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시선〉, 생태적 세계관으로 강화의 문화예술·교육을 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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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시선〉, 생태적 세계관으로 강화의 문화예술·교육을 담다
  • 이설야
  • 승인 2022.12.27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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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문화 40년을 듣는다]
(6) 허용철 작가 – 인천민중미술운동의 발자국을 따라서(하) / 이설야 시인 대담·집필
 인천문화재단이 오는 2024년까지 인천문화예술 40년사(1981~2021)를 편찬한다. 이에 인천in은 인천문화재단과 함께 인천문화 40년을 이야기하고 증언해줄 인물 12인을 선정, 구술 작업을 진행하고 그 내용을 2023년 상반기까지 차례로 연재한다. 여섯번째 순서는 허용철 작가다. 이설야 시인이 만났다. 하편을 싣는다.

 

허용철 작가 (사진=유광식)
허용철 작가 (사진=유광식)

 

- 강화로 온 사람들

이설야 : 선생님은 1996년 강화 양도면으로 이사를 와서, 강화 지역에서 고등학교 교사생활을 하시다가 퇴임하셨잖아요. 만수동에서 강화 양도면에 오시게 된 이유와 활동에 대해서 말씀해 주세요.

허용철 : 제가 94년 복직 이후 94년과 95년에 민미협과 민예총 만드는 일, 민미협 사무국장 일을 하던 중 96년에 갑자기 강화로 이사를 오게 되었는데요. 그때 제가 만석동 아파트에 살고 있었는데, 어느날 문득 베란다에서 아파트만 보이는 모든 풍경이 너무 답답한 거예요. 이게 평소에도 늘 보던 건데 말이죠. 그 순간, 아 여기서 더 못 살겠다 하고는 강화의 학교로 가겠다고 신청을 내버렸죠. 강화는 그때 인기가 없었던 곳이라서 바로 갈 수가 있었고요. 근데 그건 형식적인 계기였고, 진짜 다른 이유는 저도 의식하지 못 했지만 따로 있었던 것 같아요. 복직하면서 저는 다시 미술 작가로 돌아가야지 생각했는데 너무 많은 일이 계속 만들어졌죠. 민미협, 민예총 일 등으로 일주일에 4-5일은 저녁에 약속이 생기니 작업할 시간이 없는 거죠. 작업하기 위해서 좀 피해 온 것이 아닌가 싶어요.

이설야 : 선생님은 강화에서도 여러 가지 일을 하셨잖아요?

허용철 : 처음에 일 배운 게 그쪽이라서 그런지 모르겠는데, 저는 개인적으로 지역성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늘 눈은 세계를 바라보고 있지만, 실천은 내가 발 딛고 있는 땅에서 해야 한다고 생각했죠. 강화에 사는 기간이 길어지면서 여러 일이 그냥 만들어진 거죠.

이설야 : 당시 활동가들이 강화로 귀농을 많이 하잖아요. (사)전국귀농운동본부가 1996년 9월19일 창립했는데, 강화로 온 시기와 귀농운동이 한참 일어나던 시기와 관련이 있을까요? 선생님은 그런 붐이 일어나기 전에 좀 앞서서 오신 것 같은데요. 강화에 오셨을 때 미술 작가들이 얼마나 있었나요?

허용철 : 저는 그냥 단순했죠. 도시에서 못 살겠어서, 작업하고 싶어서 좀 피해 왔던 거죠. 그런데 미리 와 있는 선배도 한 분 있었어요. 도장리에 살던 장진영 만화가였죠. 그 선배가 집을 소개시켜줘서 도장리에 왔는데, 막상 와보니까 여러 명이 있었어요. 그래서 그분들하고 만나서 술 먹고 같이 놀았죠. 강화에 실제로 미술 작가는 많아요. 몇 명인지는 정확히 몰라요. 행정적으로 파악이 안 됐으니까. 그런데 마당발 후배에게 물어봤더니, 한참을 계산하더니 400명이 넘겠대요. 2,000년대 초에 그렇게 많았던 것 같아요. 그러니까 제가 강화에 들어온 96년도에도 꽤 많았을 거예요. 지금은 더 많겠죠. 저는 처음에 작가가 이렇게 많으면 뭔가 해 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잘못된 생각이었어요. 왜냐하면 그 작가들 대부분이 인상파 스타일의 풍경화 그리는 작가들이에요. 그러니까 이분들은 작업실을 얻기 쉬운 곳으로 온 것이라 지역성과는 관계없었던 거죠.

