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편 이인(里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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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편 이인(里仁)
  • 이우재
  • 승인 2010.02.22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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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편 이인(里仁)

1, 子曰 里 仁爲美. 擇不處仁 焉得知.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사람이 머무는 곳은 인(仁)을 아름답게 친다. 골라 머물기를 인에 처하지 않는다면 어찌 지혜로운 자라고 할 수 있겠는가?”

  <해설> 里 仁爲美는 보통 里仁爲美로 붙여 읽는다. 그러나 다산은 里에서 끊어 읽을 것을 주장하고 있다. 여기서는 다산을 따라 해설하기로 한다. 이(里)는 다산에 의하면 사람이 머무는 곳이나, 주거(住居)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부처 안에서 산다, 예수 안에서 산다 할 때의 그 산다는 것과 같은 의미다. 즉 사람은 항상 인(仁)에 머물며 살아야 한다는 뜻이다.
  주자는 里仁爲美로 붙여 읽는다. 里仁은 마을의 풍속이 어질고 도타운 것이다. 주자를 따라 해석한다면 “마을이 풍속이 어진 것이 아름다우니, 그러한 어진 곳을 골라 살지 않는다면 어찌 지혜로운 자라 할 수 있겠는가?”가 된다.

2, 子曰 不仁者不可爲久處約, 不可以長處樂. 仁者安仁 知者利仁.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어질지 못한 자는 곤궁한 생활을 오래 견디지 못하며, 즐거움도 오래 누리지 못한다. 어진 자는 인(仁)에 안주하며, 지혜로운 자는 인(仁)을 이용한다.”

  <해설> 약(約)은 곤궁한 것이다. 안(安)은 안주(安住)하는 것이다.
  어진 자는 곤궁하거나 부유함에 구애받지 않으며 따라서 자신의 본분을 잃는 일도 없다. 그러나 어질지 못한 자는 곤궁하면 참람하여 차마 하지 못하는 일이 없게 되고, 즐거우면 방탕해진다.
  어진 자는 자신이 이미 인(仁)과 하나가 되었으므로, 인(仁) 속에서 편안함을 얻으며, 한시도 인(仁)을 벗어나려 하지 않는다. 지혜로운 자는 자신과 인(仁)이 하나는 되지 못했지만, 인(仁)의 좋음을 아는 까닭에 인(仁) 속에서 많은 이득을 얻는다.

  <참고> 옹야 21, 자한 28, 헌문 30에서도 인자(仁者)와 지자(知者)를 대비하여 말하고 있다.
  
3, 子曰 惟仁者 能好人 能惡人.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오직 어진 사람만이 능히 사람을 좋아할 수 있고, 능히 사람을 미워할 수 있다.”

  <해설> 어진 자는 사랑을 바탕으로 항상 남과 더불어 어울려 살려고 하는 사람이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사사로운 감정을 갖고 사람을 대하지 않는다. 어진 자는 항상 공동선(共同善)의 관점에서 사람을 판단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의 옳고 그름을 제대로 판단할 수 있으며, 능히 사람을 좋아하고 미워할 수 있다.

  <참고> 자로 24에 선한 사람이 좋아하고 악한 사람이 미워하는 사람이 되라는 말이 있다.
  위령공 27에서는 “뭇사람들이 미워하더라도 반드시 살펴보아야 하며, 뭇사람들이 좋아하더라도 반드시 살펴보아야 한다.”라고 하고 있다.

4, 子曰 苟志於仁矣 無惡也.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진실로 인(仁)에 뜻을 둔다면 남을 미워하지 않을 것이다.”

  <해설> 구(苟)는 성(誠)이다. 오(惡)는 남을 미워하는 것이다.
  인(仁)은 사람에 대한 사랑을 전제로 한다. 바로 앞 장에서 오직 어진 자만이 사람을 좋아하고 미워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진정 인(仁)에 뜻을 두었다면 남을 미워하기에 앞서 그 사람을 안타깝게 여기는 마음을 먼저 가질 것이다. 인자(仁者)의 사람에 대한 사랑을 강조한 말로 앞 장과 맥락을 같이하고 있다. 
  주자는 오(惡)를 악(惡)으로 읽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진실로 인(仁)에 뜻을 둔다면 나쁜 짓을 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인(仁)을 너무 소극적으로 해석하여 읽는 맛이 줄어든다. 
 
