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겨진 학익동의 근대유산 - 소년형무소 관사, 일본농약, 제국제마 사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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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겨진 학익동의 근대유산 - 소년형무소 관사, 일본농약, 제국제마 사택
  • 배성수
  • 승인 2022.10.11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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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성수가 바라보는 인천 문화유산]
(18) 배성수 / 시립박물관 전시교육부장

인천은 유독 근대유산이 많은 도시다. 조선의 세 번째 개항장으로 비교적 일찍부터 근대문물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인천의 근대유산은 개항장이었던 중구와 동구 일대에 많이 분포한다. 그러나 개항장에서 멀리 떨어진 미추홀구 학익동에도 근대기에 형성된 문화유산이 남아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2019년 철거된 소년형무소 일본인 간수 관사
2019년 철거된 소년형무소 일본인 간수 관사

■ 소년형무소 조선인 간수 관사

학익동은 조선시대 인천도호부 관아가 있던 문학동 서쪽에 위치한 작은 마을로 근대에 들어서도 농촌의 모습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학익동에 변화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한 것은 조선총독부 법무국에서 개성과 김천에 이어 세 번째 소년형무소를 이곳에 두기로 결정한 1935년부터다. 당시 총독부는 지금 법원과 검찰청, 그리고 인천구치소 일대 5만5천 평 부지에 700명의 소년범을 수용할 수 있는 형무소 건설에 들어가 1938년 3월 낙성식을 열고 소년범을 수용했다. 그와 함께 형무소 동북쪽 언덕 학익동 5번지 일대로 형무소장을 비롯한 일본인 간수들의 관사촌을 조성했다.

당시 지어진 관사는 모두 14동으로 소장과 주임과 판임관 관사 9동은 단독 관사였고, 간수부장 관사 2동과 간수 관사 3동은 2호연립 관사였다. 단독 관사는 1개 동에 한 가구가 거주하는 형태, 연립 관사는 하나의 건물을 벽으로 나누어 두 개 이상의 가구가 거주하는 형태를 말한다. 형무소 건물과 관사촌은 동시에 조성되었는데 그 후 형무소 동남쪽 학익동 36번지 일대로 조선인 하급 간수 관사가 추가로 들어섰다. 간부나 일본인 간수 관사에 비해 시설이 열악해서 10호연립 관사가 3동씩 2열로 배치되어 모두 여섯 동이 지어졌으며, 건물 내에 화장실이 없어 건물과 건물 사이에 공동화장실을 두었다.

 

1947년 소년형무소 조선인 간수 관사 항공사진
1947년 소년형무소 조선인 간수 관사 항공사진
소년형무소 조선인 간수 관사 현재 모습
소년형무소 조선인 간수 관사 현재 모습

학익동 소년형무소는 1990년 11월 미결수 수감시설인 인천구치소로 전환되면서 기존의 수감동이 철거되고 12층 규모의 신축 구치소와 법원, 검찰청 건물이 들어섰다. 학익동 5번지 일대 관사촌에는 최근까지 14동의 건물 중 판임관, 간수부장 관사가 각각 한 동씩, 2호연립이었던 간수 관사가 두 동 남아 있었다. 관사 건물은 1970년대까지 소년형무소 간부 관사로 사용되다가 일반에 불하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2019년 시작된 학익2구역 주택재개발 사업으로 모두 철거되고 현재 그 터에 아파트 단지를 건설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남아있는 형무소 시설은 학익동 36번지 일대에 지어진 조선인 간수 관사 다섯 동뿐이다. 1970년대 일반에게 불하된 후, 소유주의 필요에 따라 증개축이 이뤄져 온전한 형태의 연립 관사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은 가장 북쪽의 두 동 뿐이다. 주민들 이야기에 따르면 이곳도 재개발 조합이 결성되어 조만간 철거될 예정이라 한다.

 

■ 일본농약 인천공장

1937년 7월 중국과 일본 사이에 중일전쟁이 시작되면서 일제는 전쟁을 지원하기 위한 병참기지로 인천을 주목했다. 중국과 지리적으로 가까우면서 항구와 철도가 연결되는 교통의 요지였고, 일찍 도시화된 덕분에 자본과 노동력도 충분했기 때문이다. 일제는 해안 매립과 두 차례의 영역 확장을 통해 북인천임해공업지대(만석·화수·송현동)와 일지출·학익공업지대(용현·학익동), 부평공업지대(부평·산곡·청천동) 등 세 곳의 공업지대를 조성했다. 그 중 일지출·학익공업지대는 지금 용현동 SK스카이뷰 아파트에서 학익사거리 일대까지 약 30만평에 달하는 넓은 지역이었다.

1937년 7월 인천항과 수원을 잇는 수인철도가 개통되어 자재와 생산품의 운송이 편리했고, 용현동 해안으로는 이미 조선염업주식회사가 염전 부지로 조성하다 중단된 약 20만평의 매립지가 있었다. 인천부는 중단된 매립공사를 재개하는 한편 학익동으로 흘러들던 비랑포 갯골 주위를 공장부지로 조성해서 일본 기업을 유치했다. 그렇게 광복 때까지 일지출·학익공업지대에 들어선 일본 자본의 공장은 경성화학과 히타치전기 등 10여 개에 달했다.

