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동원'의 명백한 증거물, 조병창 병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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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동원'의 명백한 증거물, 조병창 병원
  • 김성복
  • 승인 2023.03.11 0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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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김성복 / 캠프마켓 시민참여위원회 위원
부평 조병창 병원 건물
부평 조병창 병원 건물

부평미군부대공원화협의회를 조직하여 인간띠잇기와 걷기대회 등 비지땀을 흘리며 투쟁해 온 20년의 세월... 특히 환경오염 문제를 가지고 씨름하며 수고한 모든 이들에게 감사를 표하면서 역사생태문화공원의 방향성을 말하고자 한다.

‘강제동원’으로 지어진 조병창 병원! 그 강제동원의 명백한 증거물이 철거위기에 있다. 일본 총리 기시다를 이어서 외무상 하야시 요시마사도 역시 강제동원은 없었다고 말한다. 이제 강제동원이 있었다 아니다의 문제는 한일 간에 진실 확인 공방으로 번지게 될 것 같다.

이 한일관계의 핵심 사안인 강제동원의 증거는 인천병조창을 지하로 만들던 과거에서 확인할 수 있다. 동북아역사재단 조건 연구원의 연구 논문 ‘일제 말기 인천육군 조병창의 지하화와 강제 동원’ 요약에 의하면 1941년 5월에 문을 연 인천육군 조병창에 지하화라는 방침 정해졌고, 1945년 3월에 구체적으로 계획되고 수평으로 굴착한 지하시설에 주요 생산시설을 은닉하려는 시도가 있었다고 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에 일제는 조병창의 지원을 위해 수많은 조선인을 강제동원한 것이다.

인천 육군조병창 측이 작성한 동원계획에 따르면 지하 시설 건설을 위한 인력이 4천 명이었다고 한다. 향후 조병창 지하화와 관련한 유적의 지속적인 조사와 연구, 강제동원 피해에 대한 규명이 계속되어야 한다.

인천의 시민사회단체들은 말한다. “인천시 부평구에 있었던 인천육군조병창은 1941년 개창해 1945년 8월 일본이 패망할 때까지 무기를 생산했던 일본 육군의 군사시설이다. 현재 캠프마켓과 부영공원 등 부지 약 115만평에 해당한다. 일본이 식민지 조선에 육군조병창을 설치하게 된 것은 1937년에 일으킨 중일전쟁이 1939년에 수렁에 빠지면서 중국 전선에 무기를 보급해야 할 시급한 상황에 처했기 때문이다..... "

1941년 5월 5일 개창식을 한 인천육군조병창도 일본 육군 조병창 편제의 기준에 따라 병원을 함께 개설했다. 일본 자료 「1945년 인천조병창 상황보고」에 따르면, 조병창 병원에서는 ‘조병창 소속 직원은 물론 가족의 보건 지도를 적극 과감하게 실시’했다. 1945년 초에는 야간진료를 개시할 정도로 중요한 곳이었다. 1945년 9월 미군이 인천육군조병창 자리를 접수해 에스컴 시티로 명명한 후 조병창 병원은 382위수병원으로 사용했다. 400병상 규모로 알려져 있다. 현재 서울대병원이 600병상이라고 하니 그 규모를 알 수 있다.

이에 시민사회단체들은 역사공원으로서 이 병원 건물을 보전하자고 주장한다. 지난 겨울 영하 20도의 추위에도 불구하고 천막농성을 진행해온 그들의 충정과 선의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반면에 부평동과 산곡동 주민 일각에서는 모든 건물과 나무들을 들어내고 허허벌판에 호수공원을 만들자는 주장을 하고 있다. 아니 될 일이다. 부산의 하야리아 미군부대를 반면교사로 교훈을 얻어야 한다. 그 부대처럼 반환받은 곳을 황량한 공간으로 만들어 놓은 일이 결코 반복되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캠프마켓은 현재 모습 그대로인 자연과 생태계를 파괴하지 않는 생태공원이 되어야 할 것이다. 청설모와 맹꽁이가 살아있는 공원으로 가야 한다. 건물들도 토양오염 정화를 위한 것이 아니고서는 그대로 놔둔 채, 공간 활용이 되기를 바란다. 예를 들어 빵 공장 건물도 소규모 극장으로 개조하여 문화시설로 사용했으면 좋겠다. 무조건 부숴버리고 뭉개버리는 것이 능사가 아니다.

특히 지하 토굴은 사람이 드나들 수 있도록 버팀목으로 지지하여 통로를 만들고 통풍이 잘 되도록 공기를 주입하여 역사박물관으로 다시 태어나게 해야 한다. 실무자의 보고에 의하면 지하에 물이 고여있어 조사를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한다고 하는데, 한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인천시에 양수기가 몇 대인가? 소방관서의 도움이면 일주일 안에 다 뽑아낼 것이다.

현재 부평공원 지하에는 옛날에 군사작전을 위해 사용하던 벙커가 있다고 한다. 원적산 기슭에 있는 토굴과 이 벙커는 모두 일본 제국주의의 착취와 수탈의 현장이며 강제동원의 증거를 역사적으로 보여주는 교육장이 될 것이다.

끝으로 캠프마켓은 젊은이들이 찾아오는 공원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싶다.

대한민국뿐 아니라 세계를 바꾸는 문화의 전위부대가 이곳에서 움틀 수 있도록 자유와 평등, 정의와 평화 에너지가 넘쳐나는 장소가 되기를 바란다. 부연하여 오늘날은 예술로 창조적인 도시공간을 열어가는 시대이다(예술로 지역활력; 이무열 신현길 공저)

건물 한 동을 예술대학원대학교에 내어주었으면 좋겠다. 단설대학원으로 음악 미술 연극 영화 무용 석박사 통합과정과 평생교육원을 유치하여 활기 넘치는 공원캠퍼스로 탈바꿈한다면 훗날 일자리 창출뿐만 아니라 문화도시 인천, 예술 도시 부평의 보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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