5, 子曰 富與貴 是人之所欲也. 不以其道得之 不處也. 貧與賤 是人之所惡也. 不以其道得之 不去也. 君子去仁 惡乎成名. 君子無終食之間違仁 造次必於是 顚沛必於是.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부귀는 사람마다 원하는 바이나, 정당한 방법으로 얻은 것이 아니면 거기에 머물러 있지 않는다. 빈천은 사람마다 싫어하는 것이지만, 부당하게 그렇게 되었다 하더라도 애써 벗어나려 하지 않는다. 군자가 인(仁)을 떠나서 어찌 군자라는 이름을 이룰 수 있겠는가? 군자는 밥 한끼 먹는 동안이라도 인(仁)에서 벗어나지 않으니, 경황이 없을 때도 그러며, 위급한 경우에도 그렇다.”

  <해설> 不以其道得之는 마땅히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 그렇게 되는 것을 말한다. 즉 자신의 학문과 덕행에 의해 부귀나 빈천이 결정되지 않고 무언가 다른 요인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종식지간(終食之間)은 밥 한끼를 먹는 동안이다. 조차(造次)는 다급하여 경황이 없는 것이고, 전패(顚沛)는 엎어지고 넘어져 위급한 것이다.
  군자가 부귀, 빈천에 연연해하지 않는 것은 오로지 인(仁)을 이루는 데만 뜻이 있기 때문이다. 부귀, 빈천은 인(仁)을 이루는 것과는 아무 관계없는 ‘내 몸 밖의 물건(身外之物)’일 뿐이다. 그러나 군자는 부당한 부귀로부터는 당장 벗어나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죄악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부당한 빈천으로부터는 그것 때문에 고통을 겪는다 하더라도 애써 떠나려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나의 잘못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군자는 거친 밥에 물을 먹고도 즐거움을 누릴 수 있으며, 불의의 부귀를 뜬구름과 같이 여길 수 있는 것이다(飯疏食飮水 曲肱而枕之 樂亦在其中矣 不義而富且貴 於我如浮雲―술이 15).
  다산의 『논어고금주』는 不以其道得之의 得之에 대하여 앞의 것은 得處之, 뒤의 것은 得去之로 풀이하고 있다. 각기 바로 뒤의 不處也, 不去也의 처(處), 거(去)가 생략된 것으로 읽고 있는 것이다. 정당한 방법으로 머물게 된 부귀가 아니면 거기에 머물지 않으며, 정당한 방법으로 벗어나게 된 빈천이 아니면 거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뜻이다.
 
6, 子曰 我未見好仁者 惡不仁者. 好仁者 無以尙之. 惡不仁者 其爲仁矣. 不使不仁者加乎其身. 有能一日用其力於仁矣乎. 我未見力不足者. 蓋有之矣 我未之見也.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나는 인(仁)을 좋아하는 자와 어질지 못함을 미워하는 자를 아직 보지 못하였다. 어진 자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거니와, 어질지 못함을 미워하는 자도 인(仁)을 행하고 있는 것이다. 어질지 못한 것이 자신의 몸에 범접하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능히 하루라도 인(仁)에 그 힘을 쓸 수 있겠는가? 나는 아직 그렇게 할 힘이 부족한 사람을 보지 못하였도다. 혹시 있을 수도 있지만 나는 아직 보지 못하였다.”

  <해설> 상(尙)은 더하는 것(加)이다.
  인(仁)은 인간이 가져야 할 최고의 덕목이다. 인(仁)을 좋아하는 자는 인(仁) 속에 안주할 수 있는(安仁) 사람으로, 인간으로서 더 이상 오를 수 없는 최고의 경지에 이른 사람이다. 그러나 비록 인(仁)을 좋아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어질지 못함을 미워하면, 어질지 못한 것이 내 몸 가까이 이르지 못하게 하니 비록 소극적일지언정 인(仁)을 행하는 것이 된다.
  인(仁)이 먼 데 있는 것은 아니다. 바로 자신의 마음 속에 있는 것이다. 인(仁)에 뜻을 두면 바로 인(仁)을 행할 수 있다(仁遠乎哉 我欲仁 斯仁至矣―술이 29). 인간이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할 수 있는 힘이 부족한 사람이 혹시 있을 수도 있다고 한 것은 그러한 사람을 보지 못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강조하기 위한 말이다.

7, 子曰 人之過也各於其黨. 觀過 斯知仁矣.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사람의 잘못이 각각 그 무리에 따라 유형이 다르니, 그 잘못을 보면 그 인(仁)을 알 수 있다.”
 
