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골목 헌 고무신 모으던 엿장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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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골목 헌 고무신 모으던 엿장수
  • 김석배 객원기자
  • 승인 2011.08.09 1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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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배의 인천이야기] 인천 고무신 공장의 시작

내 4촌형 장인인 안기영씨는 1920년 어느 날 상인천역(지금의 동인천역) 광장에 서성대고 있었다. 그런데 한 일본인 신사가 다가와 “일본 고급여관을 찾는데, 어디로 가면 되는가요"라고 말을 건네왔다.

평소 착하고 친절한 안씨는 "네,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라고 답하고 일본 여관으로 안내했다. 그리고 되돌아가려고 하는데, 그 일본인이 고마워하며 "친절히 안내해 주셨으니 들어와서 차나 한 잔 합시다"라고 말했다.

안씨는 여관 안으로 따라 들어가게 되었다. 차를 마시며 안씨의 친절한 마음씨에 반한 일본인은 "사실은 나는 조선인이 신다가 버린 헌 고무신을 수집하러 왔는데, 그 일을 당신이 맡아주면 수집 자금을 선불로 주겠으니 한 번 해보시는 게 어떻겠소"라는 제안을 했다. 안씨는 당시 실직 상태에 있었으니 '이게 왠 떡이냐' 하고 수락을 하였다.

집에 돌아온 안씨는 헌 고무신 수집 방법을 곰곰히 생각하다가 "그래 엿장수를 시켜 헌 고무신 한 켤레에 엿 한 가락씩 주고 모으면 되겠다"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엿장수를 찾아다니며, 헌 고무신 수집 대가로 엿값을 지불하고 모으니, 이 소문이 전국 엿장수에게 전해져 빠른 시일에 많은 헌 고무신을 모을 수 있었다.

당시 엿장수들은 손수레 엿목판 아래 상자를 마련하여 "헌 고무신과 엿을 바꿔여!"라고 큰소리를 지르며 골목골목을 누비고 다녔다. 수집한 헌 고무신들은 선박편으로 일본 고무공장에 보냈다.

당시 고무신 공장은 원자재인 생고무를 말레이시아에서 수입했다. 그런데 헌 고무신을 재생하여 생고무 수입을 줄이니, 생산원가를 크게 낮출 수 있었다. 헌 고무신 수집을 몇 년 하다 보니 돈을 많이 벌게 된 안기영씨는 인천 송림동에 고무신 공장을 차리게 되었다. 안씨 고무신 공장은 1940년대에 일제 전시통제로 문을 닫을 때까지 송림동에 자리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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