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방 쌓고 갯벌 매립 40년, 일자로 정비된 갯골 - 수문통
상태바
제방 쌓고 갯벌 매립 40년, 일자로 정비된 갯골 - 수문통
  • 배성수
  • 승인 2022.08.09 09:3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배성수가 바라보는 인천 문화유산]
(16)수문통 다시보기 ②사라진 물길; 갯골을 메워 만든 공업지대
- 배성수 / 인천시립박물관 전시교육부장

19세기 말 전동에 들어선 동전 주조소(鑄造所) 전환국의 침수피해를 막기 위해 화촌포 갯골에 제방을 쌓아 수문을 내었다. 여기에 해수 유입을 막고, 제방 안쪽의 수위를 조절하기 위해 수문통(水門桶)이라는 장치를 달았다. 그리고 수문통은 송현동과 화평동 사이의 공간을 부르는 지명이 되었다.

 

조선 매축왕(埋築王), 수문통을 탐하다.

이케다 스케타다[池田佐忠; 1885~1952]. 일본 쿠마모토 출신으로 부산, 경남 지역의 해안 매립공사를 독점하다 시피하여 ‘조선 매축왕’이란 별명이 붙은 인물이다. 1912년 군인 신분으로 조선에 건너와 1921년 경북 문경에 조선개척주식회사를 설립하면서 황무지 개간과 조림(造林) 사업에 뛰어들었고, 1926년 부산으로 거점을 옮겨 해안 매립공사를 도맡아하며 큰돈을 벌었다. 그가 수문통 일대를 주목한 것은 1925년 이른 봄이었다. 당시 수문통 제방 안쪽은 인천의 유지 가쿠 에이타로[加來榮太郞]의 소유로 일부만 개간되었을 뿐 대부분 갈대밭으로 방치되고 있었다. 그리고 1920년을 전후해서 이 땅은 인천의 무역상 심능덕(沈能德) 소유가 되었다. 심능덕은 경기도 광주의 선비였는데 1885년 인천에서 곡물과 잡화를 취급하는 객주업을 시작하며 부와 명예를 쌓았던 인물이다. 심능덕이 갑작스럽게 병석에 들면서 1925년 1월 이케다 스케타다가 수문통 일대 6만평의 땅을 매입한다. 당시 인천과 어떠한 인연도 없었던 이케다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갈대밭을 매입한 이유는 무얼까?

조선의 매축왕 이케다 스케타다[池田佐忠] (부산일보 1939년 11월 12일)
조선의 매축왕 이케다 스케타다[池田佐忠] (부산일보 1939년 11월 12일)

이케다는 경북 문경에서 황무지 개간으로 큰돈을 벌었던 경험이 있었다. 그의 눈에 수문통 갈대밭은 문경의 황무지나 다를 바 없었을 것이고, 싼 값으로 사들여 비싼 값에 되팔 수 있는 ‘돈 놓고 돈 먹는’ 투기의 대상이었다. 당시 인천은 정미, 장유, 양조 등 각종 공장이 들어서며 공업도시로 변해가던 중이었다. 일본인 자본가들은 공장을 지을 땅을 찾고 있었고, 해안 매립지도 그 중 하나였다. 방치 상태의 수문통 갈대밭을 매립하여 공장 부지로 매각한다면 몇 배의 이익을 남길 수 있다는 계산이 섰을 것이다. 게다가 이케다는 1년 전부터 통영과 목포의 해안 매립에 손을 대면서 자신의 거점이던 경북을 벗어나 전국으로 사업 영역을 넓혀가고 있었다. 산림 조성이나 황무지 개간에 비해 훨씬 많은 돈을 벌 수 있던 해안 매립으로 눈을 돌리던 시기였다.

