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으로 어린이와 어른을 함께 지키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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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으로 어린이와 어른을 함께 지키는 길
  • 최종규
  • 승인 2011.08.24 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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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책 읽는 삶] 이오덕, 《삶을 가꾸는 어린이 문학》

 1925년에 태어나 2003년에 흙으로 돌아간 이오덕 님은 1984년에 《어린이를 지키는 문학》(백산서당)을 내놓습니다. 1977년에 《시정신과 유희정신》(창작과비평사)을 내놓은 다음 두 권째 내놓은 어린이문학 비평입니다. 《시정신과 유희정신》은 2005년에 ‘굴렁쇠’ 출판사에서 새옷을 입혀 다시 냈고, 《어린이를 지키는 문학》은 2010년에 ‘고인돌’ 출판사에서 새옷을 입히며 책이름을 고쳐서 다시 냅니다.

 이오덕 님이 2003년이 아닌 2011년까지 사셨다면 《시정신과 유희정신》이나 《어린이를 지키는 문학》에 뒤이은 새로운 어린이문학 비평을 내놓았으리라 생각합니다. 가만히 살피면, 2002년에 몸이 많이 아프던 나날에도 《어린이책 이야기》(소년한길)와 《문학의 길 교육의 길》(소년한길)을 내놓았습니다. 2001년에도 병하고 싸우면서 《농사꾼 아이들의 노래》(소년한길)를 내놓았어요. 《시정신과 유희정신》은 1970년대까지 이루어진 이 나라 어린이문학을 발판으로 어린이 삶과 넋을 사랑하고 믿으려는 이야기를 담았다면, 《어린이를 지키는 문학》은 1980년대까지 이루어진 이 나라 어린이문학을 깊이 헤아리면서 빚은 어린이사랑과 어린이배움입니다. 2001년과 2002년에 내놓은 세 가지 어린이문학 비평은 1990년대를 거쳐 2000년대로 접어드는 이 나라 어린이문학이 앞으로 어떠한 길을 씩씩하며 착하게 걸어가면 아름다울까를 돌아보는 생각밭입니다.

 1977년부터 2002년까지 이루어진 어린이문학 비평책을 읽다 보면, 이 나라에 새로 태어나는 어린이문학을 샅샅이 톺아본 흐름을 짚을 수 있기도 하지만, 이동안 이오덕 님 스스로 당신 말과 넋을 더 단단하며 알차게 가다듬으려고 애쓴 발자국과 손길을 느끼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이동안 이오덕 님이 내놓은 또다른 열매 가운데 하나는 《우리 글 바로쓰기》(한길사) 세 권이거든요. 1977년에는 우리 말글을 올바로 쓰는 데에는 마음을 쓰지 못했고, 1984년에는 조금 마음을 기울였으나 살짝 건드렸을 뿐인데, 2001년과 2002년에는 아주 깊이 파고들면서 당신 말씨와 말투를 많이 고치거나 바로잡았습니다. 2010년대까지 사셨더라면 2001년과 2002년에 이룬 ‘글쓴이 말매무새 거듭나기’를 한껏 알차게 꽃피웠으리라 생각합니다.


.. (동화란) 장사하는 아주머니나 농민이나 노동자나 사무원이나 누구든지 가까이 다가가고 즐길 수 있다. 그런 문학이라야 진짜 문학이다 … 어려운 한자말을 쓰지 말아야 한다. 깨끗한 우리 말로 바꿀 수 있으면 우리 말로 쉽게 풀어서 쓰도록 해야 할 것이다 … 절실한 생각은 절실한 체험에서 나올 수밖에 없다. 흐리멍텅한 생각은 체험의 바탕이 없는 데서 나오고, 머리로 억지로 만든 실제로 없는 얘기는 어설프고 재미없는 동화가 된다 … 아무리 시가 개성 있는 것이 되어야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많은 독자들의 가슴을 건드리는 것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  (20, 40, 59, 163쪽)


 2010년에 다시 태어난 《삶을 가꾸는 어린이 문학》(고인돌,2010)이라는 책이지만, 이 책은 2010년 책으로 읽을 수 없습니다. 1984년 책으로 읽습니다. 1984년에 이룬 열매이면서 2010년이든 2020년이든 2030년이든 얼마든지 새롭게 읽고 아로새기면서 내 삶길과 삶결을 보듬는 길동무나 밑거름으로 삼을 책으로 읽습니다.