  <해설> 당(黨)은 무리(類)다. 사(斯)는 즉(則)이다.
  사람은 타고날 때의 성품은 서로 큰 차이가 없으나, 그 후의 습관에 의해 서로 멀어진다(性相近也 習相遠也―양화 2). 군자의 수업을 받고 군자와 어울리면 자연 군자의 풍모가 나오며, 소인의 수업을 받고 소인과 어울리면 절로 소인이 된다. 군자는 사람을 사랑함이 너무 두터우며, 소인은 너무 각박하다. 그것이 군자와 소인의 허물이다. 그 허물됨을 보면 그 사람의 어진 정도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주자의 설(說)을 따랐다.
  고주의 공안국은 다르게 풀이한다. “소인이 군자의 행동을 하지 못하는 것은 소인의 허물이 아니다. 마땅히 용서하고 책망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잘못을 본다는 것은 현명한 사람, 어리석은 사람으로 하여금 각각 제자리에 서게 하는 것이다. 그것이 인(仁)을 행하는 것이다.” 즉 남의 잘못을 책망할 때, 그 사람이 군자냐 소인이냐를 먼저 살펴 각각 그 무리에 따라 달리하는 것이 인(仁)을 행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8, 子曰 朝聞道 夕死可矣.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세상에 도(道)가 행해지고 있다는 소리를 아침에 들을 수 있다면, 저녁에 죽더라도 좋다.”

  <해설> 도(道)는 世之有道로 세상에 도가 행해지는 것이다. 무도한 세상에 태어나 얼마나 도가 행해지는 세상에 대한 염원이 컸으면 공자가 이런 말을 따랐을까? 고주를 따랐다.
  주자의 신주에서는 “아침에 도를 듣는다면 저녁에 죽더라도 좋다.”로 해석한다. 우리에게 익숙한 해석이다. 그러나 주자에 따르면, 공자가 마치 보리수나무 아래 앉아 득도(得道)를 염원하고 있는 석가처럼 생각된다. 주자의 성리학에 반영된 중국 선종(禪宗)의 영향을 여기서도 읽을 수 있다고 말하면 필자의 상상이 너무 지나친 것일까?

9, 子曰 士志於道 而恥惡衣惡食者 未足與議也.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선비가 도에 뜻을 두고서도 거친 옷과 거친 밥을 부끄러워한다면 더불어 의논할 바가 없다.”

  <해설> 군자는 ‘내 몸 밖의 물건(身外之物)’에 연연해하지 않는 법이다.

10, 子曰 君子之於天下也 無適也 無莫也. 義之與比.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군자는 천하의 모든 것에 대하여 꼭 해야 하는 것도, 하지 말아야 하는 것도 없다. 오로지 의(義)로써 비교하여 할 뿐이다.”

  <해설> 적(適)과 막(莫)에 대해서는 해설이 분분하다. 황간의 『논어의소』에 인용된 범녕(范甯)의 설(說)에 의하면 후(厚)하고 박(薄)한 것, 일본의 오규소라이(荻生徂徠)의 『논어징(論語徵)』에 의하면 친(親)하고 소(疎)한 것이다.
  그러나 당(唐)의 한유(韓愈)는 『논어필해(論語筆解)』에서 적(適)은 가(可), 막(莫)은 불가(不可)라고 하고 있다. 주자의 신주(新注)에 인용된 글에서 송(宋)의 사량좌(謝良佐)도 적(適)을 가(可), 막(莫)을 불가(不可)로 해석하고 있으며, 다산(茶山)의 『논어고금주(論語古今註)』도 같은 입장이다. 또 미자 8에도 無可無不可라는 표현이 있다. 여기서는 이 주장을 따랐다. 비(比)는 비교하는 것으로 義之與比는 의(義)로써 비교하여 옳으면 행하고 옳지 않으면 행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참고> 미자 8.

11, 子曰 君子懷德 小人懷土. 君子懷刑 小人懷惠.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군자가 덕에 의한 정치로 돌아가면 소인은 자기 땅으로 돌아가며, 군자가 형벌에 의한 정치로 돌아가면 소인은 외국의 자혜(慈惠)로운 임금에게로 돌아간다.”

  <해설> 회(懷)는 귀(歸)로 돌아가는 것이다. 토(土)는 자기가 원래 살던 곳이며, 혜(惠)는 외국의 자혜로운 임금이다. 여기서 군자는 위정자, 소인은 백성을 뜻한다. 형벌보다는 덕에 의지하여 백성을 다스릴 것을 주장한 말이다. 유월(兪樾)의 『군경평의(羣經平議)』에 의거했다.
  그러나 주자의 해석은 이와 다르다. 주자는 “군자는 덕을 생각하고 소인은 땅을 생각하며, 군자는 형벌을 생각하고 소인은 이익을 생각한다.”로 풀이한다. 즉 군자는 덕(德)과 형벌(刑)을 생각하고, 소인은 땅(地)과 이익(惠)을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위정 3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공자가 평소 덕에 의한 정치를 주장하였지, 형벌에 의한 정치는 배척하였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주자의 해석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또 고주의 공안국은 회(懷)를 안(安)으로 풀이하고 있다. 군자가 덕에 안주하면 소인은 그 땅에 안주하며, 군자가 법에 안주하려 한다면 소인은 물질적인 은혜나 생각한다는 뜻이다.
  
