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갯꽃'과 '지평' 그리고 민미협, 인천 현장 미술운동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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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갯꽃'과 '지평' 그리고 민미협, 인천 현장 미술운동의 시작
  • 이설야
  • 승인 2022.12.23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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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문화 40년을 듣는다]
(6) 허용철 작가 – 인천민중미술운동의 발자국을 따라서(상) / 이설야 시인 대담·집필
인천문화재단이 오는 2024년까지 인천문화예술 40년사(1981~2021)를 편찬한다. 이에 인천in은 인천문화재단과 함께 인천문화 40년을 이야기하고 증언해줄 인물 12인을 선정, 구술 작업을 진행하고 그 내용을 2023년 상반기까지 차례로 연재한다. 여섯번째 순서는 허용철 작가다. 이설야 시인이 만났다.

 

시작하는 말

허용철 작가는 1958년 강원도 양양에서 태어나 경북 대구에서 성장했다. 인천과의 인연은 1984년 경희대학교를 졸업하고 선인고등학교에 부임하면서 시작되었다. 이후 96년 강화도로 거주지를 이전하고, 심도중학교에서 퇴직하기까지 줄곧 작가이자 교사, 미술운동가, 사회운동가, 잡지 편집자 등 다양한 행보를 이어왔다. 그가 미술에 입문했을 때는 추상미술, 미니멀리즘에 경도되었지만, 인천으로 온 후 현장 미술 운동의 중요성에 눈을 뜬다. 1986년 10월에 현장 미술패 ‘갯꽃’을 만들었고, 리얼리즘을 표방한 동인 ‘지평’에서도 활동했다. 허용철 작가는 당시 현장 미술 운동을 적극적으로 수행하여 인천 민중미술 운동의 한 부분을 담당했다는 평가를 받았다.(「인천지역 미술운동 소사(小史)」 참고) 1989년 전교조 가입으로 해직되던 해에는 교육문화공간의 필요성을 느껴 제물포에 ‘밝은터’를 만들었다. 건강한 놀이 문화가 거의 없던 시절, 학생들에게 필요한 놀이 문화를 정착시키기 위해 밝은터 내에 놀이패를 만들기도 했다. 이후 1994년 인천민족미술인협회와 인천민족예술인총연합을 창립하는 데 관여했고, 대표와 지회장을 맡기도 했다.

허용철 작가는 지역성과 장소성을 늘 중요하게 생각했다. 눈은 세계를 바라봐야 하지만 실천은 자신의 발밑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고백한다. 1996년 강화로 이사한 후에는 동료들과 강화 민예총과 전교조 강회지회를 만들었다. 또한 생태적 세계관으로 강화의 문화예술과 교육을 담아내는 연간지 <강화시선>을 2009년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발간하고 있다. 2019년 <퇴임전시회> 이후 새로운 작품세계를 모색하고 있는 허용철 작가를 11월 29일 강화 작업실에서 만났다.

 

허용철 작가

 

이설야 : 안녕하세요? 선생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선생님은 오랫동안 인천민예총과 강화민예총 등 문화예술 단체 활동과 전교조 활동을 통해서 미술운동과 사회운동을 함께해 오셨습니다. 또한 미술 교사로 제자들을 양성하고 2019년 퇴임하셨는데요. 선생님의 여러 활동이 인천 문화예술 40년사 편찬에 귀한 기록으로 남았으면 합니다. 먼저 미술을 하게 된 동기와 인천으로 오기까지의 과정을 이야기해 주세요.

허용철 : 저는 강원도 양양에서 태어났지만, 아버님이 군인이라 예편하셔서 대구에서 살았어요. 대구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아버님이 직장을 서울로 옮겨서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은 서울에서 다녔죠. 중학교 때는 만화 그리는 것을 좋아했어요. 고등학교는 추첨으로 영등포고등학교에 들어갔는데 집에 늦게 들어갈 합법적인 핑계를 대려고 미술부에 들어갔죠. 그때는 자율학습이라는 게 없었거든요. 이 미술부가 굉장히 강압적이었는데 4절지 종이에다가 일주일에 석 장씩 그리게 했어요. 매주 토요일이면 일 년 선배가 심사해서 지난주보다 나아지지 않았으면 크게 혼을 냈죠. 그러니 얼마나 열심히 그렸겠어요?

