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라임오렌지나무'는 4,300명까지 찍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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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라임오렌지나무'는 4,300명까지 찍었지요”
  • 송정로
  • 승인 2022.12.02 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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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문화 40년을 듣는다]
(3) 연극인 이재상 – 연극인생 40년이 본 인천연극 40년(상) / 송정로 인천in 대표 대담·집필
인천문화재단이 오는 2024년까지 인천문화예술 40년사(1981~2021)를 편찬한다. 이에 인천in은 인천문화재단과 함께 인천문화 40년을 이야기하고 증언해줄 인물 12인을 선정, 구술 작업을 진행하고 그 내용을 2023년 상반기까지 차례로 연재한다. 세번째 순서는 이재상 극작가로 송정로 인천in 대표가 만났다.

 

18세에 연극 배우를 시작한 이재상은 58세인 지금도 극작가 겸 연출가로 바쁘다. 1982년 7월, 그는 80년대 인천 소극장 운동의 전성기를 연 극단 돌체에 제발로 찾아 가 창단 멤버가 되었다. 1990년 7월 인천시립극단이 창단됐는데, 그도 시대의 흐름을 타 상임단원이 됐다. 그러나 2년 반만에 안정된 그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극작과 연출이라는 꿈을 쫒아서다. 그리고 10여년 배고픈 프리랜서. 90년대 우리 연극계는 ‘동인제’ 시스템이 무너지고 제작자가 자금을 대고 배우에 월급을 주는 ‘원톱 시스템’으로 완전히 돌아서고 있었다.

그는 국내외 무대를 돌며 ‘독립적’ 연출가로서 실험극을 시도하며, 연출력을 키우며 이것저것을 하며 먹고 살았다. 2008년, 방랑을 끝내며 지금 대표로 있는 극단 MIR 레퍼토리를 창단했다. 2012년에는 인천연극협회 회장을 지냈다. 그 사이 교류한 일본 연극인과 관계가 확대돼 2011년 일본에 극단 ATMAN(일본)을 창단하고 예술감독을 맡아 수시로 오간다. 극단 ATMAN 예술감독으로 공연을 앞두고 일본 출국을 준비하는 그를 10월 20일 오후 인천근대문학관 쉼터에서 만났다. 올해 연극 인생 40년을 맞은 그를 통해 인천 연극 40년을 되돌아보았다.

 

 

송정로 : 고등학생 때 극단에 입단하고 연극인으로 지금까지 40년 한 길을 걸어왔습니다. 어떻게, 왜 그 나이에 연극의 길을 걷게 되었나요.

이재상 : 제가 좀 조숙했나 봐요. 초등학교 4학년 때로 기억하는데, 인간은 어디서 왔나를 골똘히 생각한 적이 있어요. 중학교 3학년 때 진리를 깨닫기 위해 출가를 하던가, 뭔가를 해야하지 않을까 고민하기도 했습니다. 제가 불교 집안이라서... 어떻튼 어릴 때는 도 통하는 게 꿈이었어요.

고등학교 입학 후 몸이 안좋아 몇 달만에 휴학하고 1년 후 복학했는데, 문예부 생활을 하면서 시를 쓰기도 하다가, 인천 전역에서 고등학생들이 모이는 호산나합창단에 들기도 했습니다. 그 시절 앉아서 시 쓰는 것을 반복했는데 문득, 책상에 앉아 세상을 보는 게 아닌 몸으로 움직이는 게 필요하다고 깨닫게 되었어요. 그래 연극을 해보자! 딱 3년만 해보자 했지요. 그때 호산나합창단 선배님이기도 했고, 79년 싸리재에 돌체소극장을 열었던 유용호 선배님이 ‘극단 돌체’를 창단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82년 7월, 복학 후 2학년 때였습니다. 그래서 직접 극단을 찾아갔습니다.

