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이야기에 깃든 옛날 어린이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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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이야기에 깃든 옛날 어린이 삶
  • 최종규
  • 승인 2011.08.10 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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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이 좋다] 《한 줄 명작 동화 2 : 빨간 모자》

 ‘한 줄 명작동화’라는 이름이 붙은 그림책 《빨간 모자》(꼬마media2.0,2004)를 읽으면서 생각합니다. 서양에서 익히 알려지고 널리 읽히는 옛이야기인 《빨간 모자》는 수많은 사람이 수많은 느낌과 생각을 담아 수많은 이야기책이나 그림책으로 다시 엮습니다. 어린이가 보는 영화로 나오기도 하는 《빨간 모자》예요. 그닥 길지 않은 옛이야기 하나가 씨앗이 되어 온갖 새이야기가 태어나는구나 싶고, 옛이야기 한 자락을 사람들이 두고두고 즐기면서 대물림하는구나 싶습니다.

 우리네 옛이야기 가운데에는 〈청개구리〉가 무척 널리 읽히고 익히 알려졌습니다. 이야기책으로든 그림책으로든 〈청개구리〉를 새롭게 엮곤 합니다. 그렇지만, 〈청개구리〉를 알차며 빛나는 만화영화나 어린이영화로 새롭게 빚으려 한다든지, 그림책이나 이야기책에 새멋이나 새맛을 담으려고 힘쓰지는 못하지 않느냐 싶습니다. 입에서 입으로 이어진 오래된 사랑과 삶을 제대로 읽지 못하는 한편, 한겨레 넋과 얼을 오늘 아이들한테 어떻게 나누거나 대물림하면 슬기로우면서 아름다울까를 헤아리지 못하는구나 싶어요.


.. 엄마가 심부름을 시킵니다. “이걸 숲 저편 할머니께 드리고 오겠니?” ..  (6쪽)


 이 나라 옛이야기를 살피거나 서양 옛이야기를 돌아보거나 일본이나 중국 옛이야기를 더듬으면, 이 옛이야기는 하나같이 시골마을이나 두메자락 삶을 다루곤 합니다. 도시나 커다란 마을에서 이루어진 옛이야기가 아예 없지는 않으나 몹시 드물다 할 만합니다. 여느 시골마을 여느 살림집에서 여느 사람들 복닥이는 조그마한 삶을 옛이야기로 삼아 대물림하곤 합니다.

 그림책 《빨간 모자》도 다르지 않습니다. 두메자락에서 조용히 살아가는 집에서 아버지는 나무꾼 노릇을 하고, 어머니는 집일을 건사하면서 딸아이한테 심부름을 시킵니다. 깊고 우거진 숲속에서 숱한 멧짐승을 두려워 할 만하지만, 어린 딸아이는 씩씩하게 홀로 심부름길을 떠나요.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서양에서 예부터 내려오는 옛이야기 《빨간 모자》에 나오는 어린이는 몹시 어립니다. 열 살이 채 안 되었지 싶어요. 열 살이 채 안 되었을 어린 아이한테 숲 저편을 다녀오라는 심부름을 시킵니다. 자가용도 자전거도 없이 두 다리로 숲을 가로질러야 하는 길이니, 퍽 오래 걸릴 테며 꽤 힘들다 할 수 있습니다. 날이 저물기 앞서 집으로 돌아와야 한다고 이야기하니까, 할머니 댁에까지 가는 데에만 한나절은 넉넉히 걸린다 하겠지요. 그러니까, 서너 시간쯤 걸어가서 볼일을 보고, 다시 서너 시간쯤 걸어서 돌아오는 길입니다.


.. 빨간 모자는 바구니를 들고 랄랄라 신나게 걸어갔어요. 시원한 그늘과 따뜻한 햇볕, 지저귀는 작은 새들과 버섯, 오랑캐꽃이 있는 숲에서 빨간 모자는 버찌와 딸기를 따서 먹었어요 ..  (8쪽)


 요즈음 아이들한테 꼭 한 시간만 걸어가서 딱 한 시간 다시 걸어서 돌아오는 심부름을 시킬 수 있을까 궁금합니다. 아니, 요즈음 아이들이 한 시간쯤 걷기라도 할 일이 있을는지 궁금합니다. 아이를 아기수레에 태우지 않고 걸리는 어버이는 얼마나 될까요. 아이를 자가용에 태우지 않고 어버이가 손을 잡고 함께 걷는 어버이는 얼마나 있을까요. 아이가 한참 걸어 다리가 아프기 때문에 안아 주다가는, 얼마쯤 지나 다리를 쉬었다 싶을 때에 다시 땅에 내려놓고 걸리는 어버이는 몇이나 있을는지요.

 자가용이 있으니까 ‘걸어서 오가는 심부름’을 시킬 까닭이 없다고 여길 만한가요. 버스를 타면 되지, 뭐 하러 걸어서 다니느냐고 생각할 만한가요.


