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1907년 개장한 만석동 팔경원
1907년 10월 화도고개에서 괭이부리(猫島)로 이어지는 만석동 언덕에 팔경원(八景園)이라는 정양(靜養)여관이 문을 열었다. 정양여관이란 투숙객의 건강이나 피로회복을 위한 시설을 갖춘 숙박시설로 지금의 휴양리조트를 말한다. 당시 우리나라에는 이미 부산 동래온천에 온천욕을 즐길 수 있는 정양여관이 있었지만, 풍광이 뛰어난 언덕에 들어선 팔경원은 해수조탕과 숙박시설에 해수욕장까지 갖추고 있던 우리나라 최초의 종합 휴양리조트였다.
인천의 내항, 북성포
팔경원 언덕 남쪽은 원래 묘도에서 송월동 변전소 일대까지 만(灣)을 이루던 해안으로 북성포라 불리는 곳이었다. 인천역 일대로 흘러들던 성창포의 북쪽에 있어 ‘북성포(北城浦)’라 했는데 지금 북성동이란 이름은 엉뚱하게도 성창포가 있던 곳에 붙어 있다. 조선시대 인천도호부의 세곡을 보관하던 성창(城倉)이 있어 성창포라 했고, 이곳을 지키던 수군 부대 제물진이 있어 제물포라고도 불렀다. 1883년 개항장이 된 바로 그 제물포다. 개항 당시 조선 정부는 제물포를 외국 선박 전용항구로 정했기 때문에 조선의 배들은 이곳에 정박할 수 없었다. 대신 외국 상인과 거래하는 조선 선박 전용항구를 북성포에 두고 ‘내항(內港)’으로 정했다. 내국 선박과 외국 선박의 정박처를 엄격하게 분리하여 탈세와 혼란을 막고자 했던 것이다. 내항이었던 북성포 주변으로는 선박을 이용해 미곡을 운반하던 객주가 모여들었고, 이들을 선상(船商) 객주라 불렀다. 외항 제물포에서 서울로 이어지던 도로 주변, 지금의 내동과 경동으로는 육로를 이용해 잡화를 취급하던 육상(陸商) 객주가 터를 잡았다.
선박을 이용해 미곡을 실어 나르다 보니 북성포 주변으로는 언제나 볏섬이 수북이 쌓여있었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이곳을 만석동(萬石洞)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내항인 북성포에 터를 잡았던 선상 객주는 대부분 배를 가지고 있던 인천 사람들이었고, 그와 달리 육상 객주는 개성, 부산 등 다른 지역 출신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미곡은 잡화에 비해 거래량이나 수익 면에서 월등했기 때문에 육상 객주도 미곡 거래에 손을 대기 시작했고, 그로 인해 선상 객주와 육상 객주 사이에 분쟁이 생겨났다. 인천 사람이 주를 이루던 만석동 선상 객주가 외국 상인들과 거래 경험이 풍부했던 육상 객주와의 경쟁을 이겨낼 가능성은 적었다. 1890년대 들어 내동의 육상 객주는 각국조계 경계지에 별도의 부두시설을 마련하고 본격적인 미곡 거래에 나섰고, 만석동 선상 객주는 하나둘 장사를 접어야 했다.
이나다 카츠히코의 북성포 불법 매립
북성포에 활기를 불어넣었던 선상 객주가 소멸한 뒤, 한동안 조용하던 이 일대가 다시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게 된 것은 청일전쟁이 끝나고 나서였다. 7천 평에 불과했던 인천 일본조계를 확장하기 위해 일본 정부가 세운 계획 중에 북성포 해안의 매립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일본의 조계 확장계획은 독일의 반대로 무산되었지만, 2년 뒤 북성포에는 난데없이 해안을 가로지르는 석축 경계선이 등장했다. 나가사키 출신의 이나다 카츠히코[稲田勝彦]가 쌓은 석축이었다. 고향에서 잡화상과 기계공장을 운영하면서 경험을 쌓은 이나다는 1895년 인천으로 이주한 뒤 인천과 강화도 일대에서 토목청부업을 도맡아 했고, 인천역 건너에서 이나다 여관을 운영하면서 사업 수완을 발휘하고 있었다.
일본 정부의 북성포 매립계획이 무산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는 만석동 일대의 토지를 대거 매입하는 한편, 해안을 가로질러 석축을 쌓았다. 여기에 석축을 쌓은 것은 훗날 그 안쪽을 매립하여 자기 소유의 토지로 삼기 위해서였다. 예나 지금이나 해수면은 국가 소유로, 이를 매립하거나 개발하기 위해선 반드시 정부의 허가가 필요하다. 일본인이었던 그가 대한제국의 공유수면에 해당하는 북성포를 어떻게 매립하려 했던 것일까?