매주 일요일에는 경복궁과 창덕궁으로 야외 스케치를 나가서 아마 넉 장씩은 그렸을 거예요. 너무 힘들게 하니까 미술부를 그만두고 싶은데 그만둘 수도 없었어요. 하는 수 없이 1년은 버티자 했죠. 미술대회도 다 나가야 했어요. 가을에 미전을 하는데 한 달 동안 수업 안 들어가고 그림만 그렸어요. 저한테는 결과적으로 잘된 셈이지만요. 반강제로 1년 정도 했더니 미대 가야겠다는 생각이 자연스레 들더군요. 그리고 경희대가 주최하는 미술대회에서 최고상 받아서 특대생으로 들어갔고, 대학교 2학년 마치고 군대를 갔다 왔어요. 제대 후 3, 4학년 때는 참 열심히 그림을 그렸던 것 같아요. 학교 실기실에서 살다시피 했으니까요. 한 이 년 하고 나니까 뭔가 좀 잘 되는 것처럼 느껴지는 거예요. 대학원 가서 이 년 정도 더 하면 뭔가 될 것 같았죠. 집에다 처음으로 학비 얘기를 했더니 그건 니가 알아서 하라면서 용돈까지 끊더군요. 취직을 할까, 미술학원 강사를 할까 고민하는데 선인재단에 있던 선배가 교사 한 명을 뽑는데 오겠냐고 연락을 했어요. 그래서 인천으로 왔죠.

 

- 문화운동패를 만들다

이설야 : 인천에 미술 교사로 온 후에 미술 운동과 사회운동을 하게 된 계기와 활동을 말씀해 주세요.

허용철 : 저는 1984년에 인천에 왔고요. 미술 운동이나 사회운동을 하게 된 계기라면 아마도 인천이라는 장소성이 저한테 가장 컸던 것 같아요. 사실 학교 졸업할 때는 추상미술, 그러니까 모더니즘 계열의 미술작업을 했거든요. 그때 제가 마지막으로 작업했던 추상 표현 쪽의 미술이 미니멀리즘이라고, 최소한의 표현으로 만들어지는 미술작업이었어요. 그러다가 인천에 와서 한두 가지 계기로 확 바뀌었죠. 기존에 해왔던 미술 형식에 비하면 180도 완전히 바뀐 건데 첫 번째는 그 당시 인천에 노동운동을 하기 위해서 내려온 분들이 많았어요. 그분들하고 우연히 연이 닿아서 자주 접하다가 제 생각이 달라졌죠.

달라진 또 다른 계기로는 이런 일이 있었어요. 1985년 대구 수화랑에서 초대전을 했어요. 그때 막내이모가 대구에 살고 있었는데 제가 가장 좋아했던 이모님이었어요. 저는 대구까지 간 김에 작품 한 점을 이모한테 드리고 싶어 전시에 모셨는데 이모가 제 작품을 보시고는 작품을 달라는 말씀을 안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어떤 게 마음에 드시냐? 이것저것 보여드리며 말씀드렸는데 나중에 이모가 얘 그거 말고 풍경화 같은 건 안 그리니?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작품은 결국 못 드리고 올라왔는데 저한테는 그것이 하나의 큰 화두가 됐어요. 그 당시 제가 하던 작품이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모님은 이런 작품을 전혀 원하지 않는구나. 그래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사람도 좋아하는, 그러면서 의미가 있는 미술작업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해결이 안 되는 거였죠. 사람들 만나고 술 먹고 뭐 좀 방황하던 그 시기에 노동운동 하러 왔던 그분들을 만난 거죠.

이설야 : 그분들은 구체적으로 어떤 분들이신가요? 지금도 같이 활동하시는 분들이 있으신가요?

