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꽃 피는 들녘에 피어난 하얀 벗풀
상태바
벼꽃 피는 들녘에 피어난 하얀 벗풀
  • 전갑남 객원기자
  • 승인 2022.08.12 09:4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우린 등잔걸이라 부르지"
강화도 마니산 아래 가랑포 들녘. 녹색의 물결이 출렁입니다.

이른 아침 들길 산책. 논에 벼가 많이 자랐습니다. 출렁이는 녹색 물결에 벼 모가지가 올라오면서 막 벼꽃이 피기 시작합니다.

논 물꼬를 돌보는 동네 아저씨를 만났습니다.

"아저씨 논에 벗풀이 피었어요?"
"벗풀? 요걸 벗풀이라 불러?"
"벗풀을 모르셔?"
"모르긴 왜 몰라? 우린 등잔걸이라 부르지!"
"등잔걸이요?"
"잎사귀를 보라구!"
 
무논에 핀 벗풀. 수꽃입니다.
벗풀 암꽃입니다.
벗풀 잎사귀가 예전 호롱불 등잔걸이와 비슷합니다.

녹색의 벼 논에 삐죽삐죽 고개를 쳐들고 하얀 꽃이 피었습니다. 아저씨는 벗풀 잎사귀가 예전 호롱불을 올려놓았던 등잔걸이와 비슷하지 않냐고 합니다. 그래서 벗풀을 '등잔걸이'라 부른다고 말합니다. 듣고 보니 그럴듯한 별칭입니다.

벗풀은 여러해살이풀로 알려졌습니다. 논이나 연못, 도랑 등에서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자웅동주(雌雄同株), 즉 암수한그루로 수꽃 아래에 암꽃이 위치합니다. 모두 지름이 1cm가 안 되는 3장의 둥근 흰색의 꽃잎을 가지고 있습니다.

논에 벗풀이 자라면 농부 손에 뽑혀나가는 잡초입니다. 불청객인 셈이지요. 뿌리째 뽑지 않으면 내년에 다시 올라오는 생명력이 강한 풀입니다.

농부의 눈총을 받는 벗풀이지만, 말린 벗풀을 달여 복용하면 간에 이롭고 뱀에 물렸거나 종기가 난 곳에 생풀을 찧어 붙이면 효과가 좋다고 합니다.

아저씨는 몇 년 전 오토바이를 타다 다리를 다쳐 걷는 게 예전만 못하십니다. 팔순을 넘기신 노인이 이젠 농사를 짓는 것도 힘에 부친다 합니다.

 

"좀 부끄럽네. 우리 아버지가 보시면 야단맞을 일이야! 논에 난 풀도 못 잡고 농사짓는다고!"
"제초제로 못 잡았어요?"
"요 녀석들 말이야. 약 치는 시기를 놓쳤어. 지금 뿌려야 소용도 없고!"
"벗풀이 많이 자라면 농사에 지장이 있겠는데요."
 
아저씨는 보기가 싫어서 그렇지, 듬성듬성 있는 것은 별지장 없다 합니다. 조금 덜먹는 대신 약을 덜 치게 되었으니 저공해 쌀을 먹는 셈 치면 된다 합니다.
 
아저씨 이야기를 듣다 예전 아버지 농사짓던 일이 생각납니다. 아버지는 이른 새벽 논을 들러 보시다 논에 난 벗풀을 비롯한 잡풀과 피를 그냥 두지 않았습니다. 논둑도 최대한 좁히고 벼 한 포기라도 더 심었구요. 심지어 길가 논둑에는 콩을 심어 수월찮은 수확을 거뒀습니다.
 
입추 지나고 벼는 벌써 출수가 시작되었습니다.
벼꽃이 피었습니다.
녹색 강화 들녘에 백로가 몰려와 논 주인 노릇을 하네요.

벼꽃이 막 패기 시작하고 녹색의 논에 듬성듬성 하얗게 핀 벗풀이 이색적입니다. 거기다 긴 목을 빼고 먹이 사냥을 하는 백로와 묘한 조화를 이룹니다.

 
"이삭거름을 주었는가 벼가 잘 자라고 있네요?"
"열흘 전에 주었는데, 거름발 서는 것 같지?"
"올해도 풍년들겠어요?"
"아직은 몰라! 병충해도 견뎌야 하고, 태풍도 언제 올지."
 
아저씨는 지금 같으면 작황이 나쁘지 않다면서도 농사는 하늘이 도와줘야 풍년이 든다 합니다. 자기 논도 며칠 내로 출수가 되고 바람결에 여물어 갈 것을 기대합니다.
 
"근데 말이야! 쌀값이 너무 싸! 물가는 천정부지로 뛰는데 쌀값은 장기간 저공 행진을 하잖아!"
"저공 행진요?"
"지금 20kg 쌀 한 포대에 45,000원이 안 되잖아! 지난해보다 20% 남짓 떨어졌다구!"

"그래요? 재고가 쌓이고 쌀 소비가 줄어서 그런대요."

 

구릿빛 아저씨의 얼굴이 어두워집니다. 애써 농사지어 제값을 못 받을 것 같다면서요.

"나 한창 일할 땐 말이야. 일 년에 1인당 평균 쌀 120kg, 그러니까 가마 반을 먹는다고 했어. 지금은 한 가마에도 훨씬 못 미치는 57kg을 소비한다고 하찮아. 이러니 풍년이 들면 재고가 쌓이고 쌀값이 오르기는커녕 떨어지지. 배부른 세상이야! 농사가 정말 힘들어!"

이삭거름을 주며 구슬땀을 쏟는 농부. 애쓴 만큼도 보람도 컸으면 좋겠어요.

아저씨 말을 듣고 보니 팍팍한 농촌 현실의 일면을 보는 것 같아 씁쓸합니다. 예전 같으면 쌀 한 톨 더 먹겠다고 논에 난 피며 잡풀 같은 것을 죄다 뽑았습니다. 요즘은 논에 핀 벗풀도 그냥 놔두고 보게 되었다고 합니다.

오토바이 시동을 걸며 아저씨가 운동 잘하라면서 한마디 하십니다.

"그나저나 용케 우리 동네는 비 피해 없이 잘 지나갔어. 그래도 쌀값이 어찌 되건 풍년은 들어야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시민과 함께하는 인터넷 뉴스 월 5,000원으로 소통하는 자발적 후원독자 모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