 

- 강화 민예총, 강화를 주제로 한 <고인돌전> <진달래전> <밴댕이전>...

이설야 : 강화에 오셔서 강화 민예총 만들고 전교조 강화지회 활동도 하셨잖아요. 만드신 과정과 지금의 활동은 어떤가요?

허용철 : 제가 96년도에 강화고등학교로 왔는데 전교조 조합원이 저 말고 세 명이 더 있는 거예요. 당연히 함께 어울렸는데 그다음에 신규 임용 교사가 한 10명이 왔어요. 그런데 신규 임용 교사가 보기에는 전교조 쪽의 교사들이 다 좋은 선배로 보였나봐요, 우리하고 나이 차이도 나는데 의외로 같이 많이 놀았어요. 그래서 야 그러면 신규 교사들 숫자도 이만큼 되니까 이 사람들하고 같이 전교조를 만들어보자 해서 97년도에 전교조 강화지회를 만들었죠.

작가로서 저는 강화에 왔으니 강화 미술인들하고 좀 알고 지내려고 했어요. 전시도 하고요. 그때 강화에는 강화 미협은 없었고 동아리 모임 같은 것들이 있었어요. 저는 뭐 그러면 어떠냐 함께하면 되지. 그래서 처음에 같이 전시를 몇 번 했어요. 그런데 그쪽에서 미협을 만들더라고요. 미술협회 강화지회로 예총계열이죠. 저는 그것도 상관없다고 봤어요. 좁은 지역에서 미협이네 민예총이네 뭔 상관이냐 함께 전시하면 되지, 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같이 해보니까 이분들은 자꾸 도시로 나가고 싶어하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도시에 나가서 전시할 거면 각자 알아서 하자고 했죠. 우리는 지역성을 중시했는데 의견이 안 맞아서 강화민예총을 만든 거죠.

강화 민예총은 미술인이 대부분이었지만 문학 쪽에 함민복 시인도 있고, 풍물 쪽도 몇 명 있었어요. 그러니까 강화 민미협을 만들 수는 없어서 강화 민예총을 만든 거죠. 창립전 때부터 지금까지 매년 한 번씩 주제전을 하고 있어요. 예를 들면 <밴뎅이전>, 그 다음에 강화에서 살려면 시골이다 보니 다 목수가 되어야 해요. 그래서 <목수전>, 그 다음에는 <고인돌전>, 그 다음에는 저기 고려산 쪽에 진달래가 확 피니까 <진달래전>, 이런 식으로 강화를 주제로 매년 전시를 해왔죠. 코로나 때 한 2년 빼고는 계속해서 매년 주제전를 열어왔어요.

 

 

- <강화시선>에 기록하다

이설야 : 2009년부터 <강화시선>이라는 잡지를 만들었잖아요. 창간호부터 선생님이 직접 편집주간과 편집장을 맡아서 하시고 나중에는 발행인이자 편집위원으로 계속 활동하시던데. 잡지를 창간하게 된 이유와 어떻게 만드는지가 궁금해요.

허용철 : 전교조 강화지회를 만들어서 활동을 다양하게 했어요. 가령 강화 길을 함께 걸어보려고, 학생들 데리고 교사들이 ‘강화 역사길’을 먼저 시작했죠. 아마도 지금의 ‘나들길 사업’은 강화 전교조에서 처음 시작했을 거예요. ‘강화 나들길’이라는 이름은 안 썼지만 말이죠. 강화 교사들이 매년 일 년에 한두 차례씩 강화 역사길을 걷고, 어린이날 행사 등 이것저것 하고 자료집도 냈죠. 그런데 다 일회용으로 없어지는 거예요. 강화 민예총도 매년 주제전을 하는데 이런 활동도 일회용으로 없어지고요. 그래서 기록으로 남기는 것의 중요성을 깨닫고 2009년에 <강화시선>을 만들었죠. 처음엔 기록의 중요성에 의의를 두고 후배들과 편집팀을 꾸려서 잡지를 만들었어요. 그러다가 생태적 세계관으로, 강화의 문화예술과 교육을 보는 전문성을 강화한 책을 만들기 위해 편집 방향을 바꿨죠. 지금 14년째 연간지로 만들고 있고, 지난 12월 1일에 14호가 나왔어요. 처음 만들 때, 제가 민예총과 전교조를 함께하고 있으니까 발행 주체를 두 단체 공동으로 한 거죠.