허용철 : 지금은 같이 활동하지 않고요. 84년에 선인고등학교 교사로 왔을 때였어요. 그때 선인재단 바로 맞은편에 새로운 미술학원이 하나 생겼어요. 미술학원이 새로 생겼으니 한번 가봤죠. 학원장은 서울대 미대를 갓 졸업한 분이었는데, 서울대 미대에서 ‘민화반’을 처음 만드신 분이더라구요. 그분한테 수배자 한 분이 몸을 의탁하러 왔어요. 그분들과 같이 이런저런 얘기도 듣고, 그분들이 주는 책자도 읽어보면서 6개월 이상 고민을 좀 했죠. 그러니까 현장 미술이 올바른 미술이라고 하는 것까지는 동의했는데, 내가 여태까지 해왔던 미술을 다 부정해야 되는 거예요. 기존에 해왔던 미술을 부정하는 과정이 좀 힘들었죠. 최종 결론은 현장 미술 쪽으로 가서 작업을 하는 거였어요.

그렇게 결정하고 처음으로 가투에 나간 것이 인천 5.3 항쟁이었어요. 그냥 혼자서 시위에 나가봤는데 어떤 분이 저를 찾아왔어요. 인천에 문화 운동하시는 분이 아무도 없는데, 문화운동패를 한번 만들어보자고 제안을 하더군요. 그분은 노동자 출신이었는데, 산선(인천도시산업선교회) 쪽 활동가였던 것 같아요. 그분 소개로 몇 사람을 만났죠. 미술하는 사람은 저였고. 그때 김말숙 씨도 있었어요. 그 다음에 풍물 하는 사람, 노래하는 사람, 환경운동 쪽에 관심 있는 사람, 그렇게 한 다섯 명 정도가 모여 공부를 시작했어요. 일단 학습을 먼저 했는데 3개월 만에 깨졌어요. 처음에 그 모임을 추진했던 분은, 학습은 짧게 의견만 모으는 걸로 하고 빨리 뭔가 실천을 하고 싶었던 모양이에요. 그런데 함께 모였던 사람들은 의견이 좀 달랐죠. 너무 급한 것 같고 우리가 아직 준비가 안 된 것 같다. 좀 더 준비를 하자고 했죠. 그 모임이 깨지면서 미술하는 사람은 나가서 그림패 만들고 풍물 하는 사람은 풍물패 만들고 노래하는 사람은 노래패 만들어 각자 하다가 같이 모여서 할 일이 있으면 다시 모이자는 결론을 내리고 헤어졌죠.

 

허용철 작가와 이설야 시인
허용철 작가와 인터뷰하는 이설야 시인

 

- 1986년 갯꽃, 민중미술의 태동

이설야 : 그 당시에는 문화 단체나 민예총이 만들어지기 전이었잖아요? 혹시 다른 문화운동 단체들이나 미술 작업하는 사람들은 전혀 없었나요?

허용철 : 그때는 하나도 없었죠. 모임이 깨진 이후 개별로 나가서 만든 풍물패 ‘한강대’, 노래패 ‘산하’, 그림패 ‘갯꽃’이 있었죠. 갯꽃은 갯벌에 피는 꽃이라는 뜻이에요. 갯돌이라는 이름을 쓰려고 했는데 목포에 문화운동 단체에 갯돌이 있더라고요.

이설야 : 그림패 갯꽃은 어떻게 만들어졌고, 구체적으로 어떤 활동과 위상을 가졌나요?

허용철 : 처음에는 혼자 했어요. 제가 조직을 만들어본 경험도 없으니까, 지역의 여러 단체에서 시각적 이미지를 요구하면 거기에 응답하는 방식으로 혼자서 일을 했는데 하면 할수록 일이 많아지더군요. 그러던 어느날 새로 이사한 숭의동 인천교대 근처에서 고등학교 제자를 만났어요. 이 아이가 인천교대 미술 전공이라고 해서 깜짝 놀랐어요. 학교 다닐 때에는 그쪽으론 소질이 없다고 생각했으니까요. 초대 인천교대 민주학생회가 미술과를 중심으로 만들어지는 중이었는데 도움이 필요하다는 거예요. 나중에 그중 한 명이 직접선거로 초대 학생회장이 됐어요. 저는 그 일을 도와주면서 너도 내 일 좀 도와줘라 했죠. 그때 저 혼자 감당할 일이 너무 많았거든요. 이 학생들에게 효율적으로 도움을 받기 위해 체계적인 공부 모임을 만들었고요.

