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님처럼 찾아온 야생 족제비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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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처럼 찾아온 야생 족제비 가족
  • 이세기
  • 승인 2022.09.30 06: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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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기의 손바닥소설 - 북창서굴]
(16) 족제비 가족
감나무를 타는 족제비

눈이 휘둥그레졌다. 귀도 쫑긋 세웠다. 해 저문 저녁 마당에서 이상한 쥐 소리가 나서 내다보니 긴 꼬리를 가진 괴물체가 화단을 뛰어다니고 뒹구는 것이 아닌가. 웬 짐승이 이 밤중에 와서 이리 야단법석인가 하고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상한 조짐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며칠째 아침에 일어나보면 화단의 꽃대가 쓰러져있고 마당 한구석에 정체 모를 구멍이 움푹 파여 있었다. 쥐구멍보다는 제법 큰 구멍이었다. 영문도 모른 채 아침에 일어나 감나무 아래 새롭게 뚫린 구멍을 막았다.

구멍에다 돌을 넣고 흙을 다져 넣으면 여지없이 다음 날 그 옆쪽에 새로운 구멍이 나 있었다. 숨바꼭질이 따로 없었다. 파인 구멍을 보고 있자니 별의별 생각이 들었다. 집에 능구렁이라도 들어온 것이 아닌가? 두더지인가? 상상만으로도 온몸이 오싹했다.

처음엔 이 낯선 손님의 정체를 두고 설왕설래했다. 쥐는 아니고 너구리도 아니었다. 한 쌍의 부부와 새끼로 보이는 무리가 사방의 경계를 무시하고 화단에서 뒹굴고 뛰어놀다가 감나무에 오르고 냅다 담을 탔다. 그 낯선 손님은 다름 아닌 족제비 가족이었다. 도심에 야생에서나 볼 수밖에 없는 족제비라니, 신기할 수밖에 없었다.

손바닥만 한 숲 그늘이 드리워진 마당에 찾아오는 것은 비단 족제비만은 아니었다. 비가 많이 오는 장마철에는 감나무로 흰 뺨을 한 박새나 지빠귀가 비를 피하고자 날아들었다. 부리로 날개깃을 고르며 나뭇가지에 깃을 묻고 앉아있는 모습은 처량하다 못해 처연하기만 했다. 그것을 뭐라고 할까. 치욕스러운 하루를 보내고 안으로 삭이는 모습이었다.

어떤 무리는 잠을 자기 위해 왔다. 집 마당에 자주 찾아오는 잠자리가 있었다. 고추잠자리인데 저녁이 되면 어김없이 꽃대 가지에 매달려 잠을 잤다. 어찌나 고요하게 매달려 곤한 잠을 자던지, 인기척에도 꿈쩍하지 않는 모습이라니! 이 선하게 생긴 손님은 마치 세상의 소요에도 삼매에 든 돈오선(頓悟禪) 같았다. 퇴근길에 지친 나를 빙그레 미소 짓게 했다. 원시의 숨구멍을 느꼈다.

이렇게 하여 이러저러한 인연이 되어 집에 뭇짐승과 곤충들이 찾아오는 적적한 날이면 여간 반갑지 않았다. 그럴 때면 생명에 무게가 없다는 생각이 스며든다. 뭇 생명이 거리를 헤매다 숲이 있는 집까지 찾아와 놀다 쉬다 간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즐거운 일이었다.

족제비 가족은 집 마당에서 행복한 듯 한밤중 내내 온통 헤집으며 노닐었다. 그렇게 일주일을 마당에서 놀았던 족제비가 보이지 않으면 이내 상심했다. 오지 않는 족제비 가족이 예의 그 오디를 닮은 눈을 하곤 목과 긴 꼬리를 세우고 나타날 것을 기다렸다. 언제 다시 나타날지 온통 신경이 쓰였다. 호동그란 눈을 뜨고 유리창 밖을 보는 날이 많았다.

그후로도 상사화가 필 무렵 매년 족제비가 찾아왔다. 황갈색 몸에 흰 콧등과 흰 발을 내보이며 나무와 담을 타는 모습은 볼수록 앙증맞았다. 잠시지만 황홀한 즐거움을 줬다. 그러다 이삼 일 지나 아니면 가을이 여름을 이길 무렵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족제비가 사라진 유리창 너머 텅 빈 소란이 멈춘 마당은 어둠만이 적요하게 빛났다. 이런 날이면 나는 족제비의 땅을 무단으로 점거하고 있거나 세를 들어 사는 것이 아닌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왜 중요하고 마땅히 있어야 할 것들은 모두 거처에서 이탈하거나 떠나야만 하는지, 머리끝까지 슬픈 마음이 차올랐다.

어스름 저녁에 찾아왔던 족제비 가족이 이러구러 두 해째 소식이 없다. 파초가 서 있는 마당귀는 한없이 쓸쓸하기만 하다. 오늘 밤에도 족제비 가족은 도시의 어둠을 뚫고 어느 뒷골목을 쏜살같이 쫓기듯 도망가고 있을 것이다.

 

파초가 보이는 마당
파초가 보이는 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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