이설야 : 연간지라도 지속적으로 만드는 것이 쉽지는 않을 것 같은데요. 예산문제는 어떤가요?

허용철 : 처음에는 인천문화재단에서 지원을 받았어요. 300만 원 정도였으니 늘 부족했죠. 그러다 박근혜 정부 때 지원신청이 두 번이나 탈락했어요. 첫 번째 탈락하고 나서 돈을 구할 수 없어서 제가 소장하고 있던 선배 작품 한 점을 팔았죠. 그렇게 잡지를 만들었는데 그 다음에 또 탈락했어요. 두 번 연속 떨어지니까 아니 도대체 우리를 빼고 어느 단체에 돈을 주나 싶어서 한번 들어가서 살펴봤더니 납득이 안 되는 거예요. 왜 여기는 지원하면서 우리는 안 줄까? 블랙리스트 문제 때문인가 싶기도 했지만 확인할 수가 없었죠. 하여튼 책은 내야 하니 홍선웅 작가한테 찾아가서 판화 작품을 몇 점 받았어요. 그걸 또 팔아서 해결했죠. 2년 동안 그렇게 하고 나니까 이렇게는 안 되겠다 싶어서 인천시로부터 인천민예총이 받는 지원금에 <강화시선>도 넣어달라고 요구해서 가까스로 끼어들어 간 거죠. 그때부터는 안정적으로 기금이 나와서 별문제 없이 지금까지 만들고 있어요.

이설야 : 잡지를 매개로 해서 강화의 문화 예술인들이나 지역 주민들, 그리고 같은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과 교류하고 소통하고 있을 것 같은데요.

허용철 : <강화시선>의 원칙 중 하나가 지역 필자를 발굴하는 거죠.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지역 필자만으로 구성해요. 그렇게 해서 연결되는 분들이 많이 생겨났죠. 책은 매년 800부 정도를 찍었는데, 이번 호부터는 1000부 찍기로 했어요. 인천과 강화의 도서관에 한 부씩 다 보냅니다. 강화에 있는 모든 초중고등학교 도서관에도 보내고, 지역 시민단체에도 고루 보내고요. 또 우리가 보기에 애정을 갖고 잘 읽어주실 만한 분들의 명단을 300명 정도 뽑아 책을 보내죠. 작년에 13호는 800부를 찍었는데 모자라서, 우리 보관본 30부까지 다 나갔죠. 나름대로 좀 인기가 있어요. 한 십 년이 넘어가니까 이제는 <강화시선>을 좀 알아주시는 독자도 생기는 것 같아요.

이설야 : 강화민예총에서 활동하시는 작가들의 작업과 강화민예총 소속이 아닌 작가들의 작업은 어떤지 궁금해요. 다른 장르의 작가들도 자주 만나시나요? 그리고 올해 <강화평화예술제>도 진행하셨는데요. 강화도는 분단 실향민들도 많이 살고 있잖아요. 분단이나 평화를 주제로 작업하시는 분들도 많나요?

허용철 : 강화민예총 회원 중에는 미협회원이신 분들도 있어요. 하지만 그건 상관없다고 봐요. 강화민예총 회원은 회화, 사진, 조각, 설치 등 다양한 장르로 작업하지만, 리얼리즘을 자기 작 업의 본령으로 삼는 작가는 많지 않아요. 매년 하는 주제전에는 회원 아닌 분들도 참여하고 있고 그것이 현재 우리가 원하는 방향이죠. 기획을 잘 만들면서 우리가 열려 있으면 누구든 그 틀로 함께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평화는 우리 시대의 화두 중 하나죠. 그래서 주제전에 따로 평화라는 이름이 들어가지 않더라도 그런 성격의 작품들이 많이 출품돼요. 가령 주제전이었던 <염하(鹽河)전>, <물길바람길전>, <강화십경(江華十境)전> 등 분단이나 평화와 관련 있는 작품들이 나올 수밖에 없죠. 올해의 강화평화예술제도 그렇고요.

 

강화시선 창간호와 제4호, 제13호

 

- 문화재단의 역할은 '작가를 지원하고 성장시키는 일'

이설야 : 이제 문화재단 얘기로 넘어갈게요. 인천문화재단 창립 이사를 지내셨죠?