12, 子曰 放於利而行 多怨.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이익을 좇아 행동하면 원망이 많다.”

  <해설> 방(放)은 고주의 공안국에 의하면 의지하는 것(依)이다.
  이익을 쫓으면 필연적으로 남과 다투게 된다. 따라서 남의 원망을 사는 일이 많아진다. 이익을 놓고 남과 경쟁하는 것을 사회의 기본 원리로 간주하는 자본주의 사회가 점점 더 각박해질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13, 子曰 能以禮讓爲國乎 何有. 不能以禮讓爲國 如禮何.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예와 겸양으로 나라를 다스릴 수 있다면 무슨 어려움이 있겠느냐? 예와 겸양으로 나라를 다스릴 수 없다면 예는 해서 무엇하겠느냐?”

  <해설> 예양(禮讓)은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예(禮)다. 하유(何有)는 무슨 어려움이 있느냐의 뜻이다.
  위정자가 어진 덕을 쌓고 예로서 나라를 다스린다면 온 나라가 태평해질 것이다. 결코 법과 형벌에만 의지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14, 子曰 不患無位 患所以立. 不患莫己知 求爲可知也.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그 지위가 없음을 근심하지 말고 그 자리에 설 능력이 있을까를 근심하며,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근심하지 말고, 알아줄 만한 사람이 되도록 하여라.”

  <해설> 신주의 정자가 말하길 “군자는 그 몸에 있는 것을 구할 뿐이다(君子求其在己者而已矣).”라고 하였으니, 군자는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을 근심할 뿐, 벼슬이나 명성과 같이 자기 밖에 있는 것, 자기로부터 이루어지지 않는 것(身外之物)은 근심하지 않는다.

  <참고> 학이 16, 헌문 32, 위령공 18에도 같은 내용이 있다.

15, 子曰 參乎 吾道一以貫之. 曾子曰 唯. 子出. 門人問曰 何謂也. 曾子曰 夫子之道 忠恕而已矣.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증삼아! 나의 도는 하나로 일관되어 있느니라.”
  증자가 말하길 “그렇습니다.”
  공자께서 자리를 뜨시자, 문인들이 묻기를 “무슨 말입니까?‘
  증자가 말하길 “선생님의 도는 충과 서일 뿐입니다.”

  <해설> 삼(參)은 증자의 이름이다. 유(唯)는 그렇다고 승낙하는 말이다. 문인(門人)은 증삼과 같이 수학하는 공자의 제자들이다. 
  충(忠)은 주자에 의하면 자기 몸을 다하는 것(盡己之謂)을 말하며, 서(恕)는 자기 몸을 미루어 남에게 미치는 것(推己之謂)을 말한다. 황간(皇侃)의 『논어의소』에 인용된 왕필(王弼)의 해설에 의하면 충(忠)은 정(情)을 다하는 것(情之盡), 서(恕)는 정(情)을 돌이켜 남과 같아지는 것(反情以同物)이다. 혹자는 가운데 마음(中心)을 충이라 하고, 같은 마음(如心)을 서라고도 한다. 대개 같은 말이다. 즉 충은 자기의 몸과 마음을 다하는 성실함을 말하며, 서는 남을 자기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따라서 충서(忠恕)는 온 몸을 다하는 성실한 마음가짐으로 남도 자기 몸처럼 대하는 것으로, 다시 말하면 자기 몸을 사랑하는 마음을 미루어 남을 사랑하는 것(推自愛之心以愛人之謂) 즉 인(仁)을 말한다.