그렇게 조직을 만들고 ‘갯꽃’이라고 지은 거고요. 1년 정도 지나 갯꽃의 활동 영역이 넓어지면서 전문가들도 한 명씩 두 명씩 합류하기 시작했어요. 그때 서울미술공동체라고 있었는데 그쪽에서도 두 명 정도가 인천으로 파견돼 왔어요. 그중 한 분이 이은홍 작가였어요. 홍대미대에서 만화를 하던 분이었죠. ‘깡순이’ 만화라고 서울 노동자신문에 실렸는데, 이 만화 때문에 국가보안법으로 구속되었던 분이죠. 그 외에도 미술대학을 졸업하고 인천에 와서 생활 틀을 바꾼 분들이 합류했죠. 인원이 좀 들쭉날쭉했지만, 늘 함께 일하던 친구는 예닐곱 명 정도였고, 전체는 열 명 가까이 있었어요.

이설야 : 당시 소집단 미술운동이 활발했었고, <한국미술, 20대의 힘 전> 탄압을 계기로 민미협(서울)이 1985년 결성되었잖아요? 이로 인해서 미술운동 세력이 결집했는데요. 이쪽과 연결은 안 되었나요?

허용철 : 그쪽하고는 연결이 안 됐어요. 갯꽃 활동하던 당시에 서울 쪽에서도 문화운동이 몇 갈래로 좀 나뉘어 있었어요. 연성수라고 당시 문화운동 쪽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분이 있었는데 아마도 갯꽃을 함께 아우르려 생각했던 모양이에요. 그래서 사람까지 파견해서 함께했는데 한 6개월 정도 하다가 다시 서울로 돌아갔죠. 그때 갯꽃에서 함께했던 그 사람들은 나중 문화운동판의 주류가 안 되었어요.

이설야 : 그러면 86년 갯꽃이 만들어지기까지 몇 년 기간이 넓은 의미의 인천민중미술운동 태동기라고 볼 수 있을까요? 이후 선생님은 교사 생활하면서 미술 운동을 하다가 1989년 전교조 가입으로 해직되었잖아요. 그 시절 이야기와 함께 전교조 활동에 대해서 말씀해 주세요.

허용철 : 갯꽃이 인천민중미술운동의 첫 조직이니까 그렇게 볼 수 있겠네요. 86년 갯꽃 창립 이후 활동영역은 크게 두 가지였어요. 지역에서 시민사회단체가 행사를 하면 지원하기 위해 그림, 깃발, 걸개, 스티커인쇄, 만화 등 시각 이미지라면 뭐든지 만드는 일이었죠. 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에는 노조 중심으로 일을 했어요. 노조 지원 사업으로 일주일에 두세 번씩 노조에 갔던 것 같아요. 주로 노조 문화부, 편집부에 가서 노보를 어떻게 만들고, 깃발을 어떻게 만들고 깃대를 어떻게 달아야 하는지 알려주었죠.

저는 사실 전교조 쪽은 생각 안 하고 있었어요. 인천 전교조 운동의 중심은 조용명 선생이었어요. 그분이 인천에서 교사 운동을 처음 시작하신 분이죠. 88년도 가을이었죠. 제가 전시하고 있는데 그분이 찾아왔어요. 당시 인천, 경기지역이 함께 교사 협의회를 구성했던 때였고 교직원노조를 만들기 전이죠. 그때 처음 인사를 나눴는데 얼마 후에 다시 찾아오셨어요. 조직을 개편하면서 문화부를 만들었더니 지원자는 많은데 문화부장이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저보고 문화부장을 해달라고, 나도 교사인데 그렇게까지 부탁하니 거절할 수 없더군요. 갯꽃도 워낙 바쁘니까 그럼 일주일에 한 번씩 회의 주재는 하겠다고 했는데 회의만 해 가지고는 일이 진행이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88년도 말에 갯꽃에다 1년만 도와주고 오겠다고 양해를 구하고, 어렵게 갔죠.