허용철 : 2004년 12월 1일 인천문화재단이 창립되고 창립 이사가 되었어요. 인천문화재단을 만들 때 민예총에서 도움을 주려고 많이 노력했는데 그때 제가 민예총 지회장이었으니까 자연스럽게 이사로 들어갔던 거죠. 그 과정에서 인천문화재단의 역할이 뭐냐, 지역 예술인들과 어떤 관계를 갖고 가야 하느냐 문제로 고민을 많이 했죠. 초기에는 민예총에서 갖고 있던 생각들이 많이 반영됐어요. 초대 대표이사가 최원식 선생님이었잖아요. 저는 이사 임기가 2년이어서 연임해 4년을 했는데 대표이사 임기는 3년이라 최원식 선생님 임기 끝나고, 그다음 대표이사로 오신 분과 한 1년 정도 같이 했어요. 그런데 분위기가 확 달라지더군요. 그러니까 대표이사의 성격이 전체 분위기에 참 중요하죠.

이설야 : 그때 민예총의 생각이 많이 반영됐다고 했잖아요. 그 당시에 민예총 생각은 어떤 것이었나요?

허용철 : 작가를 지원하고 성장시키는 일에 재단이 우선순위를 두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니까 작가를 어떻게 효율적으로 지원할 것이냐가 중요했던 것 같아요. 예를 들어 계획과 큰 틀의 기획에도 작가를 참여시켜 안목을 키우게 하는 일도 필요하죠. 근데 제가 강화 오고 나서 오랫동안 재단 일을 하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최근에 보면 재단이 주최가 되는 행사가 좀 많은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왜 재단이 주체가 되려고 그러지? 작가를 주체로 세우고 재단은 뒷심이 되어줘야 하는 거 아닌가? 작가들이 알아서 할 수 있게 하면 안 되나? 연결하고 연결해서 작가들이 할 수 있게끔 해주면 안 될까 싶어요.

그리고 한두 번 지원금을 받아봤는데, 경쟁률이 너무 높아서 되고 안 되고 하는 건 어쩔 수 없지만 되고 난 다음에 정산을 할 거 아닙니까? 정산이 너무 복잡하고 많아요. 예를 들어 한 1억 정도 예산을 받는다고 한다면 세무 쪽에 전문가를 쓰면 되겠죠. 임금을 주고. 그런데 뭐 3백, 5백 주면서 그걸 다 하라고 하니까. 작가 입장에서는 이거 받고 복잡하게 정산하느니 차라리 안 받는 게 낫다는 지경까지 가니까. 이게 너무 관료적인 건 아닌가 생각이 들죠. 근데 생각해보니 그게 초창기에도 그랬었던 것도 같네요.

이설야 : 지금도 그런 걸 많이 지적하는데. 재단이랑 시청이랑 관계도 있고 좀 복잡한 것 같아요. 그러면 앞으로 재단의 위상과 재단이 지역에서 어떤 역할을 했으면 좋겠는지 말씀해 주세요.

허용철 : 지금 대표이사인 이종구 선생님이 지역에서 깊이 신뢰받고 있으니까 잘할 거라고 봐요. 제가 국외자가 된 지 오래라서 특별히 도움이 될 말을 할 수 있는 입장은 아닌 것 같고요. 굳이 얘기하자면 저도 이사를 해봤지만 이사로 전문적인 분들을 많이 뽑잖아요. 그런데 그분들이 와서 무슨 도움 되는 일을 하는지 모르겠어요. 이사회에 가보면 기껏해야 내규 몇 개 고치는 일을 하니까. 그게 무슨 중요한 일이겠어요. 그러니까 어렵게 이사진을 구성했으면 그 이사회의 역량을 잘 살릴 수 있는 쪽으로 가는 게 재단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요. 그리고 저는 아까도 말했지만 재단이 자꾸 뭔가를 하려고 하지 말고, 재단에 어떤 목표가 있다면 그 목표를 이루는 지점에서 작가를 주체로 세웠으면 좋겠어요.

 

허용철 작가
작업실에서 허용철 작가

이설야 : 이제 선생님의 작가로서 개인 작업에 대해서 말씀해 주세요. 여러 전시회에 참여하셨는데 특별히 기억에 남는 전시회가 있다면 말씀해 주세요. 그리고 강화에 미술 작업을 하려고 오셨는데, 실제로 작업을 많이 하셨는지도 궁금해요.