수문통 주변 지적원도를 지목별로 표시한 지도(1911)
수문통 주변 지적원도를 지목별로 표시한 지도(1911)

 

난항에 빠진 수문통 매립공사

이케다는 경성의 토목건설업체 이토쿠미[伊東組]에 수문통 매립 공사를 맡겼다. 공사는 수도국산 기슭의 흙을 파내어 갈대밭을 메우는 방식으로 추진되었다. 문제는 이미 이곳이 조선인 주택가로 형성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전 지주 심능덕은 수도국산 언덕의 땅을 가난한 조선인들에게 염가로 임대해 주고 있었는데 이케다에게 소유권이 넘어간 뒤 상황은 달라졌다. 고지대에 위치한 주택가의 흙을 파내어 수문통 갈대밭을 메우면서 임의로 도로를 차단하거나 인근 주택의 담장과 대문을 허락 없이 헐어버리면서 주민들의 불만이 고조되었다. 또, 송현 배수지에서 전동 방향으로 매설된 수도관이 훼손될 수 있다는 우려가 기사화되자 인천부와 인천경찰서에서 공사 관계자를 소환하기도 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무리한 공사방법으로 공사 인부가 무너진 흙더미에 깔려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고, 임금체불로 인해 공사 인부들이 동맹파업에 들어가면서 공사는 제대로 추진되지 못했다. 결국 이케다는 1925년 8월 사업을 포기하고 수문통 매립공사의 모든 권리를 이토 세이지로[伊藤淸次郞]에게 양도했다. 싼값에 사들인 갈대밭을 매립하여 비싼 값에 되팔겠다는 매축왕 이케다 스케타다의 욕심이 좌절되고 만 것이다.

1931년 인천부 해면매립도에 표시된 이케다(池田) 사유지(인천부사, 1933)
1931년 인천부 해면매립도에 표시된 이케다(池田) 사유지(인천부사, 1933)

이토 세이지로는 토지매입비 15만원과 공사비 9만1000원으로 수문통 매립공사를 인수했는데 동양척식주식회사로부터 토지매입비 15만원 융자받아 준공 뒤에 갚겠다는 조건이었다. 1934년 동양척식주식회사가 수문통 일대 갈대밭과 주택지 5만8천 평을 경매에 넘겼던 것으로 미루어 그때까지도 공사는 제대로 추진되지 못했던 것 같다. 1936년 제작된 대경성부대관의 「인천부지도」를 보면 일부 매립이 완료된 동인천역 부근의 땅은 주택지로 변했지만, 대부분의 땅은 여전히 갈대밭으로 방치되고 있었다. 경매로 넘어간 수문통 일대의 주택지와 갈대밭은 도쿄의 부호 시게하라 에이이치[茂原鋭一]가 8만원에 낙찰받았다.

1936년 대경성부대관 인천지도에 보이는 수문통 일대
1936년 대경성부대관 인천지도에 보이는 수문통 일대

 

공장을 지어라! 수문통 밖의 해안 매립

시게하라가 동양척식으로부터 낙찰받은 수문통 안쪽 갈대밭이 서서히 주택지로 변해가고 있을 무렵인 1936년 1월, 인천부는 송현리 해면(海面)를 매립하여 공장을 유치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한다. 10만 원가량의 공사비를 투입해 수문통 제방 바깥쪽 3만6000평의 바다를 매립한 뒤 이를 인천의 유지이자 월미도유원회사 사장을 역임했던 요시다 히데지로[吉田秀次郞]에게 평당 3.9원에 매각한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매립 허가도 나기 전에 이미 주변 땅값이 천정부지로 뛰고 있었고, 인천부가 이 땅을 요시다에게 헐값으로 매각하여 이익금이 10만원에 달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면서 주민들의 반발은 날로 거세지고 있었다. 결국 경기도가 매립공사 인가를 부결하면서 요시다 히데지로와 인천상업학교 교장을 역임했던 무카이 사이이치[向井最一], 그리고 친일 사업가로 악명 높았던 김윤복(金允福)이 공사비 전액을 공동 출자하는 것으로 계획을 변경하여 5월 25일 인가를 받아냈다. 그리고 열흘 뒤 공사에 들어가 1년 5개월 만인 1937년 10월 26일 송현사립보통학교 운동장에서 학교 개교식을 겸한 준공식을 거행하면서 수문통 밖 송현리 해면(海面) 매립공사는 완료되었다.