 이오덕 님은 어린이문학을 바라보는 글을 쓰면서, 이 글을 바탕으로 어린이가 착하고 참다우며 아름다이 살아갈 터전을 생각합니다. 어린이가 착하고 참다우며 아름다이 살아갈 터전을 생각하면서, 이러한 터전은 어린이를 비롯해 모든 어른이 착하고 참다우며 아름다이 살아갈 터전이 되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어린이한테만 좋으며 훌륭한 밥을 ‘쌀밥과 책밥과 말밥과 배움밥’으로 먹여야 할 뿐 아니라, 어른부터 좋으며 훌륭한 밥을 ‘쌀밥과 책밥과 말밥과 배움밥’으로 함께 먹으면서 즐겨야 한다고 거듭 힘주어 이야기합니다.

 마땅한 노릇입니다. 어른 스스로 학벌 사회와 비정규직 사회를 단단히 세우고서는 아이들한테 이 나라에서 예쁜 어른으로 자라도록 할 수 없습니다. 아이들한테 영어나 한자나 교과서를 잘 가르친다 한들, 어른이 빚은 학벌 사회와 비정규직 사회에서 어떤 어른으로 살아갈 수 있겠어요.

 모든 아이가 어른으로 자라고 나면 도시에서 아파트를 얻어 회사원이 되는 길로만 등떠미는 제도권 학교교육인데, 이러한 얼거리를 그대로 둔 채 아이들이 착하거나 참답거나 아름답게 살도록 돌볼 수 없어요. 아이들은 그림책에서만 꽃을 보고, 그림책에서만 흙을 만지며, 그림책에서만 꿈나라를 밟습니다. 아이들은 동화책에서만 구름을 바라보며, 동화책에서만 고양이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동화책에서만 이웃사랑을 나눕니다. 정작 아이들이 두 다리를 딛는 이 터전에서는 살가이 사귈 동무나 이웃을 찾기 어렵습니다. 아이들이나 어른들이나 집을 나서면 곧바로 자가용에 올라타고, 자가용에서 내리면 높다랗거나 깊은 건물로 들어섭니다. 아이들이나 어른들이나 햇볕을 쬐거나 낮하늘이나 밤하늘을 올려다볼 틈이 없어요.


.. 일본사람들이 자기 나라의 문화 유산을 아끼고 가꾸려는 몸가짐은 대단하며, 아이들도 그렇게 넉넉하게 기록된 옛이야기를 즐겨 읽으면서 자라고 있다 … 글쓴이 자신이 어린이가 사는 현장에서 함께 숨을 쉬는 민중성을 몸소 겪어야 한다 … 오늘날 어린이들이 교과서에 나오는 어린이같이 그렇게 행복하지 않다는 것, 그리고 외국 동화에 나오는 꿈같은 세계의 어린이들과 매우 다른 역사의 삶 속에 숨쉬고 있다는 것, 이것을 모르고서 동화고 소설이고 시를 쓴다면, 그런 글쓴이나 시인이 역사와 겨레에서 동떨어진 슬픈 사람이 될 것이란 사실은 불을 보는 일보다 더 환하다 … 교훈을 너무 밖으로 드러내어 보이는 훈화나 도덕 교과서의 글같이 되었다면 그것은 문학작품이라 할 수 없지만, 교훈성 그 자체를 죄다 빼려고 하는 것은 어린이문학의 본질을 모르기 때문이다. 교훈을 꺼리고 무서워하는 사람일수록 재미없고 해로운 작품을 쓰는 것이다. 교훈이 없다는 것은 글쓴이의 의도가 없고 사상이 없다는 것이고, 역사와 사회·어린이에 대한 믿음과 정열·사랑이 없는 것을 말해 준다 ..  (84, 98∼99쪽)


 2010년에 책이름을 《삶을 가꾸는 어린이 문학》으로 바꾸었습니다만, 이오덕 님이 여느 때에 들려준 말씀 가운데 하나가 “삶을 가꾸는 글쓰기 교육”입니다. 글쓰기와 배움(교육)과 글쓰기 가르치기 세 가지가 ‘삶을 가꾸는 일’이 된다는 뜻입니다. 삶을 가꾸는 일이란, 삶을 돌보거나 일구거나 사랑하거나 믿거나 좋아하거나 보듬거나 일으키거나 껴안거나 어깨동무하거나 즐기거나 다스린다는 이야기입니다. 돌보거나 일구거나 사랑하기로는 삶만이 아닙니다. 동무도 사랑하고 이 겨레도 돌보며 푸나무도 껴안습니다. 시골도 사랑하고 멧등성이도 보듬으며 자전거도 즐깁니다. 이름을 바꾸어 본다면, ‘자전거를 사랑하는 글쓰기 교육’이 되기도 하고, ‘설거지를 즐기는 글쓰기 교육’이 되기도 해요.