거기 합류하자마자 다음해 초에 교직원노조로 간다는 얘기가 있더니 5월에 바로 그렇게 가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해직이 되었죠. 그런데 생각해 보니까 내가 그동안 노조 문화부를 쭉 지원하는 일을 했는데, 이제 내가 노조 문화부장이 된 거잖아요. 야 이게 웬 떡이야. 이런 즐거운 일이! 그랬죠. 89년도는 전교조 운동이 가장 큰 사회운동 중의 하나였고, 노조로 가면서 오히려 그쪽에 더 집중하게 됐죠. 갯꽃은 89년도 말에 해체가 됐어요. 저는 89년도 5월에 해직되었는데, 그때 인천에 해직교사가 50명 정도였어요. 처음에는 주로 시위하러 다니고, 거리에 나가 전단 나눠주느라 문화부 일은 잘 못했죠. 89년도 가을쯤 초기 상황이 대충 정리가 되면서 원래 하고 싶었던 문화 운동을 하기 위해 ‘교육문화공간 밝은터’를 만들었어요. 공간 마련 비용으로는 제 퇴직금하고, 이종구 선생님한테 그림 두 점을 받아 판매한 걸로 충당했어요. 그 당시에 작품이 팔릴만한 작가는 종구 형 한 분밖에 없었거든요. 종구 형 그림 두 점을 받아서 그중 한 점을 최원식 선생님한테 팔러 갔었죠. 최원식 선생님이 전교조 문화 공간을 만든다고 하니 내가 사줘야지 하고 받아주셨고, 또 다른 한 점은 어떤 분이 가져가셨는지 잘 기억이 안 나네요.

그렇게 교육문화공간 ‘밝은터’가 89년도 10월에 제물포에 만들어졌죠. 초기에는 활동을 많이 했죠. 그때 밝은터 내에 풍물패와 노래패가 있었고, 기존에는 없었던 놀이패라고 있었어요. 이 놀이패는 나중에 연극패가 되었죠. ‘놀이’가 왜 중요한가 하면 일단 교사는 아이들하고 잘 놀아야 될 거 아닙니까? 교육에서는 정말 중요하죠. 그럼 어떻게 노냐? 그건 대학에서 안 가르치니까 밝은터에서 교사들한테 아이들과 놀 수 있는 놀이를 가르쳐주자 그래서 놀이패가 만들어졌던 거고, 그다음에 미술패 이렇게 네 개가 있었죠. 그리고 다음 해부터는 밝은터 중심으로 교육 문화 운동의 이론적인 틀 잡기를 고민했죠. 그때 인천지부는 물론이고 전교조에서 했던 행사 중 일부도 밝은터에서 주관 했죠.

이설야 : 전교조 전체였나요? 경기, 인천 포함한 전국이요?

허용철 : 주로 인천이었고, 초기에는 전국 문화부장 회의라고 있었어요. 각 시도 문화부장이 함께 모여 회의를 할 때, 인천 사례를 발표하면 다들 그게 가능하냐고 놀랄 정도였으니까 밝은터가 교육 문화운동 쪽에서는 꽤 선진적이었죠. 저는 밝은터에서 90년, 91년 활동했고, 92년도에 전교조 인천 문화위원장 겸 부지부장으로 갔어요. 밝은터 대표는 후배한테 넘기고요. 문화운동을 다른 쪽으로도 확대해 보고 싶어서 전교조 문화위원장 겸 부지부장을 했던 거죠.

 

강화 허용철 작가의 작업실

 

- 민예총 보다 이른 민미협 창립총회

이설야 : 그럼 전교조에서 92년부터는 부지부장 겸 문화부장을 하셨는데, 또 94년에는 민예총이 출범하잖아요? 그때 연결되는 지점이 있었나요?