  <보충> 남송(南宋) 대에 주자(朱子)는 성리학(性理學)을 발전시키면서, 자신들의 학문적 법통(法統)을 공자―증자―자사(子思)―맹자로 이어지는 계보에서 찾았다. 주자는 증자가 공자의 학문적 법통을 이었다는 근거로 이 문답을 들고 있다.
  주자에 의하면, 증자는 공자의 일이관지(一以貫之)라는 말 속에서, 공자의 한가지 이치(一理)라는 것이 혼연일체(渾然一體)로 천하 만물에 두루 응(應)하고 타당한 것이며, 비유하자면 천지(天地)의 지극한 정성이 한순간도 쉬지 않고 만물을 제자리에 있게 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이것 이외에는 다른 법이 없으며, 또 미루는 것을 기다릴 것도 없는 것임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는 이것을 말로 표현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당시 학자들의 진기(盡己), 추기(推己)라는 말을 빌어 밝힘으로써 다른 사람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했다는 것이다.
  계속 주자에 의하면, 천지의 지극한 정성이 한순간도 쉬지 않는 것은 도(道)의 체(體)로, 천하 만물의 한가지 근본이다. 천하 만물이 제자리를 얻는 것은 도(道)의 용(用)으로, 한가지 근본에서 각각 나온 것이다. 이것으로 살펴보면 일이관지(一以貫之)의 실질을 가히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즉 주자는 충서(忠恕)가 공자의 일이관지(一以貫之)의 일(一)을 정확히 나타낸 말은 아니라고 본 것이다. 단지 증자가 공자의 도(道)를 한마디로 달리 표현할 수가 없어 그렇게 말했을 뿐이며, 증자가 공자의 일이관지(一以貫之)란 말 속에서 깨달은 것은 공문(孔門)에서 별도의 비전(秘傳)으로 전수되어, 자사, 맹자로 이어져 오다가, 오랫동안 끊어진 것이, 이정자(二程子, 程顥, 程頤 형제)와 자기에게서 다시 발현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주자의 이러한 해석은 무리가 많다. 우선 『사기』 「중니제자열전」에 의하면 증자는 공자보다 46살이나 어리다. 사기의 기록을 신뢰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선진 25에 증자의 아비인 증석(曾晳)이 공자의 제자로 나오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증자가 공자와 상당히 나이가 차이나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일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어린 그가 어찌 안연(顔淵)이나, 염옹(冉雍), 민자건(閔子騫), 자공(子貢) 같은 쟁쟁한 뭇 선배들을 제치고, 혼자만이 공자로부터 비전(秘傳)의 공부를 전수받을 수 있었겠는가? 또 이는  가르침에 차별을 두지 않는다(有敎無類―위령공 38)고 한 공자의 말과도 상충한다. 게다가 위령공 2에서 공자는 자공에게도 일이관지라는 말을 하고 있다. 그리고 또 한마디 말로 일생 동안 지킬 만한 것이 있느냐라는 자공의 질문에 그것은 바로 서(恕)라고까지 대답하고 있다(위령공 23). 증자의 말과 충(忠) 한 글자만 다를 뿐이다. 증자만이 공자의 비전을 전수받았다는 주자의 주장은 자신의 성리학(性理學)을 정당화하기 위한 견강부회(牽强附會)일 뿐이다.
  뿐만 아니라 주자의 주장은 부처가 자신이 고심 끝에 터득한, 세상의 어떤 말로도 나타낼 수 없는(不立文字), 오묘한 깨달음(心得)을 염화시중(拈華示衆)의 미소(微笑)로써 가섭(迦葉)에게 전하고, 그 비전의 가르침이 달마(達摩)를 거쳐 중국 선종(禪宗)으로 이어졌다는 불교의 설화와 너무도 흡사하다. 주자는 선종으로부터 중국 유학의 전통을 수호하기 위해 성리학을 세웠으나, 후대 청의 유학자들이 말하는대로 석씨지학(釋氏之學, 유학자들이 불교를 경멸하여 부르는 말로 釋迦牟尼의 석釋자에서 유래했다)으로 석씨지학을 비판한 격이 되고 말았다. 주자의 성리학은 공자의 말로 포장한 별개의 철학으로 보아야 하며, 그런 면에서 주자의 신주를 읽을 때 독자들의 각별한 주의가 요망된다고 하겠다.            
  충서(忠恕)는 말 그대로 공자의 사상 근저를 하나로 꿰뚫고 있는 근본 원리일 뿐이며, 그것은 나에 대해 최선을 다하는 그 정성으로 남도 나처럼 사랑하라는 뜻(仁) 외에 다른 별도의 형이상학적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다. 
 
  <참고> 위령공 2에서 공자는 자공에게도 일이관지(一以貫之)라는 말을 하고 있다.
 
16, 子曰 君子喩於義 小人喩於利.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군자는 의에 밝고, 소인은 이익에 밝다.”
 
  <해설> 유(喩)는 효(曉)로 밝은 것이다.

