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다리 책방에서 창영초교를 들춰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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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다리 책방에서 창영초교를 들춰본다
  • 곽현숙
  • 승인 2023.02.01 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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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다리 책방거리에서]
(3) 배다리 책방 속 창영초교
 ‘배다리, 우리가 지켜야할 인천의 역사입니다.’

 

배다리 책방 유리창에는 동그란 초록 바탕에 써있는 빛바랜 구호문이 아직도 붙어있다.

‘배다리, 우리가 지켜야할 인천의 역사입니다.’

2007년 관통도로반대 운동 1년 반 지나면서 배다리를 깊이 알아가던 ‘배다리위원회’가 2008년 7월부터 만들어간 구호다.

배다리 책방거리에서 다시 옛 책들 속으로 들어가 옛 배다리를 읽는다.

 

'이모님 김활란'
'이모님 김활란'

'이모님 김활란'에서

배다리는 어떤 곳이었나?

‘이모님 김활란’을 열어보면, 앞머리에 배다리 모습이 나온다. 1907년, ‘오르는 산이 있고 물이 흐르는’(당시 바다 갯골이 아벨서점 근처까지 와 닿았다), 그 마을에서 영친왕이 일본으로 떠나려 하는 장면이다. 배 터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이 영친왕이 일본에 안 간다고 울고불고 하던 모습을 보고 와서 전하는 말을 듣고, 어린 김활란이 11살짜리 왕자가 엄마를 떠나서 배를 타고 떠나야 하는 심정을 슬퍼하며 몇 시간을 뒤 뜰 나무 아래에서 울었다는 기록, 동네 사람들이 오랜 날들을 슬퍼하던 이야기가 실려있다.

그때 인천은 중구와 동구였다. 중구는 일본인이 모여 사는 주택과 여러 나라의 조계지로 나뉘어지면서, 동구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마을이 되었다. 대부분의 우리 사람들은 상업이나 각종 노동으로 부두나 중구의 양관들 사이를 다니면서 생계를 이어갔다. 어쩌면 최초가 많았던 인천의 현장을 직접 접하던 배다리 사람들이 아니었을까.

30년대에 금곡동에 태어나 사셨던 오광철 선생님은 “아침, 저녁이면 배다리 철로 밑으로 중구로 출퇴근하는 사람들의 물결이 대단했어요.”라고 하신다. 저녁 밥상에 모여든 가족에게 그날 있었던 ‘최초의’ 일들이 화제가 되었을 것이다.

 

리뷰 인천
리뷰 인천

'리뷰인천’에서

‘리뷰인천’ 2009년 여름호에 인천시사편찬위원회 강덕우 박사가 쓴 ‘배다리 산업도로’ 특집에 ‘한 시대 역사가 머문 곳’의 소제목 ‘인천 3.1운동의 발원과 노동 운동의 점화’ 에 있는 글을 발췌해 본다.

‘창영학교 3,4학년 학생들이 학교를 박차고 나와서 인천 공립상업학교 학생들과 합류하여 시가지를 돌면서 시위 하였다... 학교 상황을 경찰에 알리려는 학교에 반발하여 전화 줄을 끊는 사건... 3.1운동 여파로 학생 수가 417명에서 315명으로 줄어드는데 의거 여파로 퇴학 이 한 요인으로 작용 하였다.’

인천이 개항 이래 일본인이 많이 거주해 일본 군.경의 사전 단속이 철저했음에도 3.1운동이 배다리에서 점화돼 봉기했다는 점에 큰 의의가 있다. 배다리 3.1운동은 5월 까지 인천 전역에 확대 되는 계기가 되었다.

1920년대부터는 ‘정미소, 성냥공장 및 부두 노동자들의 노동 쟁의가 끊임없이 시작되었다. 뿐만 아니라 동양방적, 우마차 조합, 양말직공, 인천 염업조합, 매립 공사장, 인천 수산주식회사. 위생소속의 직원, 인천 차량회사, 세관구내 하역 노동자 등의 단독 또는 연대 파업이 지속적으로 발생 하였다... 일제 강점기의 노동운동은 쟁의가 반복되면서 점차 민족운동의 일환으로 전환하였다... 1938년 내리교회에서 개혁적인 사람들의 몸짓으로 창영교회가 생기고...’

 

배다리에서 도시의 미래를 묻다
배다리에서 도시의 미래를 묻다

'배다리에서 도시의 미래를 묻다’에서

2009년 ‘배다리에서 도시의 미래를 묻다’가 발간됐다. 이 책을 보려 최종선 선생이 찾아오셨다. 아버님이 일제 때, 창영학교 선생님이셨다고 한다.

