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쓸한 가장들'을 위해
상태바
'쓸쓸한 가장들'을 위해
  • 양진채
  • 승인 2011.08.16 16: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여성칼럼] 양진채 / 소설가

 
 

  #1
  노인정에 첫발을 들인 77세 이복심 할머니는 요즘 민화투를 배우는데 한창이다. 두 팀으로 나눠 1점 당 10원짜리 화투를 치는데, 거금 500원을 잃은 한 할머니 때문에 큰 싸움이 날 뻔했다. 이렇게 할머니들이 거실을 장악하고 화투를 칠 동안 작은 방 안에선 할아버지 두 분이 쥐죽은 듯 앉아 텔레비전을 보고 있다.

  #2
  아이들이 어렸을 때, 요즘 한창 뜨는 국산 애니메이션 '마당을 나온 암탉'을 동화로 읽었다. 동화의 치밀한 구성력과 내용에 반해 작가 황선미의 모든 동화를 섭렵했던 기억이 있다. 이 동화의 미덕 중 하나는 주인공 설정. 주인공인 암탉 잎싹은 마당을 나와 여러 모험을 펼치는데, 이 잎싹은 양계장에서 알을 낳던, 그러나 지금은 더 이상 알을 낳을 수 없는 폐계였다. 

  #3
  모처럼 집에 일찍 들어온 남편은 좌불안석이다. 있을 곳이 없다. 텔레비전 채널 주도권은 애들이 쥐고 있고, 방에 들어가 눕자니 멀뚱멀뚱 잠이 안 오고, 가족들과 더 친밀해지기 위해 뭔가 얘기를 하려 해도 딱히 할 말이 없다. 괜히 말을 꺼냈다가 엇나가면 '화성인' 취급당한다. 딸 아이 몰래 베란다로 나가 담배 한 대 피우고 어슬렁거리다 들어와 화장실 좌변기에 엉덩이를 부린다. 이 집에서 유일하게 편안한 공간이다. 

  이 나라를 일으켜 세우고, 가정의 기둥이었던 남자들이 50대 중후반으로 넘어가면 퇴직을 걱정해야 한다. 평생 자식 신세 안 지고 먹고 살 만큼 노후를 준비해 놓았다면 얘기는 다르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을 못 벌어오는 가장은 '퇴물'이다. 안방 텔레비전이 유일한 친구이기 십상이다. 
 
 평균 수명이 늘어나면서 남자들은 은퇴 이후에도 20년 이상 삶을 더 살아야 한다. 퇴직한 남자는 자신을 돌아본다. 결혼을 하고 지금까지 자신이 한 일이라고는 매일 직장을 오가고, 더러 밤늦은 술자리가 전부였다. 딱히 취미도 없고, 아무 때고 만날 수 있는 친한 친구도 몇 없다. 아내처럼 아이들과 살가운 대화도, 손자를 돌보거나 가정의 잡일을 하는 것도 쉽지 않다. 가장이라는 허울만 있을 뿐, 경제력을 상실한 가장에게 더 이상 따뜻한 눈은 없다.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되지만, 그 무슨 일이 내 일로 되긴 쉽지 않다. 집안 눈치를 보게 되고 몸도 마음도 위축된다. 집을 나와도 딱히 갈 곳이 없다. 입안에서 곰팡이가 필 만큼 하루에 몇 마디 하지 않는 날도 많다. 뭔가 울컥 치밀어 오른다.  
 
 누구보다 성실하게 살아왔고, 이 세계 기초 조직인 가정을 지키기 위해 애쓴 가장! 그 가장들에게 훈장을 달아주지는 못할망정, 은퇴 이후 남은 삶을 소외와 고독으로 방치해야 하는가. 물론 삶을 살아가는 일은 개개인이다. 미리 더 나은 삶을 준비해야 하는 일도 개인이다.
 
 그러나 저임금 장시간 노동 속에서 가정을 지키기 위해 한 시간이라도 더 일해야 했던 가난한 가장들이었다. 취미를 갖고 싶어도, 마음에 맞는 친구를 사귀고, 여행을 하고 싶어도 한 푼이라도 더 벌어야 집을 장만할 수 있었고 아이들을 가르칠 수 있었다. 개인의 행복이나 청춘은 먼 미래를 위해 묻어두었다.

 먼 미래였던 오늘, 그 가장은 쓸쓸하다. 열심히 살아온 가장들이 삶의 기쁨을 누릴 수 있도록 국가적 차원의 대안들이 차근차근, 그러나 신속히 마련되어야 할 때이다. 그래야 내 자식들에게 정의로운 사회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지 않을까.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시민과 함께하는 인터넷 뉴스 월 5,000원으로 소통하는 자발적 후원독자 모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