  <보충> 공자는 논어 안에서 자주 군자는 ~하고, 소인은 ~한다는 식으로, 군자와 소인을 대비하여 말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는 그 군자를 도덕적으로 바람직한 인간, 소인은 인격이 용렬한 자로서 이해한다. 그러나 공자가 말하는 군자와 소인을 단지 그렇게 도덕적인 의미로만 해석할 수 있을까?
  군자(君子)와 소인(小人)의 원래 의미는 앞에서도 언급한 바 있지만 분명히 계급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전자가 임금(君)의 자식(子)이라는 의미, 후자가 하찮은(小) 사람(人)이라는 의미의 글자로 이루어졌음을 볼 때 그것은 당연하다. 그러기에 청(淸)의 유월(兪樾)은 『군경평의(羣經平議)』에서 옛사람들이 군자, 소인이라고 말할 때는 모두 그 지위를 갖고 말하였다. 한(漢)나라 시대의 학자들도 모두 그렇게 말하였다. 그러나 후세의 유가(儒家)들은 오직 인품만을 갖고 군자, 소인을 논한다. 옛뜻에 어긋나는 것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그렇다면 공자는 군자, 소인의 개념을 어떻게 파악하고 있었을까? 공자가 군자, 소인을 일정 부분 계급적인 내용으로 파악하고 있었다는 증거는 논어 안에 여러번 보인다. 이인 11(君子懷德 小人懷土 君子懷刑 小人懷惠), 안연 19(君子之德風 小人之德草 草上之風必偃), 양화 4(君子學道則愛人 小人學道則易使也 … )에서 보이는 군자, 소인의 개념이 바로 그것이다. 여기서 군자, 소인은 분명히 위정자와 백성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다른 많은 곳에서는 군자, 소인이 주로 인품과 관련된 의미로 사용되고 있기도 하다. 이런 사실로 미루어 볼 때, 공자 이전 계급을 나타내는 말로 사용되어 왔던 군자, 소인이, 공자 당대에 이르러서는 본래의  의미가 많이 퇴색되고 사람의 인품과 관계되는 것으로 전화되어 가는 단계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위와 관련하여 중국의 조기빈(趙紀彬)이 『논어신탐(論語新探)』(국내에는 『反논어』라는 이름으로 번역되었다)에서 펼친 주장은 새로운 단초를 열어주고 있다. 조기빈은 소인을 고대 노예사회가 철기 등의 도입에 따른 생산력 발전의 결과로 붕괴되면서, 부의 축적을 통해 새롭게 등장하기 시작한 신흥지주계급으로 보고 있다. 그에 의하면 이들이 중국의 중세 봉건사회(秦漢帝國)를 열어 간 역사발전의 주체이며, 그들의 정치경제적 입장은 묵가(墨家)를 거쳐 법가(法家)에 이르러 완성되어 중국의 통일과 발전을 가져왔다. 그에 반하여 공자의 입장은 역사 발전의 반동(反動)으로서, 기존 노예 소유 계급의 이익을 대변하여 노예제 사회를 온존시키고 생산력과 역사의 발전을 저해하였다. 공자의 이러한 정치경제적 입장은 소위 복례(復禮)노선으로 집약되며, 그것은 다름아닌 군자(君子) 계급의 정치경제적 입장이라는 것이다. 조기빈은 군자를 노예 소유 계급으로 보고 있다.
  조기빈의 주장은 군자, 소인이라는 용어의 구체적 실례나 당시 사회상에 대한 구체적 언급이 결여되어 있어서 그대로 다 인정하기에는 분명 무리가 있다. 또 문화대혁명 당시 비림비공(批林批孔)운동이 한창 치열하게 전개되던 때의 글들이라 지나치게 교조적이고 경직되어 있다는 느낌도 지울 수 없다. 그러나 조기빈의 주장은 적어도 군자, 소인이라는 용어를 단순한 도덕적인 내용으로서가 아니라, 당시 사회상과 연결하여 풀이하려 했다는 점에서 분명 진일보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군자, 소인을 말한 공자의 글을 자세히 읽어보면, 단순히 도덕적인 의미으로만 말하고 있는 듯한 곳에서도 그 이상의 사회적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우선 군자는 의(義)에 밝고 소인은 이(利)에 밝다는 이 장(章)이 바로 그렇다. 소인이 이익에 밝다는 것은 당시 이미 이익을 쫓는 풍조가 일반화되었음을 뜻한다. 이는 다시 말하면 함께 노동하고 함께 생활하는 공동체적 질서가 이미 무너지고 있으며, 모든 사람이 먹고 살기 위한 생존경쟁에서 낙오하지 않으려고 남과 이익을 놓고 치열하게 다툴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군자는 의(義), 즉 공동체적 이념을 추구하는 사람, 소인은 이(利), 즉 생존경쟁에서의 승리를 위해 이익을 추구하는 사람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조기빈처럼 군자를 꼭 노예제 사회의 옹호자, 소인을 신흥의 지주 계급으로 도식화할 수는 없을지 몰라도, 이 말 속에서 공동체적 이념과 약육강식의 무한경쟁적 이념이 서로 충돌하고 있음은 살펴볼 수 있다.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방증은 논어의 도처에서 찾을 수 있다. 안연 16에서 “군자는 남의 좋은 점을 도와 이루게 하나, 나쁜 점은 이루지 못하게 한다. 그러나 소인은 그 반대이다.”라고 한 말도 사실 당시 생존경쟁의 치열함과 그 과정에서의 군자와 소인의 입장의 차이를 나타낸 말로 볼 수 있다. 또 자로 4에서 공자는 농사 짓는 법에 대해 묻는 번지(樊遲)에 대해 소인이라고 질책하고 있다. 번지는 당시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있는 농업에 대한 관심을 표명한 것 뿐이리라. 그런 그를 공자가 소인이라 책망한 것 또한 이러한 사회상이 반영된 것이라 할 수 있다. 헌문 24에는 “군자는 위로 통달하고 소인은 아래로 통달한다.”는 말이 있다. 아래라는 것이 이익(利益)을 뜻한다는 데에는 대부분의 주석이 일치한다.                  

