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설픈 대로 재미나며 기쁜 나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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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설픈 대로 재미나며 기쁜 나날
  • 최종규
  • 승인 2011.08.09 06:08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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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책 즐겨읽기] 아이자와 하루카, 《리넨과 거즈 (2)》

 이레 동안 이어진 비가 여드레째 살짝 멎습니다. 빗줄기가 그치지 않던 이레 동안 숲속에서는 빗소리 말고는 다른 소리를 하나도 들을 수 없고, 다른 모습 또한 하나도 볼 수 없습니다. 한결같이 빗소리이고, 한결같이 빗줄기입니다.

 빗줄기가 멎었을 때에는 하늘을 흐르는 구름을 올려다봅니다. 구름을 올려다보다가 멧새 소리를 듣고 개구리 소리를 듣습니다. 아이를 자전거수레에 태워 읍내 장마당에 다녀오는 길에는 시골길에서 하얀나비를 만납니다.

 빗줄기가 퍼붓는 동안 텃밭에서 오이를 딸까 말까 망설입니다. 볕이 잘 드는 날 따야 더 맛나다 하는데, 텃밭 오이는 어른 팔뚝만 하도록 굵어집니다. 오늘 드디어 하루 살짝 개는 날이 될 듯하니, 얼른 따 송송 썰어 밥상에 올려야겠습니다.

 비가 멎은 저녁나절에 갓난쟁이를 안고 바깥바람을 쐬러 나옵니다. 한 달을 지난 아이는 바깥으로 나오니 저녁때에도 눈이 부신지 살짝 찡그리지만, 이내 바깥바람에 익숙해지면서 눈을 말똥말똥하다가는 숲바람을 마시면서 새근새근 잠듭니다.

 해 떨어지고 어두운 저녁에 개똥벌레 몇을 봅니다. 다른 불빛이 없기에 개똥벌레 불빛은 더 곱다고 느낍니다. 천천히 깜빡깜빡 날갯짓하는 개똥벌레는 천천히 이곳에서 저곳으로 움직입니다. 둘째는 아버지 품에서 잠드느라 개똥벌레를 못 보지만, 첫째는 길에서 폴짝폴짝 뛰고 달리면서 개똥벌레를 바라봅니다. 개똥벌레는 우리 바로 옆을 살며시 스치고 날아갑니다.


- ‘알 수 없는 용기가 샘솟는다. 좋아하는 사람이 쓸 뭔가를 만든다는 것이, 이렇게도 기쁘고 특별한 일이었다니.’ (4쪽)
- ‘만드는 일을 통해 내가 용기를 얻는 것처럼, 내가 만든 물건 덕분에 용기를 내는 사람이 있다. 정신없이 손을 움직이다 보면, 괴로운 일도 잊을 수 있어. 다행이야. 숨을 쉴 수 있으니.’ (40∼41쪽)


 장마도 하늘이 내리고 햇살도 하늘이 내립니다. 흙기운을 머금으며 오이랑 가지랑 토마토랑 당근이랑 텃밭에서 예쁘게 자라지만, 흙기운을 머금자면 하늘이 내린 햇살을 받아야 합니다. 햇살 없이 북돋울 흙기운이란 없습니다.

 책은 사람이 만듭니다. 책을 이루는 종이는 사람이 만듭니다. 책종이에 적히는 글이나 그림이나 사진은 사람이 만듭니다. 그러나 책이든 종이이든 글이든 무엇이든, 햇살이 곱게 드리우면서 지구별을 보듬지 않는다면 태어날 수 없습니다.

 아침을 차리고 낮밥을 차리며 저녁을 차립니다. 쌀을 씻고 미역국을 끓이며 반찬을 마련합니다. 빨래를 하고, 방을 쓸고 닦으며, 아이를 토닥입니다. 모두 어버이가 하는 일이라거나 사람이 하는 일이라 할 테지만, 고운 햇살을 받아먹는 목숨으로서 하는 일입니다.

 푸른 잎사귀로 우거지는 나무도, 나무 사이에 보금자리를 틀어 우짖는 새도, 파랗게 올려다보이는 하늘도, 어느 하나 따스한 햇살 품에서 자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이가 시금치를 먹든 감자를 먹든 두부를 먹든, 무엇 하나 햇살이 펼치는 따사로운 손길을 받아먹기 마련입니다. 어버이는 아이한테 햇살 깃든 숨결을 어여삐 물려주는 이음고리라 할 만합니다.


- ‘내 마음이 누군가에게 상처가 되리란 걸, 생각도 못하다니.’ (38쪽)
- ‘데리러 와 준 것만으로 이렇게 기뻐해 주다니. 그 미소가 내겐 가장 좋은 약이야. 이렇게 어린아이에게까지 걱정 끼치지 말고, 어서 기운 차리고 싶은데.’ (51쪽)
- ‘혼자 슬픈 감정에 잠겨, 주위 사람들을 전혀 보지 못 했어. 이렇게 매사에 열심인, 이 작은 아이에게서 얼마나 큰 위안을 얻는지.’ (80∼81쪽)


 만화책 《리넨과 거즈》 2권을 들여다보니, 책 끄트머리에 ‘그린이 말’이 붙습니다. 그린이 말에는 그린이가 ‘시집을 가서 보내는 나날’을 적바림합니다. 그린이는 시집가기 앞서까지 당신 어버이랑 살다가 제금을 처음 나서 지낼 때에 “통금도 없고 실컷 놀고 게으름 피워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는(188쪽)” 한때를 누렸는데, “이 생활이 아이가 생기면 180도 돌변하리(188쪽)”라 생각하지 못했고, 넋을 차리고 보니 아이가 둘인 고단한 나날이 되었다 합니다. 지난날까지는 “만화가답게 올빼미형이었지만, 밤 8∼9시에 아이들을 재우면서 나도 함께 잠(191쪽)”들고, 아침에 아주 일찍 일어나서 만화를 그린다고 합니다.

