낍니다. 마음을 읽지 못한다면 한집에서 함께 살아가는 살붙이라 하더라도 늘 얼굴을 마주하거나 스친다 하더라도 반갑지 못하리라 생각합니다.

 엊그제부터 장마철을 맞이했습니다. 장마철이 되니 갓난쟁이 기저귀를 말리기 몹시 힘듭니다. 빨래하는 기계라든지 물을 짜는 기계를 따로 건사하지 않는 살림인 터라, 날마다 마흔 장 안팎 나오는 기저귀를 틈틈이 빨고 널어 말리기란 참으로 벅찹니다.

 1995년 11월에 들어가 1997년 12월에 나온 군부대 적 일을 떠올립니다. 스물여섯 달을 군부대에서 썩어야 하던 지난날, 제가 몸담은 군부대는 강원도 양구 멧골짜기에 있었고, 이 가운데 열두 달을 지내던 두솔산이라는 곳은 한 해 가운데 해가 나는 날이 거의 없었습니다. 한 해 내내 온통 구름에 둘러싸이거나 감긴 채 축축하거나 눅눅한 군부대였습니다. 이곳 군부대는 1997년 12월에 저와 또래들이 사회로 돌아오고 몇 달 지나지 않아 해체되어 사라졌는데, 이무렵 남녘에 거의 남지 않던 ‘갈탄 뻬치카’를 썼어요. 소대마다 짤순이를 하나씩 주었고, 중대에 빨래기계를 둘 주었습니다. 짤순이까지 부대에 주는 일은 거의 없으나, 두솔산 군부대는 한 해 내내 비가 오거나 눈이 오거나 안개가 끼어 빨래가 마를 겨를이 없다 보니, 짤순이가 없어서는 안 되었습니다. 옷이며 모포이며 침낭이며 늘 곰팡이 내음이 배었어요.

 해를 볼 수 없이 눅눅한 데에서 눅눅하게 살아야 하니, 군대라는 곳은 더 눅눅하다지만, 사람이 죄 눅눅해지고, 마음씨나 생각밭이나 눅눅한 틀에서 허우적거립니다. 보송보송 마른 옷을 입을 수 없고, 곰팡내를 씻길 수 없이 잠자리에 들거나 막사에서 지내야 하니, 따사로이 마음을 쓰거나 너그러이 생각을 기울이기 힘듭니다. 가뜩이나 거친 말과 주먹다짐이 오가는 군부대에서 늘 찌푸린 날씨가 겹치니, 이런 데에서 젊은 사람이든 늙은 사람이든 안 미칠 수 없겠구나 하고 느낍니다.


- ‘아빠께. 이 부적은 제가 직접 만든 거예요. 건강 조심하면서 일 열심히 하세요. 유미는 하트 모양을 제일 좋아해요.’ (28쪽)


 쉬지 않고 내리는 빗줄기를 바라봅니다. 쉬지 않고 내리는 빗줄기이기 때문에 방바닥에 틈틈이 불을 넣습니다. 집안이 눅눅해지지 않게끔 불을 넣으면서 따순 물을 쓸 수 있겠다 싶은 때에는 물을 받아서 두 아이를 씻깁니다. 두 아이를 씻기고 기저귀를 빨래한 다음, 아버지는 찬물로 몸을 씻습니다.

 아이들을 다 씻기고 혼자서 빨래 마무리를 짓고 몸을 씻으며 생각합니다. 내가 내 아이들만 한 나이였을 때에 내 어머니는 두 아들을 어떻게 씻기거나 먹이거나 재우거나 놀리거나 심부름을 시켰을까 하고. 어머니 살림집에 빨래기계가 아직 들어오지 않던 때에는 집식구 빨래를 당신 손으로 어떻게 치르셨을까 하고.

 둘레 사람들은 우리한테 빨래기계를 들이라 이야기합니다. 이것저것 집일이 많고 할 일이 많다면서 왜 빨래를 애써 손으로 하면서 겨를을 버리느냐고 이야기합니다.