17, 子曰 見賢思齊焉 見不賢而內自省也.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어진 사람을 보면 그와 같이 되려고 생각하고, 어질지 못한 이를 보면 스스로 마음 속에서 반성해야 한다.”

  <해설> 思齊는 그와 같이 될 것을 생각하는 것이다.

  <참고> 술이 21에는 “세 사람이 함께 가면, 그 중에는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으니, 좋은 면을 골라 그것을 따르고, 좋지 않은 것에서는 나의 허물을 고친다.”라는 말이 있다. 
 
18, 子曰 事父母 幾諫. 見志不從 又敬不違 勞而不怨.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부모를 섬길 때는 드러내지 않고 은근하게 간해야 하며, 부모가 따르지 않을 뜻임을 보이더라도 더욱 공경하여 거스르지 말아야 하고, 수고롭더라도 원망하지 말아야 한다.”

  <해설> 기간(幾諫)은 미간(微諫) 즉 드러내지 않고 은근하게 간하는 것이다. 勞而不怨은 부모가 자식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아 수고롭더라도 부모를 원망하지 말고 부모의 기분이 좋을 때를 기다려 다시 간하라는 말이다.
  청의 왕인지(王引之)는 『경의술문(經義述聞)』에서 勞而不怨의 노(勞)를 우(憂)로 해석하여 부모가 자식의 뜻을 따르지 않아 근심은 하지만 원망하지는 않는 것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또 다산 정약용은 見志不從을 자식이 부모의 명을 따르지 않을 것임을 은근히 보이는 것이라고 반대로 해석하고 있다. 다산에 의하면 그렇게 하면서도 부모를 더욱 공경하여 언젠가 부모가 스스로 깨닫게 되기를 기다리라는 뜻이다.
 
19, 子曰 父母在 不遠遊. 遊必有方.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부모가 살아 계실 때에는 멀리 나가지 말아야 하며, 나갈 때에는 반드시 가는 곳을 밝혀 두어야 한다.”

  <해설> 방(方)은 다산에 의하면 소(所)로 장소이다. 부모가 살아 계실 때에는 너무 멀리 여행하지 말아야 하며, 만일 어디 나갈 일이 있을 때에는 반드시 가는 곳을 알려 주어 부모로 하여금 걱정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말이다. 고주의 정현(鄭玄)은 방(方)을 상(常)으로 풀이하여 어디 나갈 때는 늘 다니던 곳으로만 다니라는 뜻으로 해석하고 있다.
 
20, 子曰 三年無改於父之道 可謂孝矣.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삼 년 동안 부모가 하던 바를 고치지 않아야 가히 효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 학이 11에 같은 내용이 있다.

21, 子曰 父母之年 不可不知也. 一則以喜 一則以懼.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부모의 나이는 알아두어야 할 것이니, 한편으로는 그 오래 사심을 기뻐함이요, 한편으로는 그 늙어 가심을 두려워함이라.”

22, 子曰 古者言之不出 恥躬之不逮也.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옛사람이 말을 삼가한 것은, 그 행함이 못 미칠까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해설> 궁(躬)은 몸소 행하는 것이요, 체(逮)는 미치는 것이다.

  <참고> 말과 행동에 대해서는 학이 14, 위정 13, 이인 24, 헌문 29에도 비슷한 내용이 있다.
 
23, 子曰 以約失之者鮮矣.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검약하면 잃는 것이 적다.”

  <해설> 약(約)은 경제적으로 검소한 것을 뜻할 수도 있고, 말과 행동을 비롯한 모든 일에 삼가고 조심하는 것일 수도 있다. 후자가 더 맛이 깊다.

24, 子曰 君子欲訥於言 而敏於行.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군자는 말은 더디 하되, 행동은 민첩하게 하기를 원한다.”

  <해설> 눌(訥)은 말을 더디 하는 것이다.

  <참고> 학이 14, 위정 13, 이인 22, 헌문 29에도 비슷한 내용이 있다.

25, 子曰 德不孤 必有鄰.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덕이 있는 자는 외롭지 않으니, 반드시 이웃이 있다.”

  <해설> 덕이 있는 자는 반드시 그와 덕을 같이 하는 동류(同類)가 있어 외롭지 않은 법이다.

