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눈 같은 하얀색... 주인공 같은 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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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눈 같은 하얀색... 주인공 같은 색
  • 고진이
  • 승인 2022.11.01 14: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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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러 칼럼](6) 11월의 색, 하양
고진이 그림책 [섭순] 중 한장면
그림1_ 고진이 그림책 [섭순] 중 한장면

가을은 흔적만 남기고 본격적인 겨울의 문을 여는 달, 11월이 찾아왔다. 이달에는 보통 겨울의 시작을 알리는 하얀 폭죽 같은 첫눈을 만날 수 있다. 은근히 기다리게 되는 겨울의 이벤트, 첫눈의 하얀색을 11월의 색으로 정했다. 사실 하얀색은 내게 있어 어떤 색이라기보다 색이 없는 색이다. 정확하게는 색보다는 빛으로 느껴진다는 것이 맞겠다. 빛의 삼원색인 빨강, 초록, 파란빛을 합치면 투명한 백색 빛이 된다. 그 투명한 빛을 흰색 혹은 하얀색이라고 부르는 것이 맞는지 모르겠지만 편의상 그렇게 지칭하겠다. 그 색에서 느껴지는 결백한 아름다움은 첫눈을 볼 때 느끼는 감정과 유사하다. 그럼 아껴뒀던 하얀색의 이야기를 풀어보겠다.

하얀색을 그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대략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흰 종이에 그림을 그린다면 하얀색 부분을 미리 표시해두고 색을 안 칠하는 방법과 작업 막바지에 쨍쨍한 흰색 물감을 찍어주는 방법이 있다. 수채화를 사용한다면 보통 첫 번째 방법으로 흰색을 남기겠지만 나는 보통 유화 물감과 같이 불투명한 소재의 재료를 쓰기 때문에 후자의 방법을 쓴다.

글을 쓰다 보니 하얀색은 참 주인공 같은 색이란 생각이 든다. 작업을 시작할 때 하얀색 배경으로 시작하고 작업의 대미를 장식하는 것도 보통 하얀색이니까 말이다.

그림책 ‘섭순’에 들어간 그림 중 겨울 장면에 내리는 눈을 표현할 때도 마무리 과정에서 몇 번이나 흰색을 덧올렸다(그림1). 사진에서는 물감의 두께가 다 느껴지진 않지만, 눈이 쌓이듯 탐스럽게 흰색을 올렸다. 그 작업을 하던 시기가 마침 겨울이었기에 작업실을 오가는 길에서 흩날리는 눈발과 소복하게 쌓인 눈을 자세히 관찰하고 다니곤 했다.

그림2_고진이, Togidash2-3, oil on linen, 21x35cm, 2019
그림2_고진이, Togidash2-3, oil on linen, 21x35cm, 2019

이처럼 일상에서 보이는 여러 변화와 흔적을 잘 보고 마음에 담았다가 작업에 활용하곤 하는데 2019년 작인 ‘Togidash2-3’ 역시 일상의 관찰에서 시작된 작품이다(그림2). 언듯 보기에는 눈 오는 풍경처럼 보이지만, 이 작품은 사실 작업실의 오래된 시멘트 바닥 ‘도기다시’의 초상을 담은 작품이다. 어릴 적 다니던 병원이나 초등학교를 떠올리게 하는 시멘트 바닥을 작업실에서 다시 만나고 보니 그 위에 쌓인 시간과 사건의 흔적이 꼭 커다란 회화 작품처럼 느껴졌다. 초상화를 그릴 때 인물의 주름을 그리듯, 세월이 느껴지는 도기다시의 초상을 캔버스에 담고 싶어졌다.

그렇게 2019년에 제작하게 된 Togidash 시리즈는 바닥의 무늬나 여러 흔적을 따라 붓을 움직이고 겹쳐 작업했다. 완성하고 보니 꼭 추상화 같기도 하고 어떤 작품은 풍경화 같기도 했다. 붓 자국을 무슨 색으로 어떻게 남기느냐에 따라 그림의 전체적인 분위기가 달라지는데 ‘Togidash2-3’는 마지막에 춤추듯 올린 하얀색 터치들로 인해 몽환적인 설경의 느낌이 난다. 비슷한 분위기의 작품을 찾다 보니 올해 완성한 ‘Memories.1’ 가 눈에 들어왔다.

고진이, Memories 2, oil on canvas, 53 x 164.5 cm, 2022
그림3_ 고진이, Memories 2, oil on canvas, 53 x 164.5 cm, 2022

이 작품은 허공에 내리는 햇빛과 그 안에 비치는 고요하고 활기찬 어떤 움직임을 포착하며 시작되었다. 아마 평소 보이지 않던 먼지가 햇빛 아래 둥둥 떠다니는 모습을 한 번쯤은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별거 아니게 지나칠 수 있는 광경이 어느 날 생경하게 다가왔다. 비어있다고 생각하는 공간에 먼지를 움직이게 하는 어떤 에너지가 느껴지자 보이는 세계 너머 황홀경이 그려졌다. 그리고 내가 보지 못하는 그 세계에서는 시간의 흐름과 상관없이 기억 저편의 세계와 맞닿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상으로 인한 시선의 확장으로 기억 속 공간을 허공에서 발견했고, 그 안에서 관찰되는 움직임과 교차하는 빛, 그림자를 화면에 담고 싶었다.

그렇게 시작한 ‘Memories.1’는 어떤 계획도 없이 우연한 움직임을 흰색 캔버스에 스치며 시작했다. 중간 작업까지는 이래서 결국 무엇이 완성될까 싶었지만, 걱정은 접어두고 신난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마지막에 겹쳐 올린 하얀색 터치에 밑 색이 어스름하게 비쳐 올라왔다. 분명하지 않은 색의 경계가 더 비밀스러운 느낌이 들어 마음에 들었다.

이 작품을 11월을 맞이하며 다시 보니 꼭 빛이 눈처럼 흩날려 내리는 모습처럼 보였다. 그림은 어느 시기에 어떤 관점으로 보느냐에 따라 달라 보이기도 하고 새롭게 다가오기도 하는 입체적인 매력이 있다. 이러한 그림의 매력으로 인해 작업과정에서 겪는 힘듦을 잊어버리고 다시 하얀 캔버스의 적막을 깨게 된다. 이번 겨울은 또 어떤 한파가 몰려올지 조금 두렵기도 하지만 첫눈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하얀 겨울을 맞아볼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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