허용철 : 아니요. 연결지점은 없었어요. 제가 문화위원장 겸 부지부장 임기가 끝나고 나서 고민을 했어요. 교육 문화운동이라는 것이 참 의미도 있고 재미도 있는데 미술만 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방면으로 다 하잖아요. 사람들을 많이 만나는 거니까 재미는 있었는데 93년도 말이었나. 이걸 계속할까 아니면 다시 미술로 돌아갈까 고민하다가 미술을 택한 거죠. 그러니까 94년도에 복직을 하면서 다시 미술 쪽으로 되돌아간거죠.

이설야 : 1994년 복직하시고 미술 작가로 돌아가셨는데, 그럼 인천 민미협은 어떻게 만들어졌나요?

허용철 : 민미협은 93년도부터 준비를 해서 94년도에 창립을 했어요. 그때 이종구 작가 작업실이 도화오거리 쪽에 있었는데 꽤 컸어요. 거기서 주로 만났어요. 종구 형을 좌장으로 모셨지요. 이전부터 종구 형을 중심으로 인천에 리얼리즘 쪽으로 작업하는 미술 그룹이 있었어요. 지평(地坪)이라고. 지평이 몇 년 동안 하고 있었는데 같은 팀은 아니더라도 기술적으로 도움을 좀 받으면 좋겠다 싶어서 저도 지평에 가입했었죠. 그리고 노동 현장에 있다가 나온 분들이 몇 분 있었어요. 그중 한 분이 성효숙 씨, 그다음에 인하대 출신으로 학생운동 하던 사람이 몇 명 있었어요. 김정렬 씨도 그때 있었고. 그렇게 모여서 민미협이 된 거죠. 지평, 갯꽃, 현장에 있던 사람들, 학생운동 출신들이 함께 모여 만들었는데 한 12명 됐어요.

민미협 창립총회는 93년 4월에 열렸는데 민예총보다 먼저 했어요. 카톨릭 회관에서 창립총회를 하고, 6월부터 한 달에 한 번씩 정기모임을 하고 12월에 창립전 <황해의 아침>을 열었지요. 한 달에 한 번 정기 모임을 했는데 도움이 되기도 하고 갈등이 되기도 했어요. 정기 모임 할 때마다 작가 한 명이 자기 작품을 슬라이드로 보여주고 회원들이 평가하는 방식으로 모임을 했어요. 근데 자기 개인전을 할 때는 일반 시민들이 와서 보니까 큰 부담이 안 되는데, 같은 작가한테 보여주는 것은 굉장히 부담이 됐던 모양이에요. 그래서 1년 정도 계속하다가 그다음해부터는 2개월에 한 번씩 하다가 어느 날부터 안 하게 됐죠.

이설야 : 민미협은 꾸준히 활동을 이어간 것 같은데요. 그 뒤로 어떤 사업을 했나요?. 기관지 <황해미술>의 발간과 <황해미술제>은 지금도 계속 이어가는 건가요? 이 사업의 의미와 성과 그리고 앞으로 어떤 내용으로 변화해 갈까요?

허용철 : 매년 인천 상황에 맞는 주제전과 황해미술 책자를 발간했죠. 그런데 민미협은 다 작가들인데 사업을 하려면 기획을 해야 되거든요. 작가가 기획하고 실무 일을 겸하는 게 만만치 않아요. 1-2년도 아니고 말이죠. 그러니까 다들 그런 일을 부담스러워 했죠. 초기에는 매번 주제를 잡아서 열심히 했는데 10년, 15년이 넘어가면서 아무래도 동력이 좀 떨어지는 거죠. 민미협이 인천에 수준 높은 리얼리즘 미술을 보여주었지만 후배 작가를 발굴하지 못했고 무엇보다 조직의 형식과 내용이 시대변화에 어울리게 바뀌어야 하는데 그걸 잘 못했죠. 조직은 참여작가의 성장에 실제적으로 도움이 되어야 하는데 오히려 요구하는 것만 많지 않았나 싶어요. 작년과 올해는 정평한 작가가 주관해서 <인천, 인문의 풍경>과 <인천, 인간의 풍경> 전시회를 가온갤러리에서 했죠. ‘황해미술제’나 민미협의 사업 등도 이제는 새로운 생각들이 나와야 될 거예요.