그때 돌체 입구에서 정주희 선배와 마주쳤어요. 그런데 선배는 당시 저를 보고 받고 싶지 않다고 만류하는 거예요. 연극이 뭔지 제대로 알 지도 못하고 그만 두는 후배들에게 상처를 입었던 거였죠. 그리고 저는 당시 전교 몇 등 안에 들만큼 성적도 좋았고 장남에 장손, 외아들이니 집안 반대도 심할 것라며 받아주지 않으려 했습니다. 그 때 저는 3년만 하려한 속셈이 들킨 것 같아 아찔했지만, 하는 날 까지 열심히 하겠다고 다짐하고 약속했습니다. 그리고 그해 겨울 맘을 먹었죠. 이 길로 쭉 가보겠다고요.

당시 시대 전반적으로 연극하는 사람들은 열정이 있었지만, 세간의 사람들은 연극은 가난해서 직업으로는 마땅치 않다는 분위기가 강했습니다. 심지어는 연극을 한다 하면 불쌍해하거나 왜 그런 걸 하느냐는 분위기마저 있었어요. 제게도 처음 입단 당시 선배들이 학교 성적, 집안 사정을 물어보고는 1년 정도는 후배 취급을 잘 안 했었어요. 연극을 곧 그만두리라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저도 집안의 반대가 심해 가출을 결행하기도 했고, 친구들마저도 처음 1년 가량 말리는 분위기였습니다. 1년 정도 지나자 주변 분위기가 바뀌었어요. 87년 제대 후에도 연극을 계속할 생각을 밝히자 집에서도 어쩌지 못했죠.

 

송정로 : 80년대 인천은 소극장 전성시대로 알려져 있습니다. 동인천 일대 여러 개의 소극장과 극단이 생겨 부흥기를 이뤘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놀랍고 신기해보이기도 합니다. 대표님도 그 시절에 활동하셨는데, 그때 소극장 운동은 어떻게 전개됐나요?

이재상 : 80년대 소극장 운동의 시발점이랄 수 있는 극장으로 1974년 용동에 생긴 ‘까페 떼아뜨르 깐느’를 들 수 있는데, 차를 마시며 연극을 보는 까페 형태의 소극장이었습니다. 서울의 ‘자유극단’ 단원이셨던 이우용 씨가 연 것으로 알고 있어요. 서울의 ‘까페 떼아뜨르’에서 인천을 오가며 공연했는데, 1년만에 갑작스레 문을 닫아 잊혀지고 말았죠.

그 후 1979년 돌체 소극장이 생겼고 본격적인 인천의 소극장 시대가 열렸습니다. 돌체는 율목동 인천기독병원 앞 작은사거리변에서 운영하던 얼음창고를 개조해서 만든 겁니다. 유용호 대표의 집안에서 운영하던 것이었는데, 처음에는 대관 사업과 함께 일주일에 며칠은 싱어롱(노래 따라 부르기)이 열렸고 심심치 않게 통키타 가수들의 연주회도 열렸습니다. 싱어롱 때문에 청춘들의 데이트 장소로도 유명해졌는데, 인기가 엄청났죠. 택시를 탈 때 싸리재가 아니라 ‘돌체 소극장이요’ 하면 다 알아들었거든요.

1982년에 소극장에서 극단 돌체를 창립합니다. 제가 그해 7월 창단 멤버로 입단한 거죠. 그러나 경영난이 계속되면서 1983년 유 대표를 돕던 최규호 형이 군대에서 제대하고 돌체를 인수했습니다. 나중에 극단 이름을 마임으로 바꿨죠.

80년대 까지만해도 연극은 동인제 시스템으로 무대가 만들어졌습니다. 극작가이건, 배우이건, 연출자건 연극하는 사람들이 서로 돈을 모아서 제작비를 마련하는 겁니다. 몇 명이서 분담하는 거죠. 보통 한 작품을 사흘 정도, 많으면 1주일 가량 공연했습니다. 관객도 많지 않았지만, 대부분 연극인들이 직장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저녁 때나 휴일에 연습했고요. 소극장을 사흘 정도 대관하면 그곳에서 한 달 동안 연습을 무료로 할 수 있게 해주었는데, 제가 막내로 대관팀 일도 캐어하랴, 극장에서 살다시피 합숙 훈련도 하면서 극을 올렸어요.