허용철 : 89년도 초까지는 노동 현장 쪽에서 사용될 수 있는 미술을 주로 했어요. 당시 인천에서 만들어졌던 모든 시각 이미지는 다 갯꽃에서 만들었을 거예요. 갯꽃밖에 없었으니까요. 노보 같은 것도 만들고요. 일이 엄청나게 많아서 그때는 밤새기 일쑤였어요. 노조 지원하는 작업을 주로 했고, 89년도 해직되고 나서부터는 교육 쪽에 있는 학생이나 교사들을 작품 소재로 삼았어요. 첫 번째 개인전은 학교에 관한 거였어요. 전시 제목은 <학교, 절망과 희망>이었어요. 96년도까지는 물감으로 주로 그렸고 후에 사진 작품으로 바뀌었는데 계기가 됐던 일이 있어요. 강화 와서 두 번째로 살았던 집이 시골집이었는데 담이 꽤 넓고 길었어요. 집주인이 저하고 동갑이었는데 살고 싶은 만큼 살라고 해서 담벽에 벽화를 그릴 생각을 했죠. 그래서 인천에 이진우라고, 벽화 운동하는 후배에게 도움을 요청했죠.

마니산이 바로 보이는 집이었는데 그 후배가 벽화를 그리면서 형은 이 좋은 풍경 속에 살면서 왜 이걸 안 그려? 하는데 이상하게 계속 그 말이 머리에 남았어요. 그래 맞아, 내가 왜 이걸 그려볼 생각을 안 했지 싶었는데 막상 그리려고 하니까, 보이는 그대로 풍경을 그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어요. 그래서 사진을 생각하게 된 거죠. 내가 찍은 사진을 출력해서 쭉 연결해 이미지를 만드는 거죠. 지금은 그렇게 하면 안 되지만 20년 전만 해도 시골은 빈터에다 온갖 쓰레기를 다 태웠어요. 이걸 그리기는 어렵잖아요. 그래서 각 집에서 쓰레기가 만들어지는 과정이나 모아서 불태우는 것들을 사진으로 찍은 후 이어서 이미지로 만들었어요. 막상 해보니까 재미가 있더군요. 그때부터 사진 작업을 한 거죠.

이설야 : 2019년 <퇴임기념전>에 올린 작품을 몇 편 봤는데 선생님의 작품 세계가 이제 이해가 가네요. 요즘 개항장 일대에 갤러리들이 많이 생겼습니다. 또한 인천의 여러 곳에서 갤러리 오픈 소식들이 종종 들려오는데요. 전시장이 많아지는 것이 미술 작가들에게 어떤 영향을 줄까요?

허용철 : 갤러리라고 하면 보통 조그만 전시장을 말하는 건데, 어떤 성격의 갤러리인지가 숫자보다 중요하다 싶습니다. 작지만 개성이 있고 또 처음의 성격을 지켜갈 수 있는 뚝심 있는 갤러리라면 많을수록 좋겠지요. 그런 갤러리라야 작가와도 상생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이설야 : 2027년 인천뮤지엄파크 내에 인천시립미술관을 개관할 예정이라고 하는데요. 미술 작가들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인천시립미술관 건립과 관련하여 작가 입장에서 제안이 있다면 말씀해 주세요.

허용철 : 미술관은 위치한 지역의 정체성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공간이잖아요. 그중에서도 광역시 시립미술관이라면 세 가지 정도의 역할을 해야 한다고 봐요. 당대 최고 수준의 볼거리들을 지역의 입장과 미래 비전을 가지고 기획해 내는 일이 하나. 지역 작가를 발굴하고 세워나가는 일이 곧 지역의 역사를 정리하고 쌓아 가는 일이 되게 하는 것이 둘. 그리고 시민들에게는 언제든 찾아가도 힐링이 되는, 놀이와 교육이 일상적, 자발적, 주체적으로 이루어지는 공간으로 만들어 가는 것이 시립미술관의 역할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미술관이 자신의 역할을 잘 찾아가면 그게 곧 작가에게도 의미가 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설야 : 오늘 긴 시간 좋은 말씀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 선생님의 작업과 전시회를 기대하며 인터뷰를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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