 어떤 틀에 박힌 이야기가 아니며, 어떤 틀에 매려는 교훈이 아니에요. 사람이 사람다이 살아가는 길을 어른부터 밝히면서 어른이 좋은 짝꿍을 사귀어 혼인을 하면서 아이를 낳아 어버이가 될 때에, 내 아이한테 어떠한 삶말과 삶책과 삶꿈과 삶사랑을 물려줄 수 있느냐를 찾자는 이야기입니다.

 이리하여, “어린이를 지키는 문학”이라 할 때에는 “어른을 지키는 문학”이기도 하고, “사람을 지키는 문학”이기도 합니다. 이오덕 님이 돌아보기에, 이 나라 어른들은 어린이도 못 지키고 어른도 못 지키기 때문에 이렇게 《어린이를 지키는 문학》이라는 이름을 붙여서 어린이문학 비평을 내놓았습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요즈음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는데, 어린이문학이란 어린이만 즐기는 문학이 아닌 줄 아직 어른들은 제대로 깨닫지 못해요. 어린이부터 즐기는 어린이문학이고, 글을 깨친 사람 누구나, 이를테면 여느 노동자나 시골 흙일꾼 누구라도 읽거나 즐기는 어린이문학입니다. 권정생 님이 이룬 어린이문학은 어린이만 즐기는 문학이 아니라 ‘어린이가 읽을 수 있는 글’ 눈높이로 맞추어서 할머니 할아버지도 기쁘게 즐기는 문학이에요.

 곧, 어린이를 지키는 문학일 때라야 어른을 지키고 사람을 지킵니다. 이 땅을 지키고 이 나라를 지킵니다. 핵무기나 군대가 이 나라를 지키지 않습니다. 어린이문학이 이 나라를 지킵니다. 경제성장률이나 대기업이 이 나라를 지키지 않습니다. 어린이문학이 이 나라를 지켜요.

 이 나라를 지키는 가장 아름다우면서 사랑스럽고 참다운 길이 무엇인가를 밝히려고 1984년에 내놓은 책이 《어린이를 지키는 문학》입니다.


.. 어린이문학은 어린이에 대한 사랑이 밑뿌리로 되어 있어야 하는 문학이다. 어린이에 대한 사랑이란 아이들의 귀여움에 빠져 버리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아이들의 마음, 아이들이 살아가는 현실을 깊이 이해하여 그들이 안고 있는 문제를 풀어 주고, 그들이 사람답게 자라나도록 하려는 정신이 곧 어린이 사랑이다 … 지금까지 학교에서 진행되어 온 사람됨을 짓밟는 시험경쟁 교육은 어떻게 해서라도 고쳐야 하겠다. 단편 지식을 집어넣고 외우는 경쟁 대신에 자발성과 자율성을 우러르고 창의성을 뻗쳐 주는 종합 사람교육으로, 물질 가치만을 가장 높게 생각하는 교육에서 정신 가치를 탐구하는 철학교육과 예술교육으로 방향이 바뀌어야 한다 … 아이들을 사랑하고 그들이 참된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어린이문학인이라면 마땅히 어린이가 참되게 자라는 것을 가로막고 있는 걸림돌에 대해 관심을 가질 것이고, 이를 없애려고 애쓸 것이다 … 어린이교육에서 철학이고 과학이고 역사고 모두 문학으로 해 나가는 것이 가장 바람직합니다. 어린이문학은 철학과 종교와 과학과 역사와 어학 들을 모두 아우르며 그것을 이론으로가 아니라 살아 있는 문학으로 진리로 깨닫게 하는 데 귀한 값어치가 있습니다 ..  (209, 256∼257, 264쪽)


 2010년에 이르러 책이름이 바뀐 채 다시 나옵니다. 다시 나온 책을 새롭게 읽으면서 곰곰이 생각합니다. 2010년에 이 책에 새 이름을 붙여야 마땅한지 찬찬히 돌아봅니다. 이제, 이 나라 어린이는 어느 만큼 지킨다 할 만하니까, “삶을 가꾸는”이라는 이름으로 고칠 만한지 가누어 봅니다.