  <참고> 안연 5에는 “ … 군자가 공경하여 잘못을 저지르는 바가 없고, 남에게 공손하여 예를 지킨다면 온 세상 사람이 모두 형제입니다. … ”라는 말이 있다.

26, 子游曰 事君數 斯辱矣. 朋友數 斯疏矣.
  자유가 말하길 “임금을 섬김에 너무 자주 간언하면 오히려 욕을 보게 되고, 벗을 사귐에 너무 자주 충고하면 오히려 소원해진다.”

  <해설> 삭(數)은 번거롭게 자주 하는 것이다. 소(疏)는 소원한 것이다.
  도로써 임금을 섬기되 간하여 듣지 않으면 그만 두라 하였으니(以道事君 不可則止―선진 23) 그렇지 않으면 일신의 화를 부르게 된다. 벗을 사귈 때도 충고하여 올바른 길로 이끌되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그만두어 내 몸에 욕됨이 없게 하여야 한다(忠告而善道之 不可則止 無自辱焉―안연 23). 그렇지 못하면 오히려 벗을 잃고 만다.

  <보충>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유교의 충(忠)은 임금이 잘못할 경우, 죽음을 무릎쓰고서라도 임금에게 간언(諫言)해야 한다는 것이다. 임금에게 간언하다 목숨을 잃은 사람을 만고의 충신으로 숭상까지 하고 있다. 충(忠)은 모든 도덕적 항목 가운데 있와 더불어 으뜸을 차지하고 있으며, 함께 묶어 부를 때도 충효로 충이 효보다 먼저 불리워지고 있는 정도이다. 
  그런데 여기서의 공자의 말은 지금껏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과는 크게 다르다. 임금이 말을 듣지 않으면 그만두어 화를 면하라고 하고 있는 것이다. 공자는 자신의 제자인 남용이 나라에 도가 있으면 쓰일 것이요, 도가 없더라도 형벌은 면할 것이라고 하면서, 자신의 조카를 시집보낸 바 있으며(공야장 1), 선진 23에서는 도로써 임금을 섬기되, 안되면 그만두라(以道事君 不可則止)고 말하고 있다. 충(忠)을 중요하게 취급하고는 있으나, 효제(孝弟)와 같은 정도의 비중을 두고 있지는 않은 것이다.
  원래 공자는 효제(孝弟)를 군주에 대한 충성(忠誠)보다 우선시하였다. 누차 말했지만 공자가 살던 주나라의 정치 제도는 주왕실이 종가(宗家)이고 각 제후는 주왕실의 지족(支族)이라는 종법(宗法)에 입각한 것이었다. 성이 다른 제후국의 경우는 동성의 분가한 제후국을 의제(擬制)하였다. 각 제후국 밑에는 의연 이전부터 존재하던 혈연공동체가 자리잡고 있었다. 사회 전체의 기초 단위는 이 혈연에 기초한 공동체였으며, 이 공동체는 국가 권력으로부터 그 특수성을 인정받아 자신들만의 고유한 관습과 전통을 유지하고 있었다. 효제는 이 혈연에 기초한 공동체를 유지하는 기본 질서였다. 뿐만 아니라 효제는 종법을 유지시키는 근거이기도 했다. 따라서 공자에게 있어서 군주에 대한 충성이란 종족 내의 효제(孝弟)의 외형적 연장에 불과한 것이었다. 공자는 효제가 국법 질서에 우선함을 자로 18의 섭공(葉公)과의 대화에서도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러나 전국 시대가 지나고 진한(秦漢)의 통일 제국 시대를 맞으면서 상황은 변하기 시작했다. 이미 혈연공동체는 파괴되어 가족(家族)이 별도의 단위로 독립하기 시작했다. 중앙 권력은 종전의 공동체를 매개로 한 통치에서 벗어나 직접 개별 가족, 즉 개별 인민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공동체적 특수성은 부정되었으며, 따라서 효제(孝弟)도 당연히 국가 질서 속에서 새롭게 자리매김되어야 했다.
  한(漢) 대의 유가들은 이러한 상황의 변화에 직면하여 새로운 논리를 전개하기 시작했다. 종족 내의 효제(孝弟)는 가족 내의 가부장적인 효자(孝慈)로 변질되었고, 더 나아가 군주, 윗사람에 대한 공순(恭順)으로 발전하였다. 임금은 모든 백성의 어버이로 임금에 대한 충성은 가장 큰 효로 간주되었다. 이럼으로써 충(忠)과 효(孝) 사이의 모순은 해결되었으며, 충이 효보다 상위의 개념으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한 대 유가(儒家)들의 이러한 변화를 바탕으로 유교(儒敎)는 국교(國敎)로 채택될 수 있었으며, 이후 1911년 신해혁명(辛亥革命)에 이르기까지 이천 년이 넘게 중국의 정치, 사상계를 지배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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