 그린이는 마지막으로 “아이들과 북적거리느라 나에 대해 전혀 신경쓰지 못하고 일도 조금밖에 못하지만, 재미있다, 그런 나날입니다(191쪽).” 하고 적바림합니다. 이 마지막 그림을 보면, 딸아이가 뒤에서 지켜보며 “엄마 그림 되게 못 그린다. 내가 훨씬 낫다!” 하고 말합니다. 딸아이 말마따나, 《리넨과 거즈》를 그린 아이자와 하루카 님 만화결은 그닥 ‘잘 그린 그림’이 아닙니다. 그냥 ‘못 그린 그림’이라 해도 됩니다. 예쁘장하게 그리려 애썼지만, 아직은 좀 못 그리는 그림이라 해도 틀리지 않아요.

 그렇지만, 만화결이 빼어나든 좀 어설프든 대수롭지 않습니다. 아주 훌륭히 잘 그리는 그림이기 때문에 만화가 재미나거나 신나거나 즐겁지는 않으니까요. 만화는 ‘잘 그린 그림’으로 이루어지지 않으니까요.

 청소년문학이면서 영화로도 나온 《로빙화》에서도 이런 이야기는 잘 나옵니다. 곽운천 선생은 고아명 그림이 아주 좋으면서 아름답다고 말해요. 고아명은 ‘사물을 빈틈없이 옮겨 그리지 못할’ 뿐 아니라, ‘사물을 판박이처럼 옮겨 그릴 마음이 없’습니다. 고아명은 저 스스로 바라보는 대로 그리는데다가, 저 스스로 마음에서 우러나는 대로 그립니다. 기쁠 때에는 기쁜 빛을, 슬플 때에는 슬픈 빛을, 아플 때에는 아픈 빛을, 벅찰 때에는 벅찬 빛을, 천천히 거침없이 그림으로 옮깁니다. 고아명 그림을 보면서 ‘구도나 명암이나 채도가 엉터리’라 말하지 않고, 말할 까닭이 없어요. 그림에 깃든 이야기와 삶을 읽으면 돼요.


- “코코미 말이야, 지금은 저렇게 씩씩하지만, 셋이 함께 살 때, 그 사람은 툭하면 외박에 나도 술 마시고 늘 신경이 곤두서 있고, 그러다 코코미한테 화풀이도 많이 했어. 그무렵부터 애가 별로 웃지도 않고 혼을 내도 듣는 둥 마는 둥하고, 다 내 탓이란 건 알았지만, 솔직히 아이를 예뻐할 여유가 없었어.” (116∼117쪽)
- “이제야 좀 알겠네. 당신 정말 둔하군요! 남의 기분 따윈 생각도 안 해요? 그러니 허락도 없이 여자 방에 들어가는 무신경한 짓을 하지. 멋대로 내 동생 남친인 양 굴지 않나! 내 동생이 곤란해 하는 거 몰라요?” (175쪽)


 만화책 《리넨과 거즈》는 그린이 이야기와 삶을 읽는 만화책입니다. 만화책이니 만화결도 살펴야 할 테지만, 만화결이야 조금 모자라면 어떤가요. 글책을 읽을 때에도 띄어쓰기나 맞춤법이 좀 틀린다 한들, 때로는 문장부호나 말투가 어수룩하다 한들, 그다지 마음쓰이지 않습니다. 글줄에 깃든 넋과 얼과 꿈과 땀을 읽을 수 있으면 즐겁습니다. 이리하여, 사진에서도 똑같이 말해요. 사진틀이 좀 삐끗하거나 초점이 덜 맞거나 살짝 흔들렸다 하더라도, 사진으로 보여주는 이야기와 삶이 아름답거나 좋을 때에 아름다운 사진이라 하거나 좋은 사진이라 합니다.

 그림결까지 빼어나다면 더 좋을는지 모르지만, 그림결은 이 만해도 넉넉하며, 앞으로 차츰 발돋움하면 됩니다. 모든 만화쟁이가 서른이나 마흔이나 쉰이나 예순에 그림결을 마무리짓지 않으니까요. 또한, 일흔이나 여든이 되어도 새로운 그림결을 찾아나설 수 있어요.

 내 아이가 젓가락질을 말끔히 잘하며 밥알 하나 안 흘려야 사랑스럽지 않습니다. 내 아이가 걸음마나 뜀박질을 빈틈없이 잘해야 믿음직하지 않습니다.

 빗질을 하다가 머리카락이 좀 삐져나오면 어떻습니까. 고무줄로 머리를 묶는데 머리카락 몇 올 풀리면 어떻습니까. 사랑으로 빗고 사랑으로 묶으면 돼요.

 좋아하는 마음이 되어 좋아하는 삶이 되면 즐거워요.


- ‘언젠가 갖고 싶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에 둘러싸여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는 장소.’ (122쪽)


 누구나 서로서로 좋아하는 삶을 아낌없이 껴안을 수 있는 나날을 꿈꿉니다. 무엇을 좋아하는지를 느끼고, 얼마나 좋아하는가를 살피며, 어떻게 좋아하며 나눌 때에 아름다울까를 깨달을 수 있기를 꿈꿉니다. 착하고 참다우면서 고운 삶길을 저마다 알뜰살뜰 걸어갈 수 있기를 꿈꿉니다.

― 리넨과 거즈 2 (아이자와 하루카 글·그림,최윤정 옮김,학산문화사 펴냄,2011.6.25./42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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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가는 2011-08-09 18:12:23
꼭 사서 읽어야겠네요^^ 참 따뜻하고 예쁜 책이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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