.. 빨간 모자는 한참 놀다가 갑자기 엄마 말씀이 생각나서 가던 길을 재촉했어요. 하지만 데이지꽃을 어떻게 그냥 지나치겠어요? 빨간 모자는 두 손 가득 꽃을 꺾었어요. 가는 내내 이것도 먹어 보고 저것도 꺾어 보고 하나는 입에 넣고 하나는 바구니에 담고 ..  (10쪽)


 〈청개구리〉이든 《빨간 모자》이든 줄거리는 그리 대수롭지 않다고 느낍니다. 아이들한테 줄거리를 알리려고 이러한 옛이야기를 들려준다고는 느끼지 않아요. 옛이야기 줄거리를 줄줄 꿰거나 옛이야기 가르침을 깊이 아로새겨야 한다고도 느끼지 않습니다. 그예 옛이야기를 즐기면서 옛이야기가 이루어지던 옛사람 옛삶을 가만히 느끼며 가슴으로 담으면 즐거운 노릇이라고 생각해요.

 어린 ‘빨간 모자’는 심부름이 싫지 않습니다. 아니, 빨간 모자는 심부름이 반갑습니다. 빨간 모자가 좋아하는 할머니도 만나고, 심부름길에 이 놀이와 저 놀이를 마음껏 즐기거든요. 숲에서는 어머니 눈치를 안 보면서 오래오래 뛰놀아도 됩니다. 옷에 흙이 묻든 말든 뒹굴 수 있고, 흙이 좀 묻었으면 털면 돼요. 옷이 지저분해졌다면 어머니하고 냇가에 가서 신나게 빨래를 하면서 물놀이를 합니다.

 모든 삶이 놀이가 되면서 일입니다. 모든 일이 놀이가 되면서 삶입니다.

 다만, 옛이야기 《빨간 모자》에 나오는 아이는 어머니 말씀을 까맣게 잊은 나머지 목숨을 잃습니다. 할머니마저 목숨을 잃습니다.

 어쩔 수 없어요. 지난날 숲에서는 멧짐승이나 들짐승한테 잡아먹히는 일이 곧잘 일어나니까요. 아이뿐 아니라 어른까지 범한테든 늑대한테든 잡아먹힐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옛이야기 《빨간 모자》는 ‘그러니까, 어머니 말씀을 잘 들으라구!’ 하는 뜻으로 읽히거나 생각하면 될까요. ‘그러게, 그 아슬아슬한 숲길에서 심부름을 시키는 멍청한 어머니가 어디 있어!’ 하는 뜻으로 곱새기면 될까요.


.. 달고 맛있는 체리 하나는 햇볕을 위해서, 또 하나는 내가 좋아하는 할머니를 위해서, 또 하나는 용감한 시냥꾼 아저씨를 위해서, 마지막 하나는 빨간 모자를 위해서 ..  (40쪽)


 우리 집 네 살 아이는 그림책 《빨간 모자》에 나오는 앙증맞은 그림을 좋아합니다. “한 줄 명작 동화”라는 이름에 걸맞게 글 한 줄마다 꼬마그림을 한 줄씩 길다랗게 붙입니다. 글로 살을 붙인 옛이야기가 아닌, 그림으로 살을 붙이면서 ‘빨간 모자라는 아이 삶과 발자국과 움직임’을 더 찬찬히 들여다봅니다. 빨간 모자가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어떤 모양이요 어떤 이야기인가를 조곤조곤 마주하도록 이끕니다.

 자가용은커녕 텔레비전이나 전기조차 없는 깊은 숲속 빨간 모자는 들꽃을 보면서 기뻐합니다. 들딸기를 마음껏 따먹으면서 집식구를 생각합니다. 파란 빛깔 하늘을 머리에 이고 푸른 빛깔 들판을 두 다리로 밟습니다. 착하면서 예쁘게 일구는 삶을 할머니와 어머니한테서 물려받습니다. 씩씩하며 다부지게 가꾸는 온몸을 할아버지와 아버지한테서 이어받습니다.

 숲은 봄부터 겨울까지 노상 다른 빛깔과 이야기입니다. 눈이 녹으면서 차츰 푸른빛으로 바뀌는 멧자락 숲은 새로 움트는 고운 목숨들이 있어 사람들 누구나 고운 목숨을 고맙게 잇는 줄 느끼도록 합니다. 한껏 푸른빛을 뽐내는 여름을 지나 겨우내 즐거이 먹을 갖은 곡식과 열매를 거두어들이는 가을에는 새삼스러운 가을빛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살뜰히 보여줍니다. 온통 하얗게 바뀌는 겨울에는 조그마한 집 하나를 아끼는 매무새를 북돋우고, 집식구가 도란도란 길디긴 이야기꽃을 피우면서 따스히 보내는 꿈을 키웁니다.

 사랑스러운 터에서 사랑스러운 사람과 사랑스러운 이야기를 나누면서 사랑스러운 삶을 다스립니다. 언제나 사랑꽃이 피기 때문에 옛날 옛적 사람들은 오순도순 어우러지면서 이야기열매를 맺어 대물림합니다. 두 다리로 걷고 두 팔로 일하면서 땀흘리는 나날을 옛이야기 한 자락에 살포시 담아 물려줍니다.

― 한 줄 명작 동화 2 : 빨간 모자 (엠마누엘라 부솔라티 그림,로베르토 피유미니 글,김윤화 옮김,꼬마media2.0 펴냄,2004.6.18./7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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