우선 그는 석축 안쪽의 갯벌을 자기 소유로 만들었다. 1897년 이나다는 궁내부 직원 김홍규 및 인천감리서 서기 임순명과 공모하여 석축 안쪽 갯벌에 대한 토지계약서를 허위로 발급받았다. 궁내부는 왕실의 재산을 관리하던 관청이고, 인천감리서는 개항장의 행정업무를 맡아보던 곳이다. 이나다는 감리서 서기 임순명을 꾀어서 북성포 갯벌을 궁내부로부터 매입한 것처럼 꾸며 가짜 토지계약서를 발급하게 했다. 이나다와 궁내부 사이에 토지 거래가 이루어진 것으로 위조했는데 여기에 궁내부 관리 김홍규가 가담했다. 1894년 갑오개혁 때 국가 재산과 왕실 재산의 관리를 분리시킨 지 3년이 채 지나지 않아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이나다 일당은 국가 소유의 공유수면을 왕실 재산으로 둔갑시켰고 이를 정당하게 매입한 것처럼 꾸몄다. 그로부터 4년이 지난 1901년, 이들의 사기 행각이 발각되어 김홍규와 임순명은 처형되지만 일본인이었던 이나다는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았다. 강화도조약에서 규정한 영사재판권이 적용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러일전쟁 직후인 1905년 7월 이나다는 불법으로 취득한 북성포 갯벌 10만여 평에 대한 매립에 들어가 이듬해 9월 공사를 완료했다.
그는 매립한 토지를 공장용지나 주택지로 매각하기 위해 만석동매축주식회사를 설립했지만, 계획대로 토지 매매가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주택지로 쓰기에 일본 조계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고, 수도나 전기 등 기반시설이 없어 공장 용지로도 적절치 않았다. 그나마 부두시설을 갖추고 있어 1908년 문을 연 인천제염소 분공장을 비롯하여 중국산 천일염을 재가공하는 재제염 공장 몇 개가 들어섰을 뿐이다. 결국 이곳에는 매립한 지 30년 가까이 흐른 1934년이 되어서야 일본 동양방적 인천공장이 들어설 수 있었다. 지금의 동일방직 인천공장이다.
팔경원과 묘도해수욕장
다시 팔경원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이나다는 매립한 땅이 계획대로 팔리지 않자 매립지 주변의 땅을 자신이 직접 개발하기로 했다. 그 주변이 개발되면 자연스레 매립지의 매각도 활발해질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1907년 10월 이나다는 매립지 북쪽 화도고개에서 묘도로 이어지는 능성 정상 부근 만석동 8번지에 2층 규모의 호텔을 짓고 팔경원(八景園)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인천 팔경을 두루 조망할 수 있는 곳이라는 의미였다. 특히 온천욕을 좋아하는 일본인을 위해 건물 안에 해수조탕을 설치하고 ‘벳부[別府]온천 기계조탕(機械潮湯)’이라는 신문 광고를 싣기도 했다. 팔경원은 휴양호텔은 물론 인천의 각종 단체나 일본 향우회, 동창회 등의 야유회나 회합장소로도 이용되었다. 팔경원을 개장한 지 3년이 지난 1910년 경 이나다는 팔경원 언덕과 묘도 일대를 종합 휴양리조트로 개발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세운다. 팔경원에 묵는 관광객들을 위한 즐길 거리가 필요했다. 그리고 주목한 것이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묘도였다. 이나다가 북성포 일대의 토지를 매입할 때 묘도까지 사들였던 것이다.
당시 묘도의 남쪽과 북쪽 해안에는 1879년 설치된 화도진 관할의 포대가 방치된 채 남아있었다. 이나다는 묘도 포대 앞 해변을 해수욕장으로 만들고, 이용객들에게 입장료를 받았다. 물론 팔경원에 숙박한 사람들은 무료로 이용할 수 있었다. 묘도 정상 아래에 평상과 차양을 설치해서 휴게실로 사용했고, 탈의실도 갖추고 있었다. 남녀 해수욕장을 각각 운영했는데 남자해수욕장은 묘도 남쪽 해변에, 여자해수욕장은 북쪽 해변에 설치했다. 1912년 여름에는 매일신보사에서 왕복 기차운임과 입장료를 포함해 85전으로 할인해주는 이벤트를 개최할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해수욕장이라고 알려진 부산 송도해수욕장이 문을 연 해가 1913년이니 묘도 해수욕장의 개장연도는 그보다 적어도 2~3년은 앞서는 것이다.
이나다의 욕심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팔경원에서 묘도에 이르는 도로 변으로 방갈로를 두고 임대 객실을 운영했고, 그 주변에 유곽도 설치해서 조선 제일의 관광지로 개발하려는 의욕을 보였다. 그러나 1918년 인천부가 월미도에 제방도로가 건설하면서 공설해수욕장을 설치한 데 이어 1923년에는 해수조탕과 호텔, 해수욕장을 갖춘 월미도 유원지가 개발되어 팔경원과 묘도를 찾는 관광객은 눈에 띠게 줄어들었다. 그 후 휴업과 재개장을 거듭하다가 1931년을 끝으로 폐업한 것으로 보인다. 팔경원이 있던 언덕에는 지금 만석감리교회가 들어서 있고, 묘도는 1937년 북인천항 개발로 인해 깎여나가 부두 매립에 사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