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 1500년 전 역사가 깨어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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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 1500년 전 역사가 깨어나다
  • 전갑남 객원기자
  • 승인 2023.03.16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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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백제 웅진시대의 찬란한 문화 현장을 보다

충청남도 공주는 백제의 비밀을 품은 도시이다. 공주에 있는 송산리 고분군(사적 제13). 공산성에 멀지 않은 야트막한 언덕에 자리 잡고 있다. 고분군은 백제 웅진시대 왕과 왕족의 무덤일 거라는 추정은 했지만, 그동안 무참히 도굴되고, 고대사의 비밀을 간직한 채 잠들어 있었다. 그래서 송산리 고분은 1호기부터 7호기까지 차례로 번호로 매겨 놓았다.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 입구.

여러 번 공주를 지나치기만 했지, 직접 무령왕릉과 왕릉원을 찾기는 처음이다. 백제인의 숨결을 느끼고자 하는 기대를 안고 찾았다.

백제는 21대 개로왕 때 고구려 장수왕의 공격을 받아 수도 한성(서울)을 잃은 후, 금강이 있는 천혜의 요새인 웅진(공주)으로 천도하게 되었다. 웅진시대는 개로왕 475년부터 성왕 538년까지 64년간 백제의 수도로 화려한 문화를 꽃피웠다.

우리는 삼국시대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다. 철갑 기마병으로 대륙을 호령하던 고구려,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신라! 두 나라에 비해 백제는 상대적으로 작고 약한 나라로 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삼국 중에서 맨 먼저 전성기를 누리고, 백제가 찬란한 문화의 꽃을 피웠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많다.

그런 가운데 동아시아의 문화교류로 우뚝 선 나라가 백제라는 사실이 알려지게 된 사건이 있었다. 19717. 전 국민을 깜짝 놀라게 한 기적 같은 무령왕릉의 발굴이 그것이다. 장마철 피해를 방지하기 위해 배수로 공사를 하던 6호기분 옆에서 벽돌 무덤의 입구가 발견된 것이다.

무령왕릉 발견 당시의 모습을 설명하였다.

송산리 고분 제7호기. 1500여 년 묻혀있던 무령왕릉이 우연히 세상과 만나는 순간이었다. 백제의 찬란한 문화가 열리는 계기가 되었다. 학자들 사이에는 20세기 한국 고고학 사상 이보다 위대한 발견은 없었다고 평가했다.

발굴조사에서 처음 보게 된 것은 입구에 놓여있던 수호신 진묘수와 지석이었다. 지석을 살펴보는 순간, 삼국시대 무덤 중 무덤의 주인이 누구인지 최초로 정확히 밝혀지는 감격스러운 장면이 연출되었다.

지석에 새겨진 내용은 너무도 뚜렷하게 드러났다.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이 62세 되는 계묘년(523) 57일 임진날에 돌아가셔서, 을사년(525) 812일 갑신년에 이르러 대묘(大墓)에 예를 갖추어 안장하고 이와 같이 기록한다."

전시관 안의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묘지석.

백제 사마왕(斯麻王)25대 무령왕(武寧王)의 어릴 적 이름으로 <삼국사기> <백제본기> 무령왕 부분과 완벽하게 일치하였다.

왕릉에서는 왕과 왕비의 관을 비롯하여 1084,600여 점이 유물이 발견되어 당시 무령왕과 왕비의 삶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 전시관. 무령왕릉의 내부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전시관 입구.
6호분 남벽에 그려진 주작. 
전시관 안의 내부.

왕릉원 전시관을 둘러보았다. 전시관은 무령왕릉 및 5, 6호기분을 실물과 동일한 크기로 재현하여 실제 모습을 보는 느낌이 들었다.

무령왕릉은 연꽃무늬 수만 장 벽돌을 정교하게 쌓아 올려 만들었다. 이는 중국 양나라의 묘제를 받았음을 알 수 있다. 무령왕과 왕비의 관()은 일본 금송으로 제작되었는데, 이는 주변 동아시아 국가와의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음도 파악된다.

무령왕릉에 출토된 왕과 왕비의 금제관식 모형.

유물 중에는 국보로 지정된 건만 1217점에 이른다. 불꽃이 타오르는 듯한 화려한 왕의 금제관식은 역동적인 백제문화의 정수를 보여준다. 또한, 왕비의 관식은 꽃병 속에서 연꽃이 피어난 듯 아름답다. 금제관식 디자인은 금빛만큼이나 눈이 부시다. 이밖에도 귀걸이, 목걸이, 팔찌, 청동거울, 석수, 도자기, 유리구슬, 다리미 등 방대한 유물이 출토되었다. 이러한 유물들에서 백제의 세계관과 당시의 찬란한 문화를 그대로 보여주고도 남음이 있다.

그런데 위대한 무령왕릉 발굴에서 고고학 발굴에 있어서는 안 될 뼈아픈 실수를 저질렀다고 한다. 발굴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엄청난 폭우가 쏟아졌다. 발굴은 중단되고 계획된 야간 발굴도 취소되기에 이르렀다. 비가 그쳐 발굴은 다시 시작되었는데, 단 하룻밤 만에 유물 수습을 끝내버렸다. 체계적이고 계획적인 발굴이 아닌 주먹구구식 발굴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유물은 짓밟힐 수밖에! 잃어버린 역사의 흔적에서 풀리지 않은 미스터리도 남겼다. 아쉬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백제 웅진시대의 송산리 고분군. 진묘수를 따라 산책하기 참 좋다.
잘 정리된 소나무숲길이 아름다웠다.

전시관을 나와 세계문화유산 송산리 고분군 산책길을 걸었다. 무령왕릉도 밖에서 보았다. 고분군 능선의 곡선과 소나무숲이 참 아름답다.

엄청 넓지는 않아도 적당히 높은 구릉이라 산책하기 딱 알맞다. 백제문화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고, 1500년 전 백제인의 숨결을 어렴풋이 느끼면 봄이 오는 길목에서 잘 정돈된 길을 걷는 재미는 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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