윈나우가 가능한 상황에서 리빌딩 외치는 구단의 속내 놓고 갑론을박
가히 겨울 스포츠 최고 인기 구단이다.
누가 뭐래도 올 시즌 가장 핫한 프로배구팀은 흥국생명이다. 프로배구 남녀 14팀 통틀어도 이 사실은 변함없다. 심지어는 ‘종목을 달리해 프로농구 남녀 팀 모두 따져도 흥국생명 인기를 이기는 곳 없다’고 말하는 전문가도 있다. 티켓 파워도 이를 증명한다. 시즌 중반임에도 벌써 두 번이나 인천 삼산월드체육관의 5,800석을 가득 메웠고, 원정에서도 상대 팀 체육관을 쉽게 매진시킨다. 이런 인기는 두말할 것도 없이, 배구 여제 김연경을 앞세운 ‘선수단’의 공로다.
선수단의 인기가 샘날 만큼 부러웠을까? 아니면 부담스러울 만큼 폭발적인 흥국생명의 인기를 선수단 단독으로 떠안는 게 안쓰러웠을까? 새해 벽두부터 이번에는 구단이 누구도 생각지 못한 기발한 아이디어로 더 큰 시선을 모으고 있다.
다만 선수들은 경기력으로, 구단은 경기 외적인 문제로 주목을 받고 있는 게 차이라면 차이다.
프로구단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시즌 중 감독과 단장의 동반 사퇴라는 깜짝쇼를 벌인 구단은 지상파 방송을 포함한 각종 언론에 연일 등장하며 올겨울 화제성 1위 구단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한방에 선수단의 노고를 충분히 덜어주고, 부러워할 필요 없을 정도다. 이런 ‘뜨거운 반응’은 비단 언론 뿐 만이 아니다. 한국배구연맹 게시판과 선수의 대표적인 커뮤니티인 ‘김연경 마이너갤러리’도 흥국생명 배구단의 ‘이벤트’에 폭발적인 반응을 보인다.
흥국생명 구단의 이번 ‘행위’가 고도의 마케팅이라면 완전 ‘신의 한 수’가 되고 있다. 마케팅에 있어 가장 중요하다고 할 시기 마저 얼마나 절묘한가? 팀은 최근 홈 23연승을 달리던 극강의 1위 현대건설을 물리치고, 권순찬 감독은 경기 뒤 “우승에 욕심이 있다”고 분위기를 띄운 바 있으니 찬물을 끼얹기에는 너무나 절호의 찬스. 더구나 다가올 경기에서 올 시즌 연패를 안긴 팀에게 복수를 꿈꾸고 있어 팬들의 관심이 고조된 상황이니 타이밍이 너무 좋았다. 아마도 큰 틀에서 시장을 읽고 더 큰 주목도를 노린 마케팅이었으리라. 1위를 턱밑까지 위협하는 2위 감독을 시즌 중 물러나게 하는 것만큼 강력한 한방이 있을까?
사실 경기 외적으로 화제를 몰고 다니는 데는 흥국생명이 나름 천재적이라는 소리를 듣는다. 특히 감독 교체 분야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2005년 출범한 V리그에서 사령탑 교체가 가장 많다. 무려 10명의 감독 중 7명이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시즌 중 사임하거나 경질됐다.
또 김연경의 FA 신분 문제로 짧지 않은 기간 동안 다툼을 일으켜 화제를 일으킨 바 있다. 임대 기간의 FA 자격 기한 인정에 관한 문제로 당시에도 큰 화제를 모은 바 있다.
가깝게는 소속 선수들인 이재영-다영 자매의 학폭 문제로 흥국생명 구단의 기사가 언론에 도배되기도 했다.