돌체가 생기고 난 후 1984년 정진 선생님이 경동예술극장을 창립했습니다. 그리고 미추홀소극장, 신포아트홀, 배다리예술극장이 잇따르면서 84~88년 동인천에만 5개 정도의 소극장이 생겨났죠.

관객도 늘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전철이 생긴 지 오래되지 않아 서울로 많이 가지 않던 시절이었죠. 생활권 자체가 그랬습니다. 인천 연극에 애정이 있는 사람들도 있었고요. 80년대 초 소극장이 처음 들어설 때는 보통 3일에서 길어도 1주일 공연이었습니다. 그 정도 관객이었던 거죠. 그러다 군 입대 후 87년에 제대했는데, 다시 연극판으로 와보니 1주일 공연이 한달 공연으로 바뀌어 있더군요. 놀랄 정도였어요. 한달 간 매일 2회씩 공연을 하고 있었어요. 낮 관객도 있다는 거죠. 간혹 6주 정도의 공연도 있었고요. 객석 점유율도 큰 차이를 보이지 않고 있었는데, 그 말은 평균 관객이 그 사이 약 열 배로 증가했다는 뜻인거죠.

공립극장이 시민회관 하나였던 때인데, 이같은 민간 소극장의 활성화는 주목받기 충분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지금의 수봉문화회관 소극장, 인천종합문화예술회관 건립도 이때 추진됐는데, 민간 소극장의 활성화가 공립극장의 필요성을 일깨운 촉매제가 됐기 때문입니다.

제 기억에, 한 작품 당 평균 유료 관객이 1천5백명 수준이었고, 망했다 하면 천명 이하, 성공하면 3천명 넘는 관객이 찾은 작품이었습니다. 돌체가 공연한 ‘나의 라임오렌지나무’가 4천300명까지 찍었지요. 전무후무한 대기록입니다. 당시 인천 인구가 지금의 절반도 안되는데, 그 때의 관객이 아직도 회복이 안되고 있는 거예요. 연극 입장료는 영화보다 쌌고요. 영화에 투자한 돈이 많으니 영화보다 연극이 비싸서야 되겠냐는 논리였죠. 관객들도 영화보다 비싸면 안 왔어요. 그래도 비싼 연극은 영화에 맞춰 2000원을 받았습니다. 당시 극단 돌체에 있던 직계 선배들이 극단 미추홀에 들어가 있었는데, 저도 그때 자연스레 극단 미추홀로 들어가게 되었죠.

 

 

송정로 : 80년대는 가히 인천 원도심의 문예부흥기라 부를 만한 특별한 시기로 볼 수 있을 것 같네요. 특별한 조사 연구도 필요할 것으로 보입니다. 그 기간이 10여년인데, 그 같은 추세가 어떻게 90년대로 이어지지 못하고 갑자기 몰락하다시피 했을까요.

이재상 : 80년대 소극장들이 91~92년경 대부분 문을 닫습니다. 먼저 경동예술극장이 문을 닫더니 이어 다른 소극장들도 연이어 문을 닫았죠. 결국 처음처럼 돌체 소극장 하나만이 남게 되었어요. 6개의 소극장이 문을 여는데는 십 년이 넘게 걸렸는데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는데는 채 3년이 걸리지 않은 겁니다.

저는 이 사태가 무엇보다 90년 7월 인천시립극단 창단한 것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고 봅니다. 인천시립극단은 서울 국립극단 빼고 전국에서 제일 먼저 창단된 거예요. 경험 없이 시립극단을 맞이한 거죠. 단원들은 안정된 생활에 행복했을 수 있지만, 소극장에겐 백신 없는 시련인 거예요. 이후의 일을 예측하지 못했어요, 많은 시행착오를 거쳐야 했죠.