 이 나라 어린이가 어린이답게 어린이 삶을 꾸리면서 어린이다운 사랑을 마음껏 누리거나 나누면서 활짝 웃음꽃을 피우니, 이제는 “어린이를 지키는” 일은 안 하거나 살짝 손을 내려놓아도 될는지 생각합니다. 초등학교 낮은학년부터 거칠거나 막된 말을 쉬 내뱉는 아이들이 서울부터 제주까지 가득가득한데, 이 나라에서 “어린이를 지키는” 일은 그만두거나 그치거나 멈추어도 될 만한가 헤아립니다. 초등학교 영어 교육에 뒤이어 초등학교 한자 교육까지 다시 시키려 하는 정부요 언론이요 학습지회사요 교사요 지식인이요 어버이인데, 어느 누구도 “어린이를 지키는” 데에는 마음을 안 쏟아도 괜찮은지 알쏭달쏭합니다.

 어린이한테 착한 삶과 참다운 넋과 아름다운 꿈을 보여주거나 물려주거나 가르치거나 함께하는 어른이 거의 안 보이는데, 이제는 “어린이를 지키는” 일은 이름부터 그닥 알맞지 않다고 여기는 일이 옳거나 바르거나 괜찮은지 아리송합니다.


.. 어린이문학을 신앙처럼 믿고 평생을 가난한 겨레의 어린이를 생각하며 살아가신 (이원수) 선생은 겨우내 차가운 몸으로 언 땅에 나 있는 밀과 보리를 덮어 주고 나뭇가지를 안아 주다가 드디어 봄이 오자 녹아 버리는 때묻은 눈 바로 그것이었다 … (《북미 최후의 석기인 이쉬》에 나오는) 이쉬가 온갖 문명의 이기를 보았을 때, 어떤 것은 재미있게 여기고 어떤 것은 놀라워 하지만, 다른 어떤 것은 대수롭지 않게, 또는 시시하게 여기는 것이 참말 재미있다. 그런 이쉬의 취향을 샅샅이 살펴보면 문명 세계의 빈 구멍이 남김없이 드러날 것 같다 … 내가 보기로 이쉬의 이런 취향은 오늘날 눈먼 기계문명을 날카롭게 비판한 말없는 철학이 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1911년 황금문 공원에서 해리 파울러가 대륙횡단 비행을 위해 이륙했을 때 모든 사람이 흥분했지만 이쉬만은 차가운 반응을 보였다는 것은 무엇을 말해 주는가? 만일 이쉬가 오늘날까지 살아 있었더라면 온갖 원자무기와 우주항공 물체에 대해서 한층 더 차가웠을 것이 틀림없다 ..  (307, 508∼509쪽)


 어린이를 안 지키면 사랑할 줄 모릅니다. 어린이를 안 지키는 어른은 어린이도 어른도 사랑할 줄 모릅니다. 지키는 일은 감싸고 도는 일이 아닙니다. 지키는 일은 울타리를 치는 일이 아닙니다. 지킨다 해서 예방주사를 놓는다거나 방부제를 먹이는 일이 아닙니다.

 지키는 일이란 사랑하는 일입니다. 지키는 일이란 아이 스스로 메마르거나 거친 이 땅에서 씩씩한 몸가짐과 맑은 마음가짐으로 착한 길을 꿋꿋하게 걸어가도록 보살피면서 함께 살아가는 일입니다.

 아이들이 어린이문학을 참답게 즐길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아이들이 초등학교 6학년을 마치고 중학교 1학년이 되더라도 어린이문학을 실컷 누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중학교 2학년이 되니 갑작스레 청소년문학만 즐겨야 할 아이들이 아닙니다. 어린이문학은 고등학생도 대학생도 즐기는 문학입니다. 회사원도 대통령도 국회의원도 즐길 어린이문학이고, 할머니와 아저씨와 아줌마와 할아버지가 함께 즐기는 어린이문학이에요.

 청소년문학이란 청소년부터 즐기는 문학입니다. 어른문학은 말 그대로 어른부터 즐기는 문학이 되겠지요. 어른문학을 쓰거나 즐기려면, 어느 어른이더라도 어린이와 청소년을 거치니까, 어린이문학과 청소년문학이 예쁘게 바탕이 될 때라야 비로소 예쁘게 어른문학을 꽃피웁니다. 어린이문학을 지키지 않는 터전에서 어른문학도 어른사회도 지킬 수 없하고, 지킬 힘을 스스로 북돋우지 못합니다.

― 삶을 가꾸는 어린이 문학 (이오덕 글,고인돌 펴냄,2010.7.20./1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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