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소중한 것이 가장 멀리 떠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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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소중한 것이 가장 멀리 떠나간다
  • 최원영
  • 승인 2022.09.13 07:5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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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영의 책갈피] 제69화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지금 겪고 있는 아픔을 남들에게 남기려 하지 않습니다. 기쁜 일이든 나쁜 일이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나누는 게 좋다고 배워온 우리로서는 쉽게 이해되지는 않습니다. 무슨 이유로 사랑하는 사람에게 나의 슬픔을 알리지 않는 것일까요?

《한때 소중했던 것들》(이기주)에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해선 안 될 일이 무엇인지를 깨달을 수 있는 글이 있습니다.

“학창시절부터 어머니를 모시고 병원에 자주 드나들었다. 병원은 지상에서 가장 엄숙한 도서관이다. 그곳에서 나는 낯선 이들의 사연을 접하며 미처 몰랐던 세상의 이치를 깨달았고 종종 내 삶을 돌아보곤 했다.

한번은 어머니와 같은 병실에 입원한 어르신을 유심히 지켜본 적이 있다. 거듭된 항암치료에도 병세가 호전되지 않던 할아버지는 의료진과 간병인에게 끊임없이 통증을 호소했다. 눈가엔 늘 핏빛 눈물이 맺혀 있었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하나밖에 없는 딸 앞에서만큼은 아픈 내색을 하지 않았다.

딸이 다녀간 어느 날, 병실에 있던 누군가가 물었다.

‘왜 따님한테는 아프다는 얘기를 제대로 하지 않으세요? 창피해서 그러세요?’

할아버지는 눈물을 억누르며 나지막이 속삭이듯 말했다.

‘아니야. 그런 거 아냐. 자꾸 아프다고 하면 안 좋은 기억만 안겨줄 것 같아서 이 악물고 참는 거야. 좋은 모습은 못 보여주더라도 힘들어하는 모습만 보여주고 갈 순 없잖아…….’

할아버지의 눈에 고인 눈물이 어느새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나는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을 간신히 참아가며 눈꺼풀 속에 눈물을 담아두었다. 마음 한편에 등불이 켜지는 기분이 들었다.

어르신은 극심한 통증으로 정신이 흐려질 만도 하건만, 자식에게 아픈 모습을 보여주기 싫었던 모양이다. 부끄러워서가 아니다. 딸이 겪게 될 슬픔의 무게와 크기를 줄여주고 싶었던 거다. 그래서 생의 끝자락에서 자식의 삶을 걱정하면서 차분히 이별을 준비한 것이 아닐까.”

할아버지의 딸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 느껴지지요? 아버지가 힘들어하며 세상을 떠난 기억을 딸에게 남겨주지 않으려고 아픈 내색을 하지 않고 오히려 미소를 짓는 모습에서 경건함마저 느껴집니다. 서로에게 좋은 기억을 남겨주려는 노력이 이렇게 아름다운 이별을 만드나 봅니다.

이 글을 소개하면서 저자는 자신의 감회를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사랑했던 사람과의 이별은 반드시 상처를 남긴다. 가장 큰 이유는, 서로가 서로에게 속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사람이 한때 내 일부였기 때문이며, 나는 한때 그 사람의 일부였기 때문이다. 우리 안에 머물다가 자취를 감추는 것들은 조용히 사라지지 않는다. 세월 속으로 멀어지면서 무언가를 휙 던져주고 떠난다. 그러면 마음에 혹 하나가 돋아난다. 세월이라는 칼날로도 잘라낼 수 없는 견고한 상처 덩어리가 솟아난다.

이별의 대상은 한때 내 일부였으므로 내게서 무언가를 도려내 달아나기도 한다. 그러면 가슴에 구멍이 뚫린다. 그 무엇으로도 메울 수 없는 커다란 허공이 만들어진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나는 겨우 깨닫는다. 시작되는 순간 끝나버리는 것들과 내 곁을 맴돌다 사라진 사람들이 실은 여전히 내 삶에 꽤 깊이 관여하고 있다는 것을.

지금 나를 힘들게 하는 것 가운데 상당수는 지난날 나를 행복하게 해주었다는 사실을.

무릇 가장 소중한 게 가장 먼 곳으로 떠나간다. 그러므로 서로가 세월이라는 강물에 휩쓸려 떠내려가기 전에, 모든 추억이 까마득해지기 전에, 우리는 곁에 있는 사람들을 부단히 읽고 헤아려야 한다.”

저는 이 글을 접하면서 쏜살같이 지나가는 안타까운 기억들이 저를 슬프게 했습니다. 그동안 가족과의 추억을 많이 쌓지 못한 점, 아이들이 어릴 때 놀아주지 못한 점, 바쁘다는 핑계로 집안일에 관심을 두지 못한 점...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죄스런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습니다.

이런 아픈 기억과 함께 ‘이제부터라도’ 가족에게, 친구들에게, 주위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더 관심을 가져야겠다고, 조금이라도 더 시간을 내어 그들의 아픔에 손을 뻗어야겠다고 다짐해봅니다. 왜냐하면 가장 소중한 사람이 가장 먼 곳으로 떠날 테니까요. 그러니 그 사람이 떠나지 않고 아직 내 곁에 있을 때 시간과 정성을 조금이라도 더 들여야만 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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