시립극단이 시민 세금으로 만들어졌다 하여, 창단 공연부터 무료공연을 시행했는데, 그 여파를 생각하지 못했어요. 이게 소극장에게 독이 되었던 것이죠. 일반 관객의 입장에서 대극장의 화려한 세트에 좋은 배우들이 나서는데 비해 소극장 세트는 별볼 일 없고 배우도 마찬가지인데 무료라니, 한쪽으로 몰리죠. 1년 정도 지나 시립극단도 그걸 깨닫고 입장료를 받기 시작했죠. 소극장과 비슷하게 5천원. 지금도 시립극단의 입장료는 민간 극단 보다 쌉니다. 소극장이 버티지 못하는 구조죠.

문제는 또 있습니다. 시립이 생기면서 각 극단의 중견 연기자 절반 이상이 시립으로 들어갔는데, 공무원이라는 이유로 외부출연을 못하게 했어요. 저도 단원으로 소극장에 무대감독으로 이름 빌려줬다가 시말서를 썼어요. 제가 극단에서 나오고 난 후에야 바뀌긴 했지만요. ‘시립극단 작품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객원출연 할 수 있다.’라고.

물론 시대적 변화도 있었습니다. 경인전철 이용이 일반화되면서 심리적 멀어졌던 서울이 점차 가까워졌고요. 거기에다 서울 대학로 연극이란 트랜드도 심화되니 인천 연극은 점점 어려워질 수 밖에요. 지금도 기억하는데... 2000년대 초반, 소극장의 한 작은 공연이 반응 좋아서 “인천서도 이런 공연을 볼 수 있다니”라는 인터넷 댓글이 달린 걸 본 적이 있어요. 근데 바로 그 아래 “그래도 연극은 대학로에서 봐야 제 맛”이라는 댓들이 붙어 있더라고요. 상징적인 ‘대화’였던 거죠.

서울과 인천이 가까워진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죠. 하지만 시립극단의 창단 과정은 지금도 아쉬움이 남아요. 우리가 좀 더 안목이 넓었더라면... 시립극단 창단을 계기로, 이를 베이스로 소극장들과 상생을 생각하며 인천 연극의 특징을 잘 살렸더라면 서울과 인천이 가까워진 것이 다른 방향으로 작용할 수도 있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죠.

 

송정로 : 대표님도 시립극단에 창단 멤버로 들어가 의욕적으로 일하지 않으셨나요? 안정적으로 활동하며 꿈을 펼칠 수 있었을 텐데... 언제, 왜 나오게 된겁니까?

이재상 : 저도 창단 멤버로 입단했고, 시립극단에서 ‘차석’이라는 자체 진급 1호라는 기록도 갖고 있었습니다. 1990년 7월 입단해서 92년 12월 그만 두었습니다. 제게는 극작과 연출이라는 꿈이 있었으니까. 시립에 몸담고 있으면 외부 출연이 안 되었어요. 시립을 나오게 된 이유 중 하나이지죠. 선택의 기로에서 배우로 계속 있으면 제가 가야할 길에 무리가 따르겠다 생각했습니다.

사실, 시립에 들어간 건 윤조병 선생님이 인천 시립을 십년 안에 세계적인 극단으로 키우겠다는 이상에 동의했기 때문이에요. 그때는 ‘내가 내 연극 인생 십년 정도를 투자해서 고향에 세계적인 극단이 하나 생긴다면 밑지는 장사는 아니지’라고 생각한 거지요.

말씀 드렸듯 저는 처음부터 극작, 연출에 꿈이 있었고. 윤조병 선생님이 시립을 그만두시게 되자 이대로 가다가는 그저 시립극단의 배우로서 연극 인생을 마칠 수 밖에 없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예요. 그만둘 것이라면 한 살이라도 어릴 때 그만두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재상 극작가의  작은연극연구소(인천 중구 신포로 15번길 68-1, 2층)

 

송정로 : 소극장 이야기를 좀 더 듣고 싶습니다. 앞서 인천 현대연극의 1세대라 할 수 있는 60~70년대 전무송, 정진, 조일도 등 기억나는 연극인들이나 극단체가 좀 있나요? 그리고 90년대 이후는 어떻게 되죠?