 

인천미술인협의회_황해미술 창간호 및 2회 정기전(1995) 도록 표지
인천미술인협의회_황해미술 창간호 및 2회 정기전(1995) 도록 표지

 

- 인천민예총의 창립, 공개적· 공식적 문화운동의 개시

이설야 : 그렇죠. 새로운 생각들이나 실험적인 기획도 필요하고, 새로운 세대도 영입해야겠죠. 그럼 자연스럽게 민예총 얘기로 넘어갈까요? 1994년 4월 30일 민미협이 먼저 창립했고, 1994년 9월 24일 인천민예총이 창립했는데요. 민예총 만들 때 여러 가지 문제나 상황도 궁금해요. 민예총 창립하셨을 때 선생님도 창립 멤버로 활동하셨을 것 같은데요.

허용철 : 주로 세 명이 많이 활동했어요. 박영근하고 송동수하고 저하고 이렇게 세 명이 주로 만났죠. 저는 학교에 있으니까 직책을 맡지 않았지만. 사무국장은 실무를 하는 거니까, 처음에는 송동수가 맡았죠. 나중에는 박영근 시인도 사무국장을 맡았었죠. 송동수는 원래 이름이 송성섭이에요. 가명이죠. 저도 80년대에는 허준이라는 가명을 썼죠. 민미협은 초기부터 제가 사무국장을 맡아 2년 가까이 해서 사소한 것까지 다 기억이 나는데 민예총은 제가 한 발 떨어져 있어서 그런지 정확하게는 잘 기억이 안 나네요. 그래도 대략 제가 아는 범위에서 말씀드릴게요.

그 시기에 이제 인천에도 민예총이 필요하지 않냐? 현장 문화패들도 다 없어졌고. 이제는 공개적이고 공식적으로 문화운동을 할 틀을 마련해야 하는데, 그 틀이 뭐냐? 고민하던 때였죠. 서울은 이미 만들어져 있었죠. 그러면 중앙이 있으니까 우리는 인천지회로 하면 되지 않느냐 했던 거죠. 그럼 만들기도 쉽고 지원받기도 더 용이하고. 그래서 인천민예총을 공식적으로 만들 생각을 해본 거죠. 1994년 5월에 인천민예총 준비위가 만들어졌고, 4개월 후 1994년 9월 24일 부평4동성당에서 창립대회를 했어요. 공동대표로 이가림 인하대 교수와 강광 인천대 교수가 맡았어요. 2대는 이가림 지회장, 3대는 김경인 지회장이었죠. 4대 때는 윤영천 교수가 지회장을 했고 홍정선 교수가 부지회장을 했어요. 강광 교수가 5대 지회장을 하실 때 박영근 시인이 사무국장을 맡았을 거예요.

이설야 : 이 시기는 현장 미술에서 전시장 미술 중심으로 이동하는 중이었을 것 같은데요. 인천의 미술 운동은 어떻게 변모되어 갔을까요?

허용철 : 민미협이 당시 인천의 진보적 미술가들을 거의 포괄했으니까 그 틀에서 활동했어요.

일단은 수준 높은 작품을 지역에 선보이는 것이 당면과제였고 또 미술판에서 사라진 미학 논쟁에 불을 지피고 싶었어요. 주제전을 하고 책자를 발간한 것도 그래서였고요. 민미협 조직 내부에 분과 모임을 두었는데, 이진우를 중심으로 한 벽화팀과 미술 교사들을 중심으로 한 교과연구팀이었죠. 80년대식으로 현장과 연결된 조직적 미술활동은 없었어요. 개인적으로 인천과 전국의 시민사회 단체와 연결되어 활동하시는 분들의 작품이 모임에서 공유되는 정도였죠.  (하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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