 

1940년대 일지출·학익공업지대 공장 배치도
1940년대 일지출·학익공업지대 공장 배치도

당시 일지출·학익공업지대에 자리 잡은 공장 중 하나가 1939년 학익동 401번지에 들어선 일본농약 인천공장이다. 일본농약주식회사는 1928년 일본 오사카에서 설립된 농약제조회사로 1930년대 일본 큐슈와 만주에 지사를 설립하였다. 1940년에 조선 지사를 설립하고 학익동 12,500평의 토지를 인천부로부터 매입한 뒤 인천공장을 건설했는데 1942년에는 조선 지사를 자회사로 분리하여 조선농약주식회사 인천공장이 되었다. 광복 후 적산이 되어 한국농약 인천공장으로 운영되다가 1995년 동부그룹이 인수했고, 2009년 운수회사인 KJ로지스텍스에서 공장과 부지를 매입한 뒤 창고 등으로 이용하고 있다. 현재 부지 내에는 일본농약 시절의 벽돌조 공장 건물 세 동이 남아있고, 광복 후 한국농약에서 지은 벽돌조 및 블록조 건물이 다수 남아있어 광복 전후 벽돌조 공장 건물의 구조와 형태를 비교해서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1940년 지어진 일본농약 인천공장 벽돌조 건물
1940년 지어진 일본농약 인천공장 벽돌조 건물
일본농약 인천공장 내부 목제 천정 트러스 구조
일본농약 인천공장 내부 목제 천정 트러스 구조

 

■ 제국제마 사택

1939년 학익동 719번지 지금 동아풍림아파트 일대로 일본 제국제마(帝國製麻)주식회사 인천공장이 건설되었다. 제국제마는 1907년 북해도제마와 일본제마주식회사의 합병으로 탄생한 일본 기업으로 마사(麻絲), 직물, 어망 등 마직물(麻織物)을 제조, 가공하는 회사였다. 4만5천평의 부지에 방적기 1만추, 직포기 200대 규모의 공장 시설을 갖추고 군복과 천막, 로프 등의 군수품을 생산하면서 1945년 4월 조선총독부가 2차로 지정한 56개 군수회사에 포함되기도 했다.

제국제마는 공장 북쪽의 학익동 260번지와 420번지 일대에 사택촌을 조성했다. 사택단지를 두 개의 구역으로 분리했는데 260번지 일대가 일본인 직공의 사택단지였다면 동쪽으로 두 블록 떨어진 420번지 일대로는 조선인 공원(工員) 사택단지를 두었다. 일본인 사택단지에는 간부와 직원 사택 24동, 조선인 사택단지에는 공원 사택 7동 등 모두 31동의 사택 건물이 들어섰다. 제국제마는 일본인과 조선인 사택단지를 분리시키는 한편, 목욕탕과 구락부 등의 편의시설도 각각 조성하여 서로의 생활공간을 침범하지 못하게 했다. 일본인 사택의 경우 모두 18평~20평 규모의 단독 사택과 2호연립 사택으로 지어졌던 것에 비해 조선인 사택은 8평 규모의 2호연립과 5호연립 사택으로 지어져 주거형태나 거주면적에도 차이가 있었다.

 

제국제마 공장 및 사택 (1947년 항공사진)
제국제마 공장 및 사택 (1947년 항공사진)

광복 후 제국제마의 자본이 철수한 뒤 공장 시설과 사택 건물은 적산이 되어 민간에 불하되었다. 공장은 조선제마로 운영되다가 1953년 화신백화점 박흥식이 이사장으로 있던 흥한재단에 인수되며 흥한방직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1974년 화신레나운과 한일방직으로 분리된 후 다시 동일방직에 인수되지만, 섬유공업의 불황이 이어지며 1995년 폐업 후 그 자리에는 동아풍림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다. 민간에 불하된 사택 건물은 소유주의 필요에 따라 증축과 개축이 이뤄져 왔고, 1990년대 다세대주택 건축 붐이 일면서 대부분 철거되었다. 지금 남아있는 제국제마 사택은 일본인 직원사택 두 동과 조선인 공원 사택 다섯 동 뿐이다.

현존하는 일본인 사택은 2호연립 사택으로 넓은 정원에 현관과 복도, 도코노마[床の間], 오시이레[押し入れ] 등 지어질 당시의 흔적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1930년대 일본에서 유행하던 전형적인 문화주택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조선인 사택은 대부분의 줄사택이 그러하듯 열악한 환경의 서민 주거 형태를 유지해 왔다. 2020년 9월 제국제마 사택단지 일대에 대한 ‘학익3구역 재개발정비사업’ 시행계획이 인가되면서 이미 주민 보상을 끝내고 퇴거가 진행 중이어서 내년 상반기 쯤 철거될 예정이라 한다.

 

제국제마 조선인 줄사택 골목
제국제마 조선인 줄사택 골목
제국제마 일본인 사택 현재 모습
제국제마 일본인 사택 현재 모습

학익동은 1930년대 후반 소년형무소와 각종 공장, 그리고 관사와 사택이 들어서면서 도시화되었던 공간이다. 당시 이곳에 지어진 수감시설과 공장건물, 주택들은 근대기에 형성된 근대문화유산이다. 그러나 우리가 개항장의 근대유산에 집중하는 사이 이곳의 유산들은 알게 모르게 하나둘 사라져갔고 이제 남은 것은 소년형무소 관사와 제국제마 사택, 그리고 일본농약 공장건물 뿐이다.

그나마도 주택으로 사용되던 관사와 사택은 조만간 철거될 운명에 처해있다. 학익동이 그러하듯 우리가 미처 몰랐던 근대유산이 아직 남아있을지 모른다. 보존 여부를 떠나 그들이 더 사라지기 전에 기록하고 조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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