이번 사태에 대해 언론의 보도를 종합해보면 구단에서는 “구단이 가고자 하는 방향과 부합하지 않아 부득이하게~” 라고 ‘포장’했지만 쉽게 말해 ‘구단의 말을 잘 듣지 않는 신임 감독을 구단이 사퇴케 한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사퇴 당한’ 권순찬 감독이 최근 모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출전 선수 기용에 대한 고위층의 오더가 있었다”고 밝힌 바 있다. 신진급 선수를 기용하라고 압박을 가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권 감독이 거부하자 ‘사퇴를 가장한’ 경질 조치가 내려졌다는 것. 정리하자면 신진급 선수 위주의 팀 리빌딩(rebuilding)을 강조한 구단 고위층 말을 듣지 않고, 윈나우(win-now)로 1위 욕심을 낸 감독을 물러나게 한 셈이다.
그러나 이런 언론의 기사를 믿을 수 없다.
흥국생명 배구단이 그랬을 리가 없다. 1971년 태광산업 여자배구단 뿐만 아니라 더 거슬러 올라가 1963년 동양방직 남녀배구단까지 전신으로 쳐주는 여자 배구 역사에서 흥국생명 배구단은 가장 오랜 팀 중 하나다. 그런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며 특히 여자 배구계에서 큰 역할을 한 흥국생명 배구단이 그렇게 납득 할 수 없는 이유로 감독을 내쳤을 리 없다고 믿는다.
더구나 2005년 데뷔 후 17년 만에 올 시즌 FA 자격을 취득한 배구 여제 김연경이 다음 시즌 팀을 자유롭게 떠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는 흥국생명이 더더욱 그런 결정을 내렸을 리 만무하다고 믿고 싶다. 종목을 막론하고 프로팀이 긴 세월 암흑기를 감수하고도 리빌딩을 진행하는 단 하나의 이유는 팀 우승 때문이라는 걸 알 텐데, 우승할 기회 앞에서 그걸 차버린다? 그렇지는 않을 것이리라.
아마도 뭔가 다른 큰 뜻이 있지 않을까?
혹시 주목도를 크게 끌어올려 흥국생명을 아시아 최고의 유명 구단으로 만들기 위한 마케팅 천재의 전략적 노이즈 마케팅? 아니면 흥국생명의 전력을 약화시켜 여자부 V-리그의 중위권 싸움을 더욱 치열하게 만들어 배구의 더 큰 붐업을 일으키겠다는 깊은 뜻? 그것도 아니면 프로구단이 그럴 리 없겠지만 우승 뒤 지급해야 할 포상금 등 보너스가 아까워 일부러 우승 도전을 포기하는 거?
그게 뭐가 됐든 배구 팬이나 일반인인 우리 같은 보통내기들은 상상하지도 못할 어마어마한 큰 뜻이 있으리라. 그렇게 믿고 싶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시즌을 이어가야 하는 선수들은 구단의 ‘뭔지 모를 큰 뜻’ 탓에 시즌 도중 ‘선장 잃은 선원’이 돼 버렸다. 갑자기 감독대행이 된 이영수 수석 코치와 선수들은 당장 1월5일(목) 인천 삼산월드체육관에서 올 시즌 맞대결에서 연패를 안긴 GS칼텍스를 만난다.
TV 중계 시청률, 관중 동원(1위) 등 흥행과 성적(2위)에서 돌풍을 달리는 가운데 그 돌풍을 멈추게 할 만한 파장을 일으킨 흥국생명 구단. 한 시즌도 못치른 신임 감독 경질 뒤 며칠째 언론의 쏟아지는 비판 기사와 각종 게시판을 달구는 팬들의 폭발적인 관심(실상은 비난)에도 침묵을 지키고 있는 흥국생명 구단의 큰 뜻은 과연 무엇일까? 정말 큰 뜻이 있길 바란다.
다만 2위 감독의 시즌 중 경질 사유가 기존 언론 보도와 같다면, 팬들의 분노에 찬 행위는 게시판에 머물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이미 선수단 일부에서 경기 보이콧까지 거론됐다고 알려진 마당에 팬들은 더욱 싸늘하게 돌아설 것으로 예상된다. 프로구단에게 팬들의 차가운 시선만큼 무서운 징벌은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