당신도 졸업을 했으면 38회인데 아버님이 교동으로 좌천되는 바람에 창영을 졸업하지 못했고 70년대에 창영학교 교사를 지냈다고 말씀하신다.

저녁마다 건너방에 아버님 지인들이 모이고, 사범학교를 국비로 다니고 생필품까지 받는데 졸업이 가까워지자 그만 모든 돈을 내어놓고 독립운동으로 떠나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하신다. 아버님이 몇 년에 한 번씩 먼 길을 떠나시는데 돌아가실 때까지도 말씀을 안 해 주셨다고.

창영을 다닐 때 학교 모자를 쓰고 다니면 부러움의 대상이었단다. 일제 말엽 창씨개명을 안 한 학생들이 제법 있었는데, 많은 불이익이 있음에도 그 부모가 안했다고 한다. ‘동구는 팽팽한 애국정신으로 무장했던 곳’이라고 일제 말엽 어린 창영 학생이 말한다. 당신이 창영에 교사로 있던 70년대에도 창영을 나온 부모들이 자녀도 창녕에 보내려고 이사하는 일이 있었다고 한다.

 

인천 인물 100
인천 인물 100인

'인천 인물 100인’에서

경인일보가 2009년 펴낸 ‘인천 인물 100인’. ‘자율적인 초등교육의 모범을 세운 백파(白波) 조석기’ 편에 창영초교에 대해 나온다.

‘인천 창영초등학교는 해방 이후 우리나라의 실험장이었다. 학생들이 만드는 신문이 국내에 최초로 생겼으며, 학생용 골프장과 교사용 당구장, 어린이 은행도 있었다. 어떤 학생들도 각종 클럽활동을 경험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 보이스카웃과 걸스카웃트는 창영초교 학생들이 처음 조직했다. 설마 그 시대에 그런 것이 있었을까 싶은 이 모든 일은 한 명의 교장에 의해 이루어졌다.’

‘1953년에 만든 신문은 학생들이 학교 안팍의 기사 작성에서 편집까지 했고, 인쇄소도 있었다. 교내에 4면짜리 신문이 매주 월요일 아침에 학생들 책상에 놓여 있었다. 어린이은행은 올바른 저축 정신과 경제인을 기르는... 걱정하는 교사들의 지적에 골프는 어린이들이 할 것을 어른이 하는 것뿐이라는 거, 선생들이 당구를 하면 안 되는가? 반문하며 위트로 넘겼다는... ’

조 교장은 노변야화에 실린 '노교사(老敎師)의 넋두리'에서 교육현실에 대해 “초등학교가 국민의 기초 교육을 담당한 완성 교육기관으로서의 엄연한 존립 가치를 상실하고 중학 입시 준비의 장소로 전락된 현실을 슬퍼하지 않을 수 없다. 엄밀한 의미에서 본다면 현재의 한국에서는 오직 대학만이 완성 교육기관이요, 그 외의 초·중·고등학교들은 모두 입시 준비학교로서의 가치밖에 없는 성 싶다...”

그 시절, 현장교육으로 초등교육에서 중요함을 알고 시도해 나간 교육자로서 입시 체제에 갇혀버릴 어린이 교육의 난맥을 보며 애태웠던 그 마음이 지금 나의 폐부를 찌른다.

 

창영초교 교정의 강재구상

배다리마을 창영동에서 창영초등학교를 나오고 창영교회를 다닌 고 강재구 소령은 수많은 부하들의 목숨이 위태로워지자 폭탄을 안고 산화하였다. 강재구 소령의 행동은 마을과 학교를 오가며 보며, 듣고, 독서(강재구 소령은 정음서점 단골로 정음 사장님에게 월남가기 전 훈련에 들어간다고 인사하러 왔다 갔는데, 사고가 있었다고, 신용석 선생님 친구이며 정음서점 아드님으로부터 듣는다.)로 스스로를 키워내 나온 행동이 아닐까. 학교는 정신의 싹을 스스로 키워내는 방법을 일깨우며 돕는 그런 곳 아닐까?

창영학교의 이전 문제가 인천의 이슈가 된 요즈음이다. 2007년도에 관통도로를 내 배다리를 없애는 시정의 무모함에 많은 사람들이 반대하면서 배다리를 알아가는 시간을 맞을 수 있었듯이, 창영초교 이전 문제가 조석기 교장의 열린 교육의 장, 강점기 애국애족, 독립운동의 마당이었음을 일깨우는 시대적 소리가 아닐까, 배다리 책방거리에서 흥분된 마음으로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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