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점 구석에서 홀로 술을 마시는 사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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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점 구석에서 홀로 술을 마시는 사내
  • 이세기
  • 승인 2022.10.28 07: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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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기의 손바닥소설 - 북창서굴]
(18) 풍원주점

 

초하루 저녁이었다.

왕소금을 뿌려 구운 전어구이 냄새에 이끌려 십년지기 우리 일행은 주택가 골목에 막회와 서더리탕을 주메뉴로 하는 단골인 풍원집에 들어갔다. 대여섯 평의 공간에 문 앞쪽으로 둥그런 원반 탁자가 세 자리가 있고, 구석에 탁자가 두 개 있는 주점이었다. 두어 팀이 술잔을 부딪치고 있었다.

연금이 없는 불안한 말년 생활자의 삶을 화제로 삼아 술을 마시고 있을 때였다. 옆자리에 오십 후반 줄로 보이는 남자 둘이 들어와 앉았다. 다들 전어구이에 소주를 먹고 있는데 갑자기 찬물이라도 끼얹듯, 주인 양반! 거, 맥주나 두어 병 주소, 하고 소리를 버럭 질렀다.

넓적한 초록 안경 뿔테를 한 키가 훌쩍 큰 사내와 흰색과 검은색 줄무늬 셔츠를 입은 중키의 사내였다. 그중 키가 큰 사내는 흰 바지에 흰 구두를 신고, 웃옷을 벗은 반소매 사이 오른팔에 문신이 그려져 있었다. 하트에 화살이 꽂힌 이를테면 큐피드의 사랑을 꿰어놓은 한물간 듯한 문신이었다. 거기에 건들건들 걷는 폼이 마치 찰나의 생을 태우는 하루살이 인생과 같이 치기가 가득해 보였다. 그네들은 앉자마자 술잔이 나오기도 전에 욕지거리를 쏟아냈다.

죽일 놈의 새끼.

난데없이 주점 안은 싸우기라도 하듯 육두문자로 왁자했다. 대화 내용은 이런 것이었다.

가까이에 봉봉카바레가 있는데, 거기서 여자를 한 명 부킹 받았던 모양이다. 그런데 둘이 여자를 둘러싸고 서로 짝이 되고자 실랑이를 벌였다. 그중 한 명이 경우 없이 들이대자, 뭐 이런 치들이 다 있어, 하면서 여자가 택시를 잡아타고 냅다 줄행랑을 쳤다. 이른바 작업이 잘되던 차에 파투가 난 것이다.

이른 밤부터 카바레 주변 술집에서 항용 있는 일이라서 그러려니 했지만, 이들 사내는 함께 지르박을 추며 놀 모양이었는데, 빠그라졌다며 서로 분을 삭였다. 키가 큰 치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주변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허공에 한 손을 얹어 놓고 다른 손에는 엉덩이쯤 되는 허공을 지그시 누르더니 입으로 내는 블루스 장단에 맞춰 춤을 춰 보였다. 그러곤 영 못마땅하고 아쉬웠는지 쌍욕과 함께 게 눈 감추듯 급하게 맥주를 들이켰다.

그중에 키가 큰 안경잡이는 유달리 언성이 높았고, 중키의 줄무늬 셔츠를 입은 치는 낮고 저음으로 서로 맞장구치는 욕지거리가 고수와 소리꾼의 궁합이었다. 고음으로 욕을 하며 목청을 높이면, 그 옆에서 묵직하고 낮은 저음으로 받아 그러게 말야, 하며 욕과 함께 연신 장단에 맞춰 추임새를 넣었다. 주점의 손님은 모두 그들이 욕설을 하며 싸우는 줄 알았지만, 가만히 보니 둘도 없는 의기투합이었다. 안주도 없이 눈 깜짝할 사이에 맥주 두 병을 비우며 쉴 틈도 없이 흰소리로 시끌벅적하더니, 성미가 급한 듯 다시 가자며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허허, 그거참….

그네들이 나가자 좌중에서는 킬킬거리며 가까스로 참았던 웃음보가 터졌다. 장밋빛 인생의 비극이 잠들어 있는 한편의 짧은 희극 연극을 본 듯한 쓴웃음이 절로 나왔다.

그런데 누구 하나 말은 하지 않았지만 정작 우리의 시선을 끌었던 것은 왁자한 소란에도 불구하고 구석 탁자에서 막걸리를 비우던 사내였다. 그는 실내의 분위기와 묘하게 대칭을 이루듯 무거운 침묵을 지켰다. 사내는 위아래 작업복을 걸치고 모자를 쓴 채로 탁자에 앉았는데, 주인은 두말없이 그 사내에게 대접 가득 막걸리 한잔과 막회 세어 점을 내놓았다. 둘 사이에 말은 없었지만 한눈에 봐도 막역지간의 모습이었다.

그는 실없는 육담 따위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홀로 막걸릿잔을 묵묵히 들이켰다. 한참을 침묵한 채 있다가 막걸릿잔을 들이키는 모습에서 어떤 결기 같은 것이 느껴졌다. 벽면의 흰 벽에는 고독한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그 모습을 힐긋힐긋 보던 우리 일행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모처럼 기본계급을 보는 것 같군, 하며 낮은 목소리를 내뱉었다. 사내는 두 잔째를 비우더니 곧 자리에서 일어나 찬 서리 내리는 어두운 골목으로 나갔다.

몇 순배 술이 더 돌아가고 취기가 오를 무렵 주인이 문을 닫아야 한다는 호령이 떨어졌다. 주인의 거듭된 요청에도 불구하고 취기가 올라왔던 터라, 입가심으로 딱 한 잔씩만 더 들고 정리하자며 주인을 설득해 해물 파천에 막걸리 한 주전자를 시켰다.

자리를 파하고 골목길을 빠져나올 때쯤이었다.

우리가 기본계급이라고 불리었던 그자가 손수레에 악취가 나는 음식물 쓰레기를 가득 싣고 어두운 골목길로 사라졌다. 주점 주인 말에 의하면 그 사내는 오늘 아내 장례를 치르고 나왔다고 한다. 그는 아무도 없는 어둠 속에서 일하고 있었다.

세상이 온통 산지옥이군.

일행 중 한 명의 씁쓰레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밤하늘에 대고 비명을 질렀다. 검은 공중을 뚫고 어둠을 향해 땅 위에 거주하는 잠자는 벌레를 깨우듯이 날카로운 외마디 소리가 텅 빈 구도심 골목을 비행하듯 날아갔다.

입동 가까운 어둠이 커 가는 한밤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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