일자로 정비된 수문통 물길과 요시다 히데지로의 매립지 (1947년 항공사진)
일자로 정비된 수문통 물길과 요시다 히데지로의 매립지 (1947년 항공사진)

이로써 19세기 말 바닷물의 범람을 막기 위해 제방을 쌓은 지 40여년 만에 화촌포 갯벌은 모두 육지가 되었고, 이곳으로 구불구불 흘러들던 갯골은 일자로 정비되었다. 매립지 서쪽에는 요시다와 무카이, 김윤복 등 출자자 세 명이 매립공사 이익금을 사회에 환원하겠다는 약속에 따라 설립한 송현사립보통학교(지금 송현초등학교)와 기차를 제작하던 일본차량제조주식회사 인천공장이 들어섰다. 이 회사는 매립공사가 한창이던 1937년 1월 1만3000여 평의 부지를 매입하고 공장 건설에 들어가 그 해 10월부터 기차 차체를 조립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 동국제강 부지의 2차 매립권을 양도받아 여기에는 기관차 생산 공장을 건설했다. 한편 매립지 동쪽으로는 송현동, 화수동, 만석동 등 북인천 임해공업지대로 들어설 공장들에 전기를 공급할 송현변전소와 조선이연주식회사에서 건설한 노무자 사택이 들어섰다. 수문통은 위치만 좌측으로 살짝 옮겼을 뿐, 여전히 이곳에서 바닷물의 유입과 범람을 막아주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도로가 되어버린 수문통 물길

1937년 일자로 정비된 수문통 물길은 지금 동국제강에서 동인천역 북광장까지 이어졌다. 물길 위로는 화평동과 송현동 주민들의 통행을 위해 송현교를 비롯해 세 개의 다리가 놓였다. 그러나 갯벌을 메워 만든 땅이어서 이곳에 들어선 주택가는 장마철이나 태풍이 올 때면 어김없이 물난리를 겪어야 했다. 게다가 이곳으로 흘러드는 하수가 뿜어내던 악취는 주민들을 고통스럽게 했다. 그럼에도 수문통 물길은 한동안 인근 주민들 삶의 터전이 되었다. 6.25전쟁이 끝나고 송현동, 송림동, 화수동 일대로 몰려든 피난민들은 물길 주변에 좌판을 깔고 장사를 시작했으며, 인천시는 화평파출소에서 수문통까지의 물길을 가설 구조물로 복개하여 수문통 시장을 조성했다. 시장 끄트머리의 수문통은 여전히 바닷물을 막아주고 있었고, 가끔씩 물을 빼기 위해 수문을 열 때면 온갖 쓰레기가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고 한다. 그러나 말이 복개지 시장 아래로 물길이 보이는 엉성한 구조물로 덮어놓은 상태여서 여름이면 겪어야 했던 물난리와 악취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었다. 결국 인천시는 1989년 동국제강에서 삼두아파트 앞 수문통까지 435m구간을 복개하여 왕복 4차선 도로와 노변 주차장을 조성했고, 1991년부터는 기존 수문통 시장이 형성되었던 가설 복개부분의 정비에 들어가 1996년 도로 건설을 완료했다. 이제 수문통과 그 사이를 흐르던 물길은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고, 수문통을 복개하여 만든 도로에 ‘수문통로’라는 이름만 남아 사람들의 기억을 소환하고 있다.

수문통 복개 공사 ('월간 인천', 1990년 2월호)
수문통 복개 공사 ('월간 인천', 1990년 2월호)

몇 해 전 수문통 물길을 복원하자는 이야기로 지역사회가 떠들썩했던 적이 있다. 결국 이러저러한 문제로 유야무야 되고 말았지만, 서서히 잊히고 있던 ‘수문통’이란 지명을 소환했던 계기가 되었던 걸로 기억한다. 수문통의 흔적을 이발관 이름에서나 확인해야 하는 지금, 화도진 문화원에서 수문통 물길을 따라 걸어보는 ‘물길 따라 부두길’이라는 도보답사 프로그램을 준비 중이라 한다. 볕 좋은 가을날 사람들과 함께 수문통 물길을 걸어보는 건 어떨까?

06. 도로가 되어버린 수문통 (화도진문화원 소장)
도로가 되어버린 수문통 (화도진문화원 소장)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시민과 함께하는 인터넷 뉴스 월 5,000원으로 소통하는 자발적 후원독자 모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