이재상 : 제 기억에 전무송 선생님이나, 조일도 선생님은 같은 극단인 ‘집현’을 중심으로 활동 하셨죠. 집현의 창단 공연인 ‘리어왕’ 즈음에 전무송 선생님은 영화 출연으로 유명해졌고... 정진 선생님은 83년인가요? 드라마 ‘한명회’ 배역으로 유명해지신 뒤 인천 답동성당 옆 후미진 골목에 ‘경동예술극장’을 만드셨죠.

돌체 소극장이 인천 연극인의 요람이라면 많은 서울의 연극인과 인천의 연극인이 함께 무대에 선 경동예술극장은 연극 교류의 관문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돌체가 자신의 극단 작품과 함께 많은 대관 공연도 했던 데에 비해 경동은 극단 전용극장의 성격이 강했는데, 이런 양 강 구도는 인천 소극장 시대의 막을 여는 신호탄이 되었습니다. 모든 연극인의 꿈이 자신의 소극장을 갖는 것이었기에 인천에 소극장이 두 개나 생기고 활발한 공연을 계속하자 자신감을 얻은 각 극단들이 앞다퉈 자신의 전용극장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말씀드렸다시피 82년 연극을 시작했기 때문에, 그 때의 극단 ‘극우회’ 정도 외에 60~70년대는 잘 모릅니다. 제가 아는 극단은 ‘돌체’, ‘미추홀’, ‘엘칸토’, ’경동예술극장‘, ‘신포아트홀’, ‘집현’ 정도죠. 그 때는 대부분의 극단이 각자의 극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90년대 시련을 겪고 이후 하나 둘 늘어나다가 2000년대 이후 지금처럼 극단이 많아지게 되었죠. 지금처럼 극단이 많아지게 된 데에는 인천문화재단의 설립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합니다.

 

송정로 : 92년 겨울, 시립극단에서 나왔으니 대표님 연극 인생도 순탄치 않았을 것 같은데요. 어떻게 극단 미르를 창단하게 됐나요.

이재상 : 시립극단에서 퇴직하면서 ‘즐거운사람들’이라는 극단 만들었어요. 연극하는 친구들과 후배들 몇명이 먼저 준비했었는데, 돈을 모으다 잘 안되서 제게 도움을 요청해왔습니다. 그래서 저도 일부를 보태서 만든 것입니다. 내가 연배로 제일 위니까 ‘형이 대표해’라 해서 대표를 맡은 것이고요. 그런데 시대가 바뀌어 버렸어요. 제작자가 자금을 대는 방식으로 간 거죠. 예전처럼 배우, 스텝들의 동인제로 가려고 극단을 만든 것이었는데, 동료끼리 돈 모아서 하는 것은 불가능한 분위기였어요. 이제 제작자가 배우에 페이를 주는 시대로 돌아선 거예요. 월 얼마씩 내고 극단을 운영하는 게 힘드니까 우리도 고민했죠. 깨고 말것이냐, 원톱 시스템으로 할 것이냐... 결국 제가 시립극단 퇴직금이 있으니까 인수를 해서 몇 달 더 이어갔습니다. 93년 창단공연을 하고 그 다음 작까지 인천에서 두 작품을 공연했는데... 1년도 어려웠습니다. 그 때 상황으로는 인천서 버티기 힘들다고 판단했습니다.

94년 극단을 갖고 서울 옮겨가 5년간 대표하면서 연출을 했습니다. 어린이극도 하면서 버텨나갔는데, 힘이 들어 기획하는 친구에 대표 자리를 넘겼습니다. 그렇지만 97, 98년 ‘서울 열목어’, ‘천상 시인의 노래’ 등 연출로 작품을 인정받기도 한 시기였습니다. 저로서는 실험적 시도도 필요했는데, 서울은 반 상업화 되어 제작자가 리스크를 지지 않으려 해요. 친구가 제작자인데도 그랬어요. 상업적으로 가려고 했죠. 그래서 나중에는 모두 다 넘겨주고 갈라섰습니다. 그리고 인천으로 다시 와서 프리랜서가 됐어요. 98년, 99년경입니다. 그 프리랜서 기간이 10년 가량 된 거죠.