 나는 손으로 빨래를 하고, 발로 자전거 발판을 밟습니다. 손으로 빨래를 하기에 품이며 겨를이며 더 많이 들인다 할 만하고, 발로 자전거 발판을 밟으며 읍내 장마당을 다니니까 몸이 더 고단하며 품이나 겨를 또한 한결 많이 들인다 할 만합니다.

 그렇지만, 손을 쓰거나 발을 쓰면서 기름을 안 써도 되거나 적게 쓰면 되니까 마음이 좋습니다. 손을 쓰면서 내 살붙이들 몸과 마음을 헤아릴 수 있는 한편, 내 어린 날 내 어머니 삶을 돌아보고, 내 어머니가 어렸을 적에 내 어머니를 보살핀 어머니(나한테는 외할머니)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발을 쓰면서 내 몸으로 할 수 있는 일에다가 내가 뿌리내려 살아가는 보금자리와 마을을 곰곰이 둘러보며, 내 아버지와 내 아버지를 낳아 돌본 아버지가 ‘자동차 없이 살던’ 지난날 어떤 삶과 꿈과 넋이었을까를 짚거나 살필 수 있습니다.


- “그건 그냥 본래의 나로 돌아간 것뿐이니까.” “그 전에 병원에 가 봐! 때때로 기억이 사라지면 그건 병이잖아!” “됐어.” “되긴 뭐가 돼! 난 요스케가 날 잊어 버리는 것도 싫고, 다른 사람처럼 되어 버리는 것도 싫어. 신 귤을 줬던 것도, 며칠이나 밤을 새면서 바자회 소품 만들었던 것도, 우울할 때 전골 재료를 사들고 놀러왔던 것도, 학원제에서 집사 코스프레로 우승해서 받은 컵라면 반 년치를 전부 나한테 준 것도, 감기 걸렸을 때 죽 끓여 준 것도, 잊어버리는 건 참을 수 없어!” “이온, 너, 목소리가 너무 커. 게다가 그건 거의 다, 내가 너한테 해 줬던 일뿐이잖아.” (58∼60쪽)


 만화책 《이치고다 씨 이야기》(학산문화사,2011) 5권을 읽으며 생각합니다. 6권에서 마무리를 짓는다는 《이치고다 씨 이야기》 5권은 ‘마음을 읽는 좋은 벗’하고 함께 살아가는 기쁨과 슬픔을 찬찬히 다루는데, 이 ‘마음을 읽는 좋은 벗’이란 하늘에서 똑 떨어진 대단한 사람이 아닙니다. 별나라나 달나라에서 온 사람이 아니고, 잘나거나 못난 사람 또한 아니에요. 돈이 많거나 없는 사람이 아니고, 이름이 있거나 없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저 좋은 사람이고, 그예 착한 사람이며, 그대로 어여쁜 사람입니다.

 땡볕에 김매기를 할 때에 곁에서 십 분쯤 호미질을 거든다든지, 퍼붓는 비에 물골을 내느라 허우적거릴 때에 옆에서 몇 분쯤 삽질을 돕는다든지, 밥하는 때에 양파와 마늘 껍질을 벗겨 준다든지, 설거지하는 때에 그릇 물기를 훔쳐 준다든지, 집안을 쓸고 닦을 때에 걸레를 빨아 준다든지, 날마다 조금씩 손을 거들며 함께 살아가는 옆지기가 사랑스럽습니다.

 마음을 읽지 않고서는 곁에서 일을 거들 수 없어요. 마음을 느끼지 않을 때에는 옆에서 삶을 함께 나눌 수 없습니다.


- “하지만 이온과 만나 친구로 지낼 수 있어서 행복했어. 고마워.” (85쪽)
- ‘바로 지난달까지만 해도 함께였는데, 이제는 만날 수 없다니 도무지 믿을 수가 없어서 상실감으로 가득하다. 이런 식으로 상처받고 우울해 할 때면 어느 틈엔가 옆에 와서, 같이 흘러가는 구름을 지치지도 않고 바라봤지. 아무 말 하지 않아도 알아주는 것 같은 그 친구를, 난 얼마나 알아줬던 걸까 하고.’ (132∼133쪽)


 지구별 바깥에서 지구로 찾아온 이치고다 씨를 둘러싼 사람들은 조금도 대단하지 않습니다. 이름난 가방회사 사장이라 하더라도 ‘초등학교 5학년이 될 때까지 저한테 있는 줄조차 모르던 딸아이’한테 편지를 처음으로 받고는 눈물을 흘립니다. 지구별에서 오토바이 사고로 죽어 가던 지구사람 몸에 깃들어 목숨을 잇던 또다른 ‘지구별 바깥사람’이 차츰차츰 기운을 잃어 멀리멀리 사라지고 마는 자리에서, 이이 또한 홀로 말없이 눈물을 흘립니다.

 어느 한쪽에서는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있고, 다른 한쪽에서는 웃음을 짓는 사람이 있습니다. 눈물을 흘리는 사람 앞에서 함부로 짓는 웃음이 아닙니다. 웃음을 짓는 사람 앞에서 부러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아닙니다.

 한 사람한테는 눈물과 웃음이 갈마듭니다. 다른 한 사람한테도 웃음과 눈물이 잇달아 찾아듭니다. 눈물이 있기에 웃음이 있는 삶이요, 웃음이 있으면서 눈물이 있는 사랑이에요.


- ‘한 달 빨리 태어난 그 아기는 조그맣지만 매우 건강한 남자아이로, 모든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어 주었다. 이름은 부모 이름에서 한 자씩 딴 세나. 무라타니 세나. 성별과 상관없이 붙이려던 이름. 우리 아이로 태어나 줘서 고맙다.’ (185∼186쪽)
- ‘인간이 왜 우는지 조금은 알 것 같다. 그립다든가 가슴 아프다든가 괴롭다든가 기쁘다는 감정, 모두가 사랑과 연관되어 있다.’ (61∼62쪽)


 온누리에 널리 이름을 알리는 사람이 되어야 훌륭하지 않습니다. 큰회사에서 간부가 된다거나 높은자리를 차지해야 잘나지 않습니다. 내 이름이 박힌 책이 나와야 대단하지 않으며, 내 은행계좌에 숫자가 빼곡히 찍혀야 즐겁지 않습니다. 고속도로에서 140킬로미터나 150킬로미터로 달린대서 겨를을 아껴 집에 일찍 돌아오거나 볼일을 수월히 마치지 않아요. 밥을 남보다 곱배기로 먹어야 할 까닭은 없고, 더 값지거나 비싼 옷을 마련해서 입어야 할 까닭은 없습니다. 먹어서 좋으면서 즐거운 밥을 스스로 차려 먹을 때에 아름답고, 입어서 홀가분하면서 기쁜 옷을 손수 기워 입을 때에 어여쁩니다.

 밥 한 그릇을 차리는 손길에 사랑이 깃듭니다. 아기한테 젖을 물리는 한때에 사랑이 머뭅니다. 기저귀를 빨고 이불을 빠는 팔뚝에 사랑이 스밉니다. 아이를 안거나 업거나 어깨동무를 하면서 보내는 나날에 사랑이 찾아옵니다.

 마음을 읽는 벗이 반갑고, 마음을 나누는 살붙이가 고마우며, 마음을 보듬는 이웃이 즐겁습니다. 마음을 어루만지는 만화책 하나가 기쁘고, 마음을 얼싸안는 만화책 하나가 예쁘며, 마음을 아낄 줄 아는 만화책 하나가 보배롭습니다.

― 이치고다 씨 이야기 5 (오자와 마리 글·그림,황경태 옮김,학산문화사 펴냄,2011.4.15./42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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