그 때 인천은 모객이 잘 안되니 제작비는 충당되지 않는 대신 어느 정도 작품이 나오면 연출은 하고 싶은대로 하는 것이 가능했습니다. 서울에서는 관객 몰이가 안될 것 같으면 제작자가 엔딩 부분을 터치(개입)하는데, 인천은 그래도 그게 없었어요. 99년 내려와 10년간 프리랜서로 작품을 주거나, 연출을 하고 페이를 받아 꾸려갔습니다. 서울과 인천을 왔다갔다 하며 조연출, 무대감독, 축제의 기술감독 등등 이것저것하며 먹고 살았죠.

2007년 경, 내가 이러다가 진짜 하고 싶은 작품을 못할 수 있겠다, 지속적인 관계를 못 이어갈 것이라는 생각이 들습니다. 역시 극단이 있어야겠다고 생각한 거죠. 다시 먼저 동료들을 모아 2007년 MIR 레퍼토리를 창단하고 2008년 창단 공연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쯤 미묘하게 일본 연극인들하고 교류가 커졌습니다.

 

신포로 작은극장연구소 안에서

 

송정로 : 일본과 인천 연극과의 교류가 활발하다는 것이 좀 의아하기도 하고,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어떻게 시작하게 된 건가요.

이재상 : 94년 서울로 극단을 옮기고 첫 연출 때였는데, 최규호 형이 일본에서 아시아마임 축제를 하는데 조명을 도와달라는 거예요. 나는 조명 안한지 3년이 넘어 곤란하다고 했는데, 첫 축제인데 불안하니 무대감독과 이것저것 함께하며 도와달라는 것예요. 그래서 2주간 일본에 머물며 축제를 지켜봤는데, 거기서 국제적 감각과 함께 특별한 영감을 받았어요. 그 이후로 매해 일본과 인천을 오가며, 그리고 춘천마임축제까지 1년에 3번 정도 교류하며 친해지고 여러 가지 공부도 하는 계기가 됐죠.

2007년 쯤 마임하는 일본 친구 쪽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그 일본 극단의 상임연출을 맡은 사람이 러시아인이었는데, 한국의 초청장을 요청했어요. 당시 저는 인천 미추홀구에 학산소극장이 생겨 1년간 예술감독을 맡고 있었습니다. 이듬해 일본에 갔었는데, 그때 그 러시아 연출(아니시모프, 공연예술가)이 고맙다며 식사를 함께 했습니다. 그때 우연히 한국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는데, 제가 쓴 대본이 2008 인천연극제 희곡상을 받았다는 전화였어요. 근데 그 얘기를 들은 러시아 연출이 다짜고짜 내년에 일본 작품 말고 내 작품을 공연하자는 거예요. 여기서 그치지 않았죠. 2009년 제 극을 번역해 줬는데, 그 러시아 연출이 블라디보스톡 극장 2개의 예술감독을 동시에 맡게 돼 도저히 연출을 하지 못할 형편이라면서 제게 연출까지 부탁하더군요. 그래서 2009년 일본에 가서 2달 정도 살게 됐어요. 일본에 체류하면서 연기 워크샵도 진행했는데, 그게 반응이 괜찮았고, 극본과 연출을 한 공연도 좋았고... 그리고 나아가 계속 일본에 올 수 있다면 계속 함께 작업할 의향도 있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그러면 극단을 만들자 했어요. 그래서 만든 것이 MJT(MIR Japan Theater) ATMAN인데 대표는 일본인이 하기로 하고 제가 예술감독을 맡은 거죠. 2012년 7월 도쿄 아사가야씨어터에서 창단 공연을 했어요. 제가 82년 7월 처음 극단 돌체에 입단했으니 연극 인생 정확히 30년만에 벌어진 일이었죠. 2010년부터 일본에서 한두차례 공연과 2번 워크샵을 진행하며 늘 1년에 4개월 정도를 체류했습니다. 일본도 제작자 시스템으로 돌아갔지만, 그래도 동인제도 살아있어